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이들을 봐왔다
땅 위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이들을 봐왔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10.23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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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건축] <4> 관덕정

축제는 희생을 기본으로 한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축제는 성공적으로 치러진다. 그 죽음의 대상은 대게는 짐승이다. 소나 염소나 돼지 등은 자신들이 죽음으로써 인간들이 벌이는 광란의 축제를 돋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그 희생이라는 게 짐승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인간을 제물로 삼았다는 얘기들은 널려 있다. 그건 바로 인신공양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심청전이 대표적인 인신공양 사례가 아닐까. 효녀 심청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긴 하지만 사람을 바다에 수장하는 이야기가 ‘효’에 가려있을 뿐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찌 효에 가려야 하나. 효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그런 인신공양은 우리나라에만 있던 건 아니다. 심각한 건 서양이다. 서양은 인간의 온갖 잔혹사가 담겨 있다.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 북쪽에 위치한 사형 집행장에서는 1년에 여덟 번의 공개처형이 열렸다고 한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아니 처형당하는 이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을 보기 위해, 그것도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 돈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몰려드는 군중만도 최대 1만4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1530년에서 1630년의 100년 기간동안 이처럼 공개처형을 당한 이들은 7만5000명이나 된다. 계산해보면 한차례 처형 장면을 공개할 때마다 100명 정도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예전엔 사람 목숨은 너무 가볍게 여긴 게 사실이다. 태어나서 죽는 일도 다반사였고, 숱한 전쟁을 겪으며 죽기도 했고, 전염병이 돌면 순식간에 마을이 초죽음으로 변하는 일도 흔했기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마냥 여겼던 건 아닐까. 그건 그렇고, 인간이 제물이 되는 이야기는 제주도에도 보인다.

제주 초가는 문전본풀이에 잘 나와 있다. 제주 초가의 구성이 곧 신화와 연결이 되고, 각각의 신들이 맡는 역할도 달랐다. 변소로 불리는 측간 역시 제주 초가의 중요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문전본풀이엔 나중에 변소의 신이 되는 ‘측도부인’ 이야기가 나온다. 측도부인은 노일저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문전본풀이를 여기서 풀어내려면 너무 길다. 결론부터 말하면 노일저대는 죽임을 당한다. 노일저대는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간 장본인이었고, 찢어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른바 처절한 복수의 상대가 되었다. 그렇게 죽은 노일저대의 몸은 바다의 고래가 되고, 해삼이 되고, 전복이 되고, 물뱀도 되고, 벼룩도 되고, 도마뱀도 된다. 희생은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된다.

노일저대를 바라보면 죽음은 사라짐을 뜻하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죽음으로써 남을 살리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노일저대는 이미 지어진 건축물의 공간 구분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 건축활동이 진행되는 와중엔 어떠할까. 그냥 집만 뚝딱뚝딱 짓기만 하면 될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건축은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사람이 들어가서 생활하는 집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는 수단으로 건축활동이 이뤄지기도 한다. 건축은 땅위에 올리는 행위이기에 땅에 온전히 박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흔들리게 되면 땅위에 올린 행위는 말짱 도루묵이 된다. 제대로 남아 있어달라는 의미로 희생을 치른다. 살아있는 닭을 그 자리에서 죽여서 닭 피를 여기저기에 흩트리는 작업이 건축에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문제는 그게 사람일 때이다.

제주의 방어유적 가운데 수산진(水山鎭)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수산진은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위치한 진성이다. 진성은 성곽을 갖춘 방어시설이다. 진성이 설치되기 이전에 방호소가 있었는데, 그때 이야기인지 그 후의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방호소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세종 21년(1439)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내용이다. 이야기를 풀어보면 여기에 성을 쌓는데 계속 무너지기만 했다. 담을 쌓고 그 위로 몇 번 말을 달리면 성은 와르르 무너졌다.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스님이 등장하고, 스님은 성이 무너지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 방법이라는 게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스님은 담 속에 어린 처녀를 두면 된다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스님 말대로 일곱 살 어린아이를 수산진의 성담 밑에 생매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산진 성담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혼을 달래주려고 굿을 하고, ‘진안할망’ 혹은 ‘관청할망’이라고 부르며 위로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수산진 북동쪽에 진아할망당이 자리잡고 있다.

