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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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기확
  • 승인 2017.06.19 10: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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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138>

올 봄에는 별 일이 다 있었다. 비록 세상은 요동쳤지만 나는 고요했다. 고요 속에서 일상을 유지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랜 기간 암으로 투병중이셨다. 말기에야 발견된 터라 항상 오늘 내일 하셨던 분이다.

 

어릴 적. 친구의 아버지는 동네 어디에나 계셨다.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어귀, 시장 등 이리저리 돌아다니셨다.

 

어른이 되었다. 친구 아버지는 술이며, 돌이며, 항아리며 뭔가를 모으는 취미가 있으셨다. 술병 몇 개를 까서 친구와 먹은 걸 고백한다. 대신 보리차와 결명자가 들어갔으니 전시용으로는 손색이 없다.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오는 건, 유년시절의 추억 한 무더기가 사라져서다. 그나마 기억을 붙들어도 점차 사라지는데, 이제는 추억을 상기할 대상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눈물에는 우연이 없다.

 

좋은 날. 겨울은 끝났다. 봄은 기척 없이 왔다. 집안의 창문들을 활짝 열고 환기(換氣)를 시켰다. 오랜만의 굳은 공기들은 밖으로 나간다고 신이 났다. 신선한 공기들은 새 집에 둥지를 튼다고 덩달아 신났다. 투덜대는 것은 먼지뿐. 정든 집을 떠난다며 푸념이다. 이렇게 환기는 계절의 변화를 집 안팎에 공표하는 적절한 의식이다.

 

그럭저럭 커버린 아이는 직설적으로 부모가 방해가 된다고 한다. 친구들 한 무더기가 집에 놀러오자 아내와 나는 이 때다 하고 부부만의 봄나들이를 떠났다. 유채꽃 축제장을 향했다. 아내는 운전 중에 얘기한다.

 

“꽃이 피는 봄이 되면 여자들은 들뜨는가봐. 막 어딘가로 놀러가고 싶어. 남자들도 그런가?”

 

전날 술집 세 군데에 갇혀 소주를 흡입한 나. 길가의 유채와 벚꽃의 흐드러짐이 흐릿하다. 그럼에도 제주의 풍경은 멈추면 풍경화요, 움직이면 다큐멘터리다. 차 안의 노래는 배경음악으로 감칠맛을 돋운다. 아내의 질문에 멋진 말로 대꾸하고 싶었는데, 술기운인지 배경에 산만해서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당연히 나도 놀러가고 싶지. 꽃이 피는 봄이잖아. 시기가 있는 거지. 이때 아니면 꽃을 보기 힘드니까.”

 

아내는 주절주절 잘도 떠든다.

 

“요즘 애정결핍이었는데 나오니까 좋네. 제주도는 드라이브하기 정말 좋아.”

 

답변이 궁색한지라 차창을 열었다. 무거운 공기는 세상 멀리 떠나간다. 숙취로 인해 바람소리가 바이올린 소리처럼 들렸다. 운이 좋았다. 바람소리가 크게 들린다. 음악 볼륨을 높인다.

 

환기(換氣)에 계절이 들어가면 환절기(換節期)다. 3년 만의 감기는 몇 주째 떨어지지 않고 있다. 태어나서 152번째 맞는 이번 환절기는 유별나다. 지독한 감기처럼 잊지 않게 만든다.

 

추억(追憶)은 기억을 쫓아가는 것이다. 기억(記憶)은 추억을 잊지 않도록 유지하고 회상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든다. 환기를 시킬 때처럼 쑤욱 빠져나간다.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는 새로운 계절로 인해 더욱더 이전의 지나간 계절들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바꾸는 게 힘들면 벌을 받는다. 감기에 걸린다.

 

올 봄에는 별 일이 다 있었다. 비록 세상은 요동쳤지만 나는 고요했다. 고요 속에서 일상을 유지했다.

 

다만 감기에 걸렸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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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4 11:51:11
기다렸던 글 오랫만에 올려주셔서 따뜻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