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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거짓말이었어야 할 死·삶의 증언
차라리 거짓말이었어야 할 死·삶의 증언
  • 조보영 기자
  • 승인 2016.04.01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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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영의 제주보기錄] <2> ‘열다섯 번째 4.3증언 본풀이 마당’을 다녀와서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다수의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은 2014년에 '4.3희생자 국가추념일'로 지정됐으나 현재까지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있다.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도 우리는 ‘왜곡’ 또는 ‘부정’의 방패막을 세운다.

'제주4.3'은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역사다. 국가 폭력에 의해 짓밝힌 희생자 수만 2만 여명. 남아있는 가족들조차 집단 학살의 후유증과 이념의 굴레 속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여야했던 현대사 최대의 비극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대로 된 진상 규명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3월 30일 오후 3시 제주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4.3 증언 열다섯 번째 본풀이 마당'에서는 ‘북촌리 주민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세 할머니들의 생생한 死·삶의 증언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만우절이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어야 할'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68년 전, 죽음 앞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직접 밝히는 그날의 '기억'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기록'이다.

지난 3월 30일 오후 3시 제주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4.3 증언 열다섯 번째 본풀이 마당'에서 ‘북촌리 주민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고완순 할머니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死‧삶을 말하다”

-증언 1. 총살 직전 “사격 중지” 명령으로 목숨 건진 고완순 할머니(77세, 조천 북촌)

“옴팡밭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죽어있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간 것 같아요. 피도 흥건하고 땅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철거덕 철거덕 총 소리를 듣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아요. ‘마지막이구나’하는 체념의 순간, 뒤에서 ”사격 중지!“하는 군인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1949년 1월 17일. 당시 11살이었던 고완순 할머니는 할아버지 형제, 이모, 외삼촌을 잃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군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은 동생은 2년 뒤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난히 똘똘하고 호기심 많던 11살 소녀는 그날 이후 가족도 잃고 꿈도 잃었다.

-증언 2. “부모님 호적으로 들어가 유족이 되고 싶어요” 윤옥화 할머니(73세, 조천 북촌)

“아버지는 따로 떨어져서 돌아가셨고 나도 어깨에 총을 맞았는데 동네분이 와서 총알을 빼줬습니다. 3대 독자인 오빠는 어머니가 총에 맞으면서 품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머니와 큰언니는 현장에서 돌아가셨고 3살짜리 여동생은 일곱 군데를 총에 맞고도 3개월을 버티다 죽었습니다.”

당시 7살이었던 윤옥화 할머니. 배 타는 일을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로 살다가 사망했고 큰 아버지 호적에 올렸다는 이유로 윤 할머니는 4.3 유족에서 제외됐다.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은 이제라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딸이 되어 당당히 눈을 감는 것이다.

-증언 3. 오른쪽 심장에 총 맞고 살아난 장윤수 할머니(87세, 조천 북촌)후유장애 ‘불인정’

“밭에 갔다 오니까 사람들이 막 뛰고 있어요. 내가 릴레이를 잘 했어요. 이유도 모르고 사람들을 좇아 뛰다가 내가 먼저 앞서서 뛰게 된 모양이에요. 그러다 총에 맞았어요. 나만 아니고 몇 사람이 같이 맞았는데 나만큼 크게 맞은 사람은 없었어요. 깨어보니 병원이었습니다.”

1947년 8월 13일 오전 11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세 명이 총상을 당한 사건. 여러 중앙지 기사로도 기록이 남아있다. 총알이 오른쪽 가슴을 뚫고 간 장윤수 할머니는 그중 유일한 생존자다. 장 할머니는 후유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총알이 뚫고 지나간 상처 자국의 통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악화되고 있다.

제주 4.3 연구소 주최, ‘열다섯 번째 4.3증언 본풀이 마당’ 증언에 나선 (왼쪽부터) 고완순 할머니, 장윤수 할머니, 윤옥화 할머니

마냥 아름다울 수 없는 제주 섬, 이 땅 곳곳에 서려있는 4.3의 흔적

에메랄드 빛 푸른 바다와 검은 현무암이 어우러지는 환상의 해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오름 자락의 평온, 형형색색의 아름드리 꽃과 나무들… 이 풍경에 빠져 제주에 정착을 했고 4.3을 알았다. 동시에 제주가 마냥 아름다운 섬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제주는 곳곳이 아픔이다. 한 달 100만 명의 관광객이 드나드는 제주국제공항(옛 정뜨르비행장)은 사형수 및 예비검속자들 800여명이 암매장된 4.3 최대 학살터다.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해가 공항 활주로 어딘가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다랑쉬 오름 주변에는 4.3 당시 주민 11명이 숨어 있다가 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다랑쉬 굴’이 있으며,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는 함덕 서우봉 해변 역시 총살이 집행된 제주 동부의 대표적인 4.3유적지다.

그 뿐인가. 이주민들의 밀집 지역인 신제주 노형마을 역시 약500여명이 넘는 주민이 학살, 자연부락 중 최대의 피해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잃어버린 마을’이다. 제주 전역에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송이채 툭툭 떨어지는 4월의 붉은 동백은 총부리에 스러져간 4.3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꽃이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 마을에 위치한 북촌 초등학교. '제주 4.3' 당시 1949년 1월 17일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북촌리 주민 약500여명이 이곳 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제주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는 하늘과 땅, 바다가 선사하는 자연의 위로를 즐기는 특권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모든 역사적 진실을 기꺼이 마주하겠다는 암묵적 동의와 같다.

제주 4.3은 이미 ‘평화와 상생’의 가치로 승화 중이다. 위대한 시도이며 지향해야 할 방향임은 틀림 없다. 하지만 이제서야 그들의 아픔을 알아버린 나는, 아직 멈추지 않은 생존자의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나마 그 슬픔 안에 머물고 싶은 맘이다.

<조보영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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