건축물로는 제주에서 유일한 보물로 지정된 관덕정. 김형훈
건축물로는 제주에서 유일한 보물로 지정된 관덕정. ⓒ김형훈

관덕정도 사람을 희생시킨 이야기가 있다. 관덕정은 건축물로는 제주의 유일한 보물이다. 설마 이 건물이 사람을 희생시켜 만들었을까라고 의문을 하겠지만, 이야기로 전해진다. 사료로는 기록되지 않은 전설로 흘러내려온다. 집을 지으면 쓰러지고, 다시 지어도 또 쓰려지곤 했다. 최고의 목수들이 모여서 관덕정을 만드는데 건물이 계속 쓰러지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느날 스님이 나타났다. 지나가던 스님은 “또 쓰러지겠다”며 한마디를 한다. 정말 그랬다. 잘 올린 집은 다시 쓰러졌다. 그 스님을 수소문해 한달만에 찾아내 해결방안을 물었다. 사람을 제물로 상량식을 하면 된단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희생할 수 있나. 스님은 몇날 몇시에 상량 준비를 해서 “상량”이라고 외치기만 하란다. 그 날이 다가왔다. 목수들은 스님이 알려준 몇날 몇시에 “상량”을 외쳤더니 지나가던 솥장수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다가 솥의 언저리에 목이 깔려 그 자리에 죽고 만다. 어쨌건 전설이지만, 전설에 따르면 관덕정도 사람을 희생시켜 만든 건물이 된다. 전설에 담긴 관덕정은 세종 30년(1448) 작품이다. 사람을 희생시키고, 스님이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가 수산진성이랑 닮았고, 시기도 엇비슷하다.

이제 관덕정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본다. 옛사람들은 활쏘기를 즐겨 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활솜씨는 워낙 유명하다. 갑옷으로 둘러싸인 적장의 입을 벌리게 해 죽였다는 이야기도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성계만 그러했느냐. 다들 그랬다. 활쏘기를 즐겨 했다. 관덕정의 ‘관덕(觀德)’은 활쏘기와 연관된 단어이다. <예기>를 보면 “활을 쏘는 것은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는 구절이 나온다. 관덕정의 관덕은 바로 이 구절에서 옮겨왔다. 다른 말로 한다면 “활쏘기 동작을 보면 그 사람의 덕을 살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활쏘기를 배울 때 반듯한 수련자세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힘써 과녁을 뚫는 게 활쏘기의 능사는 아니었다. 집중을 해서 과녁 가운데 맞추는 ‘적중’이 중요했다.

<예기>만 보더라도 활쏘기는 단순한 무예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의례의 역할을 했던 게 활쏘기다. 세조 때 양성지는 상소를 올려 ‘대사례(大射禮)’를 할 것을 주장한다. 이후 대사례는 매우 중요한 의례로서 위치를 한다. 대사례 때는 왕이 직접 활을 쏘고, 신하들도 서로 활을 쏘며 상도 받고 벌칙도 받았다. 대사례 때는 표적에 화살이 맞으면 북을 치고, 맞히지 못하면 쇠를 치도록 되어 있다. 누군가는 대사례가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관리는 대사례가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임금의 후계자인 세자도 활쏘기를 준비해야 했다. 세자를 위해 활쏘기를 거들어주는 관리인 시사관이 있을 정도였다.

제주목사로 왔던 이형상이 제작을 한 <탐라순력도>만 보더라도 활쏘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활과 직접 연관된 그림이 모두 7점이며, 순력 곳곳에 활쏘는 장면이 포함된 걸 보면 활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그림은 더 많다. <제주전최>라는 그림엔 활쏘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주 많다. 유학을 배우는 ‘강유’만도 300명이 넘는다. 제주도내 유학자들은 이날 행사 때 다들 모인 모양이다.

그러나 활쏘기는 ‘놀이’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겉으로는 ‘관덕’을 외쳤지만 속으로는 활쏘기를 ‘놀이’라고 불렀다. 활쏘기와 같은 흥미진진한 놀이는 세상에 더 없다. 공자는 일찍이 정신에 집중하는 활쏘기를 강조했지만, 임금들에겐 짐승을 사냥하는 최고의 놀이수단이 활쏘기였다. <시경>에 “호락무황(好樂無荒)”이라는 글이 보인다. “즐기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여자에 빠지면 ‘색황(色荒)’이 되고, 사냥에 빠지면 ‘금황(禽荒)’이 된다. 여기에 조선시대 임금들의 ‘금황’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는 그렇지만, ‘관덕’을 제대로 이행한 임금이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다시 관덕정 얘기로 들어가 보자. 관덕정의 현판은 안평대군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산해의 글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판 얘기를 하면 더 길어지기에 관덕정의 실체에 접근하는 이야기만 해보자.

관덕정은 활쏘기를 하는 장소로 넒은 터를 지녔다. 읍성이 있던 제주목 당시엔 관덕정 일대는 광장으로 역할을 한다. 그건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덕정 앞으로 차도가 만들어져 차량 왕래가 있지만 여전히 여기서는 문화행사나 각종 행사가 열리고, 종종 집회도 열리곤 한다. 제주도지사가 된 원희룡 지사가 제주지사로 도전을 하며 첫 목소리를 냈던 곳이 바로 관덕정이기도 했다. 그만큼 상징성을 지닌 곳이 관덕정이다.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관덕정은 그 줄기를 이어온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데, 하필이면 관덕정은 사람의 피를 불렀다. 관덕정이 만들어진 얘기만 그러지 않다. 1901년 신축교란 때는 이재수가 제주성을 점령해 관덕정 일대에서 천주교 교인들을 처형했다. 1947년 3월 1일은 4.3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관덕정에서 발생한다. 미군정 당시 경찰의 발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6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곳이 관덕정이다. 1949년 6월엔 무장대의 마지막 사령관인 이덕구의 시신이 내걸린 곳이 관덕정이다.

