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4.3에 대해 처음 물어본 사람이다.”
“당신이 4.3에 대해 처음 물어본 사람이다.”
  • 이겸
  • 승인 2018.10.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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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기록자들] <5> 강덕환 시인②
이겸(사진심리상담사, 여행과치유 대표)

강덕환_2편

강시인과 걸었다. 출퇴근 차들뿐 아니라 공항을 오가는 차들로 붐비는 곳, 바로 옆의 숲길을 걸었다. 도령마루는 걸어서 올 수 없는 곳이다. 차도로 가로 막혀 있는 곳이라 인도가 끊긴 곳이라 접근이 매우 어렵다. 제주 4.3 표지판은 안 보인다. 그 대신 해태제과에서 세운 해태 동상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숲으로 들어서야만 ‘도령마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있다. 2018년에 세운 것이다. 제주시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조난당한 피해자들의 섬 이다. 우린 그 섬으로 들어섰다.

‘조난자’가 아닌 ‘조난지’ 라고 적혀있다. 그 누구도 찾지 않은 곳, 하지만 제주시 중심의 4.3 조난지. 도령마을. ⓒ이겸
‘조난자’가 아닌 ‘조난지’ 라고 적혀있다. 그 누구도 찾지 않은 곳, 하지만 제주시 중심의 4.3 조난지. 도령마을. ⓒ이겸

 # 문학과 4.3의 연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문학은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 제주 4.3에 대한 사실을 기반으로 작가는 글을 쓴다. 대본을 쓴다. 연극이 만들어 진다. 마당극이 펼쳐진다. 암울한 시대에도 문학은 여지없이 시대의 아픔을 기록했다. 당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국가로부터 많은 문학 작품들이 판매 금지 되었고, 문인들이 투옥 되었다. 우리가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었고, 당대의 아픔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의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일례로 4.3당시 큰 희생들이 많았다. 그 중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령마루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특히 현기영의 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에서 도령마루의 4.3학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작품과 문학인의 역할이 없었다면 당시의 상황은 묻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문학에서 제주 4.3에 대한 수난사는 많이 다루어져 왔다. 한편으로는 승화의 단계도 필요하다. 제주 4.3이 남긴 교훈이 무엇인지? 아픈 역사를 통해 계승 할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루어져야 한다.

섬은 배와 같다. 잘났건 못났건 망망대해에 놓인 배에서 벗어나면 죽는다. 함께 화합해야만 한다. 남쪽에서만 연구되는 제주4.3을 넘어 남북이 함께 연구하는 제주 4.3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아픔을 지닌 곳이 많다. 여수와 순천, 광주와 대구, 노근리 희생자들과 연대하는 문학 이어야 한다. 제주 4.3은 인권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인들의 인권과 함께 다루어야 한다.

# 제주 4.3 특별위원회의 성과는 무엇인가?

제주 4.3 특위는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가능했다. 지방 의회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1994년부터 제주 4.3 희생자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도의원이 17명 이었다. 해당 지역구에서 1명씩 17명의 조사위원이 선정 하였다. 14,243명의 신고를 받았고 희생자로 등록했다. ‘4.3 피해신고서’가 만들어지고 기록으로 남았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사건이다. 자신의 피해 상황을 스스로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글을 몰라도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신고서 작성을 도왔다. 4.3 피해신고서는 개인의 역사 중 아주 중요한 시대를 정리한 기록이다. ‘4.3 희생자 보고서’를 가지고 국회 4.3 진상 규명 청원서를 올렸다. 1993년과 1996년 두 차례 청원을 했고, 1996년도에 청원이 받아 들여졌다. 또한 둘로 갈라져 있던 4.3 위령제가 하나로 합쳐졌다. 반공유족회와 제야단체가 각각 지내던 위령제가 1994년부터 합동 위령제로 통합되었다. 이 모든 것이 제주 4.3 특별위원회의 성과다. 제주도 의회는 여러 생각을 가진 도민들의 대표가 모인 곳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다. 도의원들과 협력해 가며 제주 4.3의 진상을 밝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 역할을 제주 4,3특별위원회가 하면서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특별법에 ‘불이익 처벌 금지 조항’이 있다. 제주 4.3에 대해 자유롭게 말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로 인한 처벌이나 불이익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조항이다.

