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이 없기에 왜군에 맞서서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성곽이 없기에 왜군에 맞서서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10.0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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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9> 9진 체제의 완성

그동안 전쟁 이야기를 해왔다.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군사체제는 어떻게 변해왔고, 무기는 어떤 게 있었는지 검토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쓴 조총이 나중에는 조선의 주요한 무기로 대체된 것도 들여다봤다.

 

그렇다면 전쟁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수단은 뭐였을까. 한마디로 종합을 하자면 성(城)으로 표현을 할 수 있다. 방어유적으로서의 성(城)은 외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적의 혹은 최후의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을 쌓는 목적이 외침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성의 기능이, 산성의 기능이, 읍성의 기능이 다르듯 각각의 성곽은 차이점을 드러낸다.

 

성(城)은 우리말로 ‘잣’이라고 표현되며, 한자로는 책(柵), 곽(郭), 보(堡) 등으로 표현돼 왔다. 조선시대 인물인 양성지는 “우리 동방은 성곽의 나라이다”고 표현하며, 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세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양성지는 고려 때 거란과 몽골의 피해를 입은 근본 원인을 성곽에서 찾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토목공사를 들라면 성곽의 건축이었다. 한국인이 만들어온 대부분의 토목공사를 성곽이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의 건축은 여러 이민족으로부터 민족을 지켜온 보루였고, 당시 최고의 기술이 투입된 복합적 축적물이기도 했다.

 

제주 역시 수많은 성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흔적을 지니고 있다. 제주에 있는 대부분의 시설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게 상당수다. 곧 제주의 성은 방어유적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앞으로 몇 차례는 성곽을 비롯한 방어유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주도의 방어유적은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읍성과 9곳의 진성, 봉수 및 연대, 환해장성 등이 있다. 먼저 진성을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왜구가 삽읍에 침입한 기록은 40회를 넘는다. 조선 건국초기인 15세기가 16회로 매우 잦다. 왜구는 한라산을 항해의 이정표로 삼고 동중국 해상을 왕래하면서 제주를 자주 침범했다.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기도 했다.

 

잦은 외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방어체계가 필요했다. 제주의 방어체제 마련은 고려말부터 논의됐고, 태종 16년(1416)에 제주가 3읍으로 분리된 이후 효율적인 방어체제가 구축된다. 경계감시 임무를 맡는 방호소가 들어서고, 포구에 배를 대고 전투에 대비하는 수전소도 만들어진다. 곁들여서 봉수도 정비되기에 이른다.

 

세종 21년(1439) 제주에 안무사로 내려온 한승순은 제주도내의 방어조건을 자세하게 조정에 보고하고, 이후 방어시설이 대대적으로 보수됐다고 한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구축된 화북진성을 담아낸 ‘화북성조’. ©미디어제주

 

“늙은이에게 물어보니 정의현 동쪽 우봉(牛峯)과 대정현 서쪽 죽도(竹島)는 왜선이 숨어 정박한다고 합니다. 우도(牛島) 인근에 있는 수산(水山)과 죽도의 인근에 있는 서귀(西歸) 방호소에는 모두 성곽이 없습니다. 만일 왜적이 밤을 타고 돌입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대응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을 쌓게 하고 적과 대응하게 하십시오.”<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윤2월 4일 임오>

 

특히 중종 5년(1510)에 발생한 삼포왜란이후 성의 축조는 확대된다. 당시 제주목사인 장림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방호소는 성곽은 없고, 인력만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수산과 차귀 두 포구는 옛성 그대로 수축하고 깊은 구덩이와 가로 막는 말뚝을 설치했습니다. 그밖의 포구 7곳은 본래 성어 지키기에 미덥지 않습니다.”<중종실록 12권, 중종 5년 9월 16일>

 

시대는 다르지만 한승순의 보고나 장림의 보고는 성 수축이 절실하다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중종 이후에는 방호소나 수전소의 개념보다 업그레이드 된 진성 구축이 현실화된다. 앞서 장림이 조정에 보고했을 때 성의 형태를 갖춘 곳은 수산진과 차귀진 2곳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곽이 없던 방호소 가운데 별방·서귀·명월·동해진성이 축조되고, 이 무렵 애월 및 조천진성도 개축된다고 전한다.

 

진성은 필요에 따라 하나 둘 늘어갔다. 제주도에는 모두 9개의 진성이 있었다. 이같은 9진 체제가 완전하게 구축되는 건 1678년(숙종 4) 최관 목사에 의해 화북진성이 축성되면서다. 화북진성은 그 전에는 수전소였다. 수전소는 방어 기능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종 10년(1555) 왜구 침입으로 화북의 수전소는 격파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려 100년이 넘어서야 화북에 진성이 만들어졌다. 9진의 마지막인 화북진은 그렇게 해서 완성된다. 이로써 제주도는 애월진, 명월진, 차귀진, 모슬진, 서귀진, 수산진, 별방진, 조천진, 화북진 등 9진의 체제를 갖추게 됐다.

 

<탐라순력도>는 9진 체제가 구축된지 20여년 지난 시점이어서인지 관련된 정보가 잘 나타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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