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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산(山)사람’으로 스러져간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
70년 전 ‘산(山)사람’으로 스러져간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8.03.26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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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주민자치연대, 4.3기행 ‘함께 걷는 항쟁의 길’ 첫 여정
숨은물뱅듸~노로오름~새별오름까지 … 곳곳에 삶의 흔적
4.3기행 참가자들이 노로오름 정상을 향해 눈밭을 헤치며 걷고 있다. ⓒ 미디어제주
4.3기행 참가자들이 노로오름 정상을 향해 눈밭을 헤치며 걷고 있다. ⓒ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현행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서 제주4.3에 대해 정의를 내린 조문의 내용이다.

4.3 정부진상보고서와 마찬가지로 법률상 제주4.3은 여전히 ‘사건’으로 규정돼 있다. 4.3의 정명(正名)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어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고자 한다. 다만 명칭을 논하기에 앞서 눈길이 가는 대목은 특별법 해당 조문에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기술돼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은 4.3을 바라보는 시선이 ‘주민들의 희생’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4.3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뜻깊은 발걸음이 시작됐다. 제주주민자치연대가 마련한 ‘함께 걷는 항쟁의 길’을 주제로 한 4.3기행. 지난 3월 25일 봄 기운이 완연한 날씨 속에 진행된 기행에는 주민자치연대 회원들을 비롯한 30여명이 함께 했다.

관덕정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 1100고지 휴게소에서 숨은물뱅듸, 터진궤, 노로오름, 산들내, 안천이앞 계곡, 함박재 농장, 삼리공동목장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사전답사 때보다 참가 인원이 많아진 데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은 상태여서 이동에 많은 시간이 걸려 애초 예정된 코스를 다 걷지는 못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당시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이 일대에서 생존을 위해 삶과 죽음의 길을 넘나들었던 이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제주도내 최대 규모의 습지 숨은물뱅듸 주변부의 모습. ⓒ 미디어제주
제주도내 최대 규모의 습지 숨은물뱅듸 주변부의 모습. ⓒ 미디어제주
숨은물뱅듸 주변 곳곳에서 발견되는 궤의 모습. ⓒ 미디어제주
숨은물뱅듸 주변 곳곳에서 발견되는 궤의 모습. ⓒ 미디어제주

그 중 도내 최대 규모의 습지인 숨은물뱅듸는 인근 해안 마을에서 온 피난민들의 집결지였다. 이 곳에서는 습지에 분포하는 습지식물 덕분에 두꺼운 토탄층과 이탄층이 생성됐다. 20~30㎝ 깊이로 이 토양층을 파내면 피난민들이 불을 때거나 은신처를 만드는 데 훌륭한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곳곳에 피난처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궤가 발견되기도 했다.

장악(獐岳)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지는 노로오름은 도내 360여개의 오름 중 가장 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그 넓이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일본군이 패망 직전 오름 능선을 따라 곳곳에 조성해놓은 작은노로오름 일대의 진지동굴은 4.3 당시 무장대가 인쇄소와 물자 저장소 등으로 활용했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또 노로오름 분화구 주변에는 대규모 토벌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마을을 떠난 피난민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큰노로오름 8부 능선을 둘러싸면서 설치된 감시초소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노로오름에서 흘러내린 산물내를 따라 산으로 오르던 유격전 전담 부대 중 1개 중대 병력이 매복해 있던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토벌대 36명이 사살된 ‘산물내 전투’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도 전해지고 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새별오름에 봉화가 오르고 도내 전역에서 350여명의 무장 자위대가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4.3 봉기 후 4월 15일 열린 남로당 제주도당부 회의에서는 기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한 ‘인민유격대’로 재편된다.

이 회의에서 1연대(3.1지대, 지휘관 이덕구, 천‧제주‧구좌면), 2연대(2.7지대, 지휘관 김봉천, 애월‧한림‧대정‧안덕‧중문면), 3연대(4.3지대, 지휘관 미상, 서귀‧남원‧표선‧성산면)와 다시 이를 소대로 구분하는 부대 재편이 이뤄졌고, 애월‧한림 지역의 2.7지대는 다시 산물내 물길을 타고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노로오름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날 4.3기행의 해설을 맡은 김국상씨는 “지금 ‘무사안녕’이라는 타버린 글씨가 있는 자리가 70년 전에는 ‘제폭구민 통일조국’이라는 글씨가 불타오르고 있던 자리”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당시 무장대원들의 가슴 속에는 그만큼 ‘통일조국’을 향한 염원이 컸을 것이라는 뜻이다.

제주주민자치연대는 지난해 9월부터 무장대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답사를 이어가고 있다. 배기철 제주주민자치연대 고문은 이번 기행에 대해 “4.3을 더 이상 ‘희생’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민중들의 삶을 대변하고자 했던 모습,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조국을 염원했던 무장대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25일 4.3 기행 참가자들이 노로오름 정상에서 눈덮인 한라산 정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25일 4.3 기행 참가자들이 노로오름 정상에서 눈덮인 한라산 정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왼쪽 노꼬메오름 뒤로 길게 펼쳐진 노로오름의 모습이 보인다.  ⓒ 미디어제주
왼쪽 노꼬메오름 뒤로 길게 펼쳐진 노로오름의 모습이 보인다. ⓒ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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