관덕정은 장두를 부른다. 장두는 민중을 구하러 일어난 이들을 말한다. 이재수도 장두였고, 이덕구도 장두였다. 장두의 역할은 죽음을 불사하는데 있다. 장두는 언젠가는 죽을 걸 알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대신에 정부를 향해 민중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도록 만드는 게 장두의 역할이다. 현기영은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통해 장두의 최후를 잘 묘사하고 있다.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순교의 상징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의 십자가와 함께 순교의 마지막 잔영만을 남긴채 신화는 끝이 났다. 민중 속에서 장두가 태어나고 장두를 앞세워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섬 공동체의 오랜 전통, 그 신화의 세계는 그날로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

-현기영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중 일부

저항일까, 반항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인가. 장두의 삶이란 죽음엔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남들에게 평화를 가져오고, 사회문제도 개선할 수 있다는 그런 의지가 장두의 가슴엔 있다. 제주의 근현대 역사만 놓고 보면 이재수의 삶이나, 이덕구의 삶이나 다른 건 없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놓는 그 행위는 바로 인신공양과 다를 바가 없다. 심청과 다를 게 뭐가 있나.

관덕정은 15세기 이후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눈을 부라리고 있겠지만 수많은 이들이 오고가고 수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얽혀 있다. 그래서 관덕정을 단순한 건축물로 보고 싶지 않다. 덕을 행하겠다는 아주 유교적인 가치가 관덕정의 이름에 붙어있겠지만 그 이름 뒤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덧없음은 뭘로 표현이 가능할까.

관덕정에서 바라본 제주목관아. 아쉽게도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을 향해 총을 쏘았던 곳을 헐리고 없다. 김형훈
관덕정에서 바라본 제주목관아. 아쉽게도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을 향해 총을 쏘았던 곳은 헐리고 없다. ⓒ김형훈

아쉬운 게 있다면 현재 이뤄지고 있는 행위 자체에 있다. 관덕정은 기억의 산물이다. 관덕정을 만들었을 당시의 기억이 있고, 그 이후로도 그 기억은 중첩되며 내려왔다. 상량식을 할 때 솥장수의 목숨을 담보로 했던 기억은 전설이 되어 내려오고, 이재수의 죽음과 이덕구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더더욱 지금 우리 곁에 가장 가까운 역사가 되는 4.3을 관덕정은 어찌 바라보고 있을까. 1947년 3월 1일 미군정 당국의 발포로 발생했던 초등학생의 죽음을 관덕정은 목도를 했다. 문제는 초등학생을 비롯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장소는 사라지고 대신 목관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관덕정은 그런 저런 이야기를 봐왔다. 초등학생의 죽음도 봤고, 경찰서가 헐린 장소에 목관아가 들어서는 장면도 봤다. 관덕정은 오랜 시간 그 장소를 지켜왔기에 기억을 지니고 있으련만, 우리는 목관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게 기와를 얹힌 건물인지, 초가였는지도 모른다. <탐라순력도>를 통해 기와였음을 알 뿐이다. 대신 우리는 목관아가 헐린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경찰관서 등의 모습을 기억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 그 자리를 지킨 건물은 죄다 사라졌다. 조선의 지배층이 있던 목관아는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 정치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뭔가 업적을 만들었다는 성취감 차원에서 목관아를 만들어낸 창조성이 중요할테지만, 나머지야 그렇겠는가. 이덕구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했던 관덕정은 어떤 생각을 4.3 당시 하고 있었을까. 지금은 또 어떨까. 시인 김경훈의 ‘관덕정’이라는 시가 관덕정의 심경을 잘 그려냈다.

역사를 함몰시키려는 듯
그 시신에 꽂혀 있었던 조롱의 숟가락을

그대는 듣는가
군사독재를 끝장내려는
1987년 6월항쟁의 함성을

1901년 신축년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건 이재수 항쟁의 함성을

그대는 아는가
여기 관덕정 앞 광장에서의
1947년 3월을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무고한 희생과
그에 저항한 전 도민적인 장기파업을

그대는 보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전시되었던
장두의 시신을

그대는 느끼는가
1945년 해방 후 일장기 내려지고
태극기 올렸던 그 단 한 달의 자주적 열망을

그 열망을 비웃으며 관덕정을 행진하는
보무도 당당한 미군들의 싸늘한 시선을

그대 말하는가
이 관덕정 광장 5백 년 치욕과 통한의 역사를
바람에도 의연히 펄럭이는 탐라 자존의 깃발을

이제 다시 노래해야 할
해방과 통일의 그 4·3의 봄을

- 김경훈의 ‘관덕정’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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