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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 “제주4.3, 수많은 희생자들의 순교적 행렬의 연장”
강우일 주교 “제주4.3, 수많은 희생자들의 순교적 행렬의 연장”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8.02.22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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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기조강연 통해 4.3의 통합적 의미 강조
“한국 현대사의 일시적인 비극으로 시시비비 논하는 것만으로는 안돼”
22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열린 제주 4.3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강우일 주교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 한겨레 허호준 기자
22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열린 제주 4.3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강우일 주교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 한겨레 허호준 기자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4.3은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해방,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악과 불의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도도한 역사의 에너지가 힘차게 분출되는 가운데, 이러한 역사적 동력을 멈추고 저지하려는 부정적인 반작용으로 인해 그토록 많은 국민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제주4.3에 감춰진 인간의 존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강우일 주교는 22일 오후 2시부터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 현대사에서의 의미’라는 주제로 열린 제주 4.3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제주 4.3에 대해 “조선 왕조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냉전시대까지 흐르는 고귀한 역사의 물줄기의 연장이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수많은 희생자들의 순교적 행렬의 연장”이라고 설명했다.

수많은 무명의 희생자들이 비록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무의미한 것 같았던 고통과 죽음 안에서 이 세상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간 생명의 가치를 빛내는 순교적 여정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 주교는 “반세기 이상 어둠에 묻히고 침묵 속에 매장된 억울한 희생을 통해 자신들 안에 감춰졌던 하느님을 닮은 존엄과 영광을 이제 70주년을 맞이해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면서 “4.3의 영령들은 이 땅의 인간해방을 위해 자신들을 아낌없이 봉헌한 하늘나라의 역군들”이라고 선언했다.

# “이제는 더 깊은 내면적 가치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단계로 가야”

이에 앞서 그는 “70주년을 맞이한 제주 4.3을 성찰하면서 4.3을 단순히 한국 현대사의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비극으로 보고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고 사회적 책임 규명을 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제는 4.3 안에서 오랜 민족의 삶의 궤적 속에 숨겨진 더 깊은 내면적 가치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4.3을 야기한 제주 지역사회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우선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1945년부터 1947년 사이에 일본에서 제주도로 귀향한 교민이 7만명에 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본에서 귀향한 도민들 중에는 이미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 토지를 잃거나 생활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본 노동시장으로 집단적으로 이주,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

저임금으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노동현장의 비인간적인 처우와 불공정에 문제점을 느끼게 됐고,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사회주의 이론도 접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인으로서 일상생활 안에서 더 자주 일본 사회의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조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일본 제국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과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열망을 키워나갔고,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제주 출신 교민들이 한반도에서 계속 살았던 이들보다 훨씬 더 강한 민족의식과 조국의 국권 회복에 큰 소망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귀국 후 이들은 제주 지역사회의 여론 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강 주교는 이어 “하지만 새로운 조국 건설에 대한 부푼 희망을 안고 일본에서 귀향한 제주출신 교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미 군정의 정책 부재와 실책으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 뿐이었다”면서 단기간 인구 유입에 따른 인구 팽창과 전국적인 대흉년이 제주 지역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재앙이었으며, 일본 자본의 철수로 인한 제조업체 가동 중단과 해방 직후 갑작스러운 대외교역 중단,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 등으로 제주 지역 경제상황이 빈사 상태에 들어가면서 도민들을 심리적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특히 그는 “귀향 교민들과 도민들에게 또 한 가지 참을 수 없는 모순적 현실은 미군정이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관헌으로 동포들을 압박하고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조선인 경찰들을 미군정의 경찰력과 행정요원으로 다시 등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라며 시민들의 미군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과 불만을 초래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같은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폭발했고, 당시 경찰의 발포로 인한 충돌과 이에 대한 항의로 도민 전체가 한데 뭉쳐 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이 시작돼 이후 미군정의 강경대응이 사태를 극도로 악화시켜 1948년 4월 3일 좌익 무장대의 경찰지서 습격 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이 제주도를 친공산주의 지역으로 단정, 군대를 동원한 토벌로 방향을 바꿔 무차별 검거와 학살로 이어지면서 민간인 희생자 수가 급증하게 된 것이라고 4.3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아울러 그는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세력의 목표는 남한 단독선거의 반대와 저지였다”면서 “무장봉기는 몇 백명 수준의 혈기왕성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들이 결행한 사건이었지만 그 배경과 과정에는 도민 전체, 한국인 전체가 기다리고 염원했던 민족의 독립과 해방, 사회 구조악과 불의에 대한 저항, 인간의 기본적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향한 장구한 역사의 동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 현대사에서의 의미’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22일 오후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열렸다. ⓒ 한겨레 허호준 기자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 현대사에서의 의미’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22일 오후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열렸다. ⓒ 한겨레 허호준 기자

이날 심포지엄은 강 주교의 기조강연에 이어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제주4.3 모델’의 전국화, 세계화, 보편화 - ‘세계보편 모델’을 향한 시론’ 주제발표와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의인은 없으니, 한 사람도 없으며 – 4.3을 생각함’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 제주교구가 4.3 70주년을 맞아 함께 마련한 이날 심포지엄에는 500여명이 참여하면서 대성황을 이뤄 70주년을 맞는 재주4.3의 의미를 알리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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