해태제과에서 전국에 세운 광고물은 ‘해태동산’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제주 4.3 유적지를 알리는 팻말도 도로에서 보이면 어떨까?ⓒ이겸
해태제과에서 전국에 세운 광고물은 ‘해태동산’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제주 4.3 유적지를 알리는 팻말도 도로에서 보이면 어떨까?ⓒ이겸

 # 도령마루에 대해 알고 싶다.

도령마루는 제주시 7호 광장 일대를 일컫는다. ‘도령마루’ 보다는 70년대 초 제과회사에서 세운 해태 탑이 들어서면서 ‘해태동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더욱이 이곳이 용담지역(구체적으로는 용담2동 1805번지 일대)이라는 것도 잘 몰라 연동이니, 도두 다호마을 혹은 노형에 속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정도였다. 이 일대는 인도도 없고 건널목도 없어 일반인이 접근하기에 쉽지 않은 고립지대로 남아 있다. 제주작가회의가 4.3 제68주년을 맞아 4.3문학의 현장을 찾아가는 행사를 기획하면서 장소를 도령마루로 선정했다. 그러나 각종 자료들을 찾아보고 정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도령마루 4.3희생자들을 ‘4.3역사의 조난자’로 취급해 왔다는 비난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도령마루 4.3희생자는 모두 66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정밀한 조사가 더 필요하고 이 숫자보다는 더 많을 것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그 이유는 신고자에 따라 장소를‘도령마루’로 하기도 하지만 ‘해태동산’ ‘비행장 옆’ ‘소나무밭’ ‘서 비행장’ 등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형 14명, 연동 14명, 도남 11, 오등 5, 아라 5, 이호 4명, 이도 3, 도두 2, 용담 2, 해안 2, 어도 1, 소길 1, 외도 1, 화북 1명 등 총 36명에 이른다. 14개 마을의 주민들이 끌려와 희생되었다. 희생된 날들도 다르다. 도남과 연동주민이 희생된 날도 다르다. 시신수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남, 광령1리, 1942년 생)의 증언 “도령마루에서 죽은 사람들 옷을 누군가가 벗겨갔다. 죽은 사람 옷이고 뭐고 간에 옷을 빼앗기 위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쪽 에 우리 부친이 밭을 갈아먹고 있었는데 5명의 시신이 있었다. 우리 부친은 밭을 갈기 위해서 시신을 묻었다. 그 와중에도 서너 명은 유족들이 파 가고, 나머지 두어 명은 못 파갔을 것이다. 그런 것이 부지기수였다. 개가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까 시체를 먹어 미친개가 되었다. 개들이 광견병에 걸려서 난리였다. 옛날에는 도깨비불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 곳을 아주 무서워했다. 명주주택 자리하고, 지금 동산인 곳하고, 소나무 밭쪽이다.”

고○○(남, 도남동, 1931년 생)의 증언 “도남은 다른 마을과 달리 2연대가 태웠다. 9연대가 2연대로 바뀌면서 얼마 안 됐을 때이다. 음력으로 1948년 섣달이니 양력으로는 1949년 1월이다. 그때 마을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경찰이 차로 끌고 갔다. 초나흗날 끌고 갔는데 제사 하는 거 보면 9일에 한다. 지금은 공항으로도 가고 신제주로도 가는 도령마루에 실어다가 죽여 버렸다. 옛날엔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 날 도남 사람만 10여 명 희생됐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대부분의 유족들이 소문을 듣고 시신을 수습한 경위를 밝히고 있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 수습하거나, 여전히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정확한 희생날짜를 알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제주 4.3 문학의 힘은 무엇인가? 제주 4.3에 대한 글은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실이 바탕이기에 힘을 갖는다. 잊히지 않는다. 전해진다. ⓒ이겸
제주 4.3 문학의 힘은 무엇인가? 제주 4.3에 대한 글은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실이 바탕이기에 힘을 갖는다. 잊히지 않는다. 전해진다. ⓒ이겸
강 시인의 손은 소위 ‘글 쓰는 이의 고운 손’이 아니다. 우직하고 부드럽고 둥글다. 얼굴 에서도 심성에서도 느껴진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이겸
강 시인의 손은 소위 ‘글 쓰는 이의 고운 손’이 아니다. 우직하고 부드럽고 둥글다. 얼굴 에서도 심성에서도 느껴진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이겸

#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만행을 어떻게 자행 할 수 있었을까?

1995년 5월 1차 제주 4.3 피해 보고서가 나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당신이 4.3에 대해 처음 물어본 사람이다.” “나는 신고 안하겠다.” 다들 아픔의 표현은 달랐지만 한 결 같이 엄청난 한 이 담겨 있었다.

책임자 처벌은 반드시 해야 한다. 처벌은 법적 처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적처벌도 있고 사회적 처벌도 있다. 처벌의 대상이 죽었다 할지라도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않은 죄는 남는다. 가해자 처벌은 없었다. 진상규명은 계속되어야한다. 미군정자료와 북한자료의 여부도 조사해야 한다.

생명이 꺼져버린 피해자들이 가해자 처벌을 원할까? 나 같았으면 어땠을까? 알 수 도 없고 상상도 안 되는 질문들을 수 없이 해봤다. 지금 제주 4.3을 겪지 않은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최대한 피해 당사자의 입장으로 접근해야 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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