예루살렘 – Nothing or Everything 4편
예루살렘 – Nothing or Everything 4편
  • 이상우
  • 승인 2019.07.0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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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보는 역사이야기 <5> 예루살렘 – Nothing or Everything 4편

인류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통치방식은 ‘분할하여 지배하라(divide et impera)’라는 명제였다. 고대 정치학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전통적인 집단 배제의 원리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로마제국의 카이사르, 몽골제국, 르네상스 시기의 마키아벨리,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그리고 19~20세기의 제국주의 국가들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법칙처럼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종족이나 민족, 혹은 지역을 분리하여 지배하는 이 비인간적이지만 손쉬운 방법으로 인하여 수많은 갈등과 학살의 원인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분할 지배의 후유증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남아있어 세계 곳곳에서 분쟁의 뿌리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여러 피해자들이 있겠지만 최장기간 피해자는 아무래도 유대인이 아닐까 싶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차별과 탄압을 받아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잔혹하게 묘사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중세 시대에 그려졌던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는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들의 교리는 같은 신자들끼리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믿던 유럽인들은 유대인에게 돈을 빌려야 했는데, 이때 생겨난 이미지가 샤일록인 것이다. 유대인이 금융업을 주로 행했던 것은 사회에서의 차별로 인하여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었던 이유가 있기도 했다. 물론 십자군 전쟁이 지나고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자 교리고 뭐고 불로소득을 벌 수 있는 고리대금은 각광받는 업종이 되었다. 오죽하면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보다 더 하다’라는 기록도 남았다. 그렇지만 ‘이게 다 유대인 때문이다’라는 인식은 계속 되었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려는 모습은 시공간을 막론하고 곳곳에서 보이는 모습인 듯하다. 아무튼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가 쌓여 결국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와 같은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중세에 새롭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기원전 시기에도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요 이유는 종교 때문이었다. 다신교가 주류였던 헬레니즘 시기에는 종교에 대한 교류가 활발했다. 왕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선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제우스의 아들이었다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서는 이집트 토착 신인 라(Ra)의 아들이라고 했다. 사람들도 좋아 보이는 신들을 따라 종교를 바꿨다. 아예 믿었던 신을 교체까지 하기는 그랬는지 신을 서로 섞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는 중에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지켜가는 유대인을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시대에 종교라는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믿음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사회규범에 더 가까웠다. 내 신만 옳고 너의 신은 틀렸다는 것은 사회 유지 측면에 있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신앙만을 믿으며 타 종교를 배척하는 유대인은 반사회적인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유대인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종교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을 보내준 그들의 신은 ‘메시아(Messiah)’라는 두 번째 다윗이자 구세주를 당신이 사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보내줄 것이었다. 그날이 오면 유대인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과 함께 영원한 천국을 누릴 것이었다. 비록 유대인들이 약속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곳은 폐허만이 남아있었다. 유대인의 지도자 느헤미야(Nehemiah)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했지만 갈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구원해줄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다. 주변 상황도 점점 만만치 않아졌다.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 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게 멸망(BC 330) 했다. 그러나 곧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제국도 그의 사후(BC 323)에 공중분해되었다. 광대한 영토는 그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제국을 차지하기 위하여 디아도코이(Diadochi, ‘후계자들’ 이란 뜻) 전쟁이 벌어졌다.

디아도코이 전쟁
디아도코이 전쟁

유대인들의 땅은 교통의 요지답게 또다시 전장으로 변했다.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를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다섯 차례의 전쟁을 치른다. 타 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유대교에게도 호의를 베풀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유대교 경전을 종합하고 당시 국제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진행(BC 2세기 경) 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구약인 70인(72명이 번역했다 한다) 역(譯, Septuaginta) 성경이다. 이에 반해 셀레우코스 왕조는 유대교에 적대적이었다. 다섯 번의 전투 끝에 예루살렘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BC 200).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BC 215~ BC 164)는 당시 떠오르는 지중해의 패자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의 단결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는 왕국 내의 모든 종교의 관행을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를 중심으로 하는 예식으로 재편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저항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교 성전의 보물을 압수하려고도 하고, 유대교를 믿는 자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안티오쿠스 3세 때 유대인의 부유한 재산을 군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특혜를 주었던 것이었다. 사실 그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 중에 정통 유대인은 드물었다. 옷과 언어를 비롯한 모든 삶의 방식은 이미 헬레니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종교만 건들지 않는다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었다. 사실 유대교도 믿고 제우스도 믿는 융통성 있는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지만 안티오쿠스 4세는 이를 철폐하고 유대인에게 돼지고기를 먹게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등 유대인과 유대교를 탄압했다. 유대교에 적대적이라기보다는 단일 국교로 안정을 이루려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그가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별칭은 ‘신의 현현(顯現)’이라는 뜻의 ‘에피파네스(Ephipanes)’였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라고 불렀다. ‘미친놈’이라는 뜻이었다.

안티오쿠스 4세의 동전
안티오쿠스 4세의 동전

BC 167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신상을 놓은 것을 기폭제로 하여 유대인의 독립전쟁인 마카베오 전쟁이 발발한다. 모딘의 사제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 다섯을 중심으로 뭉친 유대 독립군은 광야로 나가 셀레우코스 왕조와 전쟁을 벌인다. 마타티아스가 전사하자 그 아들 유다가 지도자를 이었다. 유다는 ‘마카베오’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했다. 이는 그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외쳤다는 ‘미 크모카 벨림 야훼!(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과 같겠습니까? 야훼여!)’라는 말의 앞 글자를 따오기도 했으며 ‘망치’라는 뜻이기도 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모세가 했다는 이 말(탈출기 15장 11절)은 마카베오 전쟁의 정체성이 어떻게 정의되었는지 잘 알려준다. BC 164년 유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정화한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누카(Hanukkah)’(개신교 성경에는 수전절, 천주교 성경에는 성전봉헌축일이라 한다)라 하여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유다는 4년 후 엘라사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의 유지는 그의 형제 요나단이 이어 지속적으로 투쟁을 이어간 결과 셀레우코스 왕조와 강화를 이루는 데 성공한다(BC 15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나름의 자존심이었는지 요나단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지는 않고 대사제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전통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인 사독의 후손만을 대사제로 인정했지만 요나단은 사독의 후손이 아니었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치권을 획득하지만 여기서 다시 갈등의 씨앗이 생겨나며 일부 유대인들은 광야로 떠나버린다. 아무튼 마타티아스의 후손들은 정통 사제 가문이 아니어서인지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 셀레우코스 왕조에 내분이 벌어지고 이를 타 세력을 확장하던 요나단이 암살당하자 그 형제 시몬은 셀레우코스의 새 군주 데메트리우스 2세와 협상을 벌여 독립 유대 왕국을 건설한다(BC 142).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예루살렘이 함락(BC 586) 당한지 444년 만에 유대인들의 ‘언약의 도시’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카베오의 선조인 하스몬의 이름을 따 ‘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Dynasty)’가 열리게 된다.

하지만 하스모니안 왕조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왕과 대제사장을 겸하지 않았던 유대 전통을 따르지 않은 점, 사독의 후계자가 아닌 점, 말만 유대인이지 모든 통치 방식은 헬레니즘적인 그리스 방식인 점들이 많은 유대인들에게 불만을 일으켰다. 게다가 하스모니안 왕조는 종교로 인하여 일어났지만 결국 국가의 정체성이 유대교와 별 상관없어져 버린 모순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스모니안 왕조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그저 많은 국가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신앙을 유지했다. 사독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보수적인 정통 유대교 교리를 지키는 사두개인(Sadducee), 독립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하스모니안 왕조의 방식에는 불만을 갖고 구전 율법을 만들어 내어 지키는 바리새파(Pharisee), 이전에 광야로 떠나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공동체를 이루던 에세네파(Essenes) 등으로 나누어졌다. 유일신을 믿지만 방식은 계파에 따라 각자 다른 시대에 온 것이었다.

한동안 하스모니안 왕조의 지도자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영토를 예전 다윗-솔로몬 왕국만큼 확장한다. 이 와중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이주했던 이민족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지배하에 들게 된다. 이들은 유대교를 받아들이든지 살던 곳을 떠나든지 해야 했기에 유대교를 믿는 이민족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민족 중에는 에돔(Edom), 혹은 이두메(Idumaea)라고 부르는 부족이 있었다. ‘붉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 집단도 하스모니안 왕조에 편입되었다. 산이 많고 척박한 이 곳의 에돔인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장남 ‘에서’의 후손들이었다. 에서의 동생인 야곱이 유대인들의 시조로 인정받는 데에 비하여 에돔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악마의 앞잡이’쯤으로 생각되었고 또 실제로 바빌로니아 등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앞장서기도 했다. 정통 유대의 왕국이라면 이들을 바로 추방했겠지만 이미 세속화가 진행된 하스모니안 왕조의 마음은 넓었기에 개종만 한다면 별 문제는 없었다. 이런 하스모니안 왕조에서 또다시 형제간에 내분이 발생한다(BC 66). 그리고 모든 세력은 로마에 자기 편을 들어달라며 구원을 요청한다. 로마는 이때를 틈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히르카누스라는 자를 이름뿐인 대사제로 임명한다.

헤로데 대왕
헤로데 대왕

에돔인의 유력 가문이었던 안티파트로스 가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시 유대에 진주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ius Magnus)와 친교를 맺는 한편, 또 다른 로마의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게 재빨리 접근한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실권을 잡자 덩달아 안티파트로스는 유대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된다. 한동안 파르티아(페르시아계 왕국)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로데(Herod the Great)은 로마 군대를 이끌고 와 예루살렘을 탈환(BC 37) 하고 로마 제국 치하에 헤로데 왕국을 건설한다. 유능한 사람이었던 헤로데은 하스모니안 왕가 후예들의 견제를 물리치고 왕권을 공고히 하는 한편 종교를 완전히 정치와 분리시키고 대사제의 임명권을 자신이 갖는다. 지중해 연안의 카이사레아(Caesarea)를 건설하여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동지중해 3대 항구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그가 유대 왕국을 다스리기에는 정통성 시비가 늘 따라다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하스모니안 왕가의 딸인 마리암느(Mariamne)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왕권을 외척들이 노린다고 생각되자 부인과 자신의 숙부, 그리고 부인의 친인척들을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능력은 뛰어났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힌 헤로데의 앞에 어느 날 동방에서 왔다는 박사(Magi)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헤로데에게 말했다. ‘제왕의 별’이 떠올랐다고. 동방박사들은 그 별의 주인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제왕의 별’ 혹은 ‘베들레헴의 별(Star of Bethlehem)’은 ‘메시아’가 마침내 이 세상에 왔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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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동 주민 2019-07-03 12:48:01
재밌게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