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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신입생 43명의 중학교 도전기…‘황혼에 꿈을 꾸다’
늦깎이 신입생 43명의 중학교 도전기…‘황혼에 꿈을 꾸다’
  • 조보영 기자
  • 승인 2016.03.12 2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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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제주제일중학교부설 방송통신중학교' 개교, 제1회 입학식 열려
평균연령 66.3세, 2.85:1 경쟁률…"만학의 꿈 이룰 수 있어서 행복해"
제주제일중학교에는 특별한 교실이 있다. 본관 2층에 있는 2학년 5반 교실은 매주 둘째주와 넷째주 토요일, 방통중 1학년 1반 교실로 뒤바뀐다. 열다섯 살 아이들과 평균연령 66.3세의 늦깍이 입학생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어엿한 중학생'으로 교실 수업을 받게 됐다.

밭에서 일하느라, 동생들 챙기느라, 자식들 키우느라…“이제 시작입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 사회복지사의 꿈을 이루고 싶어요.
9남매 중 6째로 태어난 김삼순 할머니(67세). 세 아들을 키우며 억척같이 살아오는 동안 잘못된 빚보증으로 1억 가까운 빚을 졌다. 식당일을 하면서 빚은 다 갚았지만 이 모든게 배우지 못한 탓 같았다. 교육행정직에 있는 아들의 권유로 방통중에 입학했고, 자식들에게 가방과 노트, 필기도구도 선물 받았다. 이 땅에 태어난 것에 처음 보람을 느꼈다. 75세를 목표로 ‘사회복지사’의 꿈을 이루고 싶다.

#손녀딸도 중학교 1학년, 저도 중학교 1학년이에요.
장혜정 할머니(63세)는 올해 중학교 1학년인 손녀딸과 동학년이 됐다. 어릴 적 홀로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남의 집 밭일을 하며 살았다. 학교는 1년에 절반만 나갔다. 지인에게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둘러댄 적도 있다. 그때가 제일 서러웠다. 손주들의 교과서로 공부를 했었는데 이제 당당하게 내 책으로 공부하면 된다. 손녀는 할머니 수학이 제일 걱정이다. 우리도 어려운데 할머니는 오죽할까. 모르는 건 같이 공부할 거다.

#어머니께 ‘왜 날 낳으셨냐’고 불평도 했어요.
4·3당시 어머니가 재가해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난 박수자(64세) 할머니는 남동생이 4명이다.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께 ‘왜 날 낳으셨냐’고 불평도 했다. 동네 분의 도움으로 제주보육원에서 첫 배움의 기회를 가졌다. 농사도 짓고 남의 집살이를 하느라 중학교는 못갔다. 딸과 며느리의 적극적인 권유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방통중에 입학을 하게 됐다. 정말 기쁘다.

제주제일중학교부설 방송통신중학교 제1회 신입생 43명. 12일 오전 학교 체육관에서 진행된 입학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정규공립중학교 방송통신중학교 “매달 둘째주 넷째주는 방통중 수업 간다고 전해라~”

“100세 인생이라고 하는데, 이 자리에 오신 가족분들. 앞으로 잔칫날 못가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환영한다는 말만 건네고 축하는 3년 뒤 졸업식 때 하겠습니다. 1회라는 자부심으로 초심을 잃지 마시고 좋은 전통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석문 교육감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문성수 제주제일중학교부설방송통신중학교(제주 방통중)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끝나자 장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12일 오전 10시 제주 방통중 입학식이 열린 학교 체육관에는 입학생 43명과 가족들,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김재춘 한국교육개발원장 및 제주도 의원과 교육 관계자가 총출동했다.

2013년 광주에서 첫 개교한 이래 올해 제주와 부산, 인천, 울산, 경기, 전남, 순천 지역 등 8곳이 추가로 신설되면서 전국 방통중은 총20개교가 운영되고 있다.

이석문 제주도교육감과 김재춘 한국교육개발원장 및 제주도 의원, 교육 관계자들이 입학식에 참여해 신입생들의 아름다운 도전을 축하했다.

방통중은 중학교 학력을 취득하지 못한 교육소외계층에게 학력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정규공립중학교다. 입학금과 수업료는 전액 무료. 매월 둘째주와 넷째주 토요일, 한 달에 두 번 출석 수업과 평일 온라인 수업으로 교육이 진행된다.

제주도는 올해 40명 정원에 114명이 지원, 평균 경쟁률 2.85:1을 기록했다. 76세 김정자 할머니가 그중 최고령자다. 정원 외 합격자 3명을 포함, 최종 합격자 수는 43명이며 총2개 반으로 운영된다.

이날 신입생들을 축하하러 온 제주제일중학교 학생회 간부 김동욱(3학년 1반) 군은 “입학 소감을 말씀하시며 눈물을 보이신 할머니를 보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솔직히 저희는 공부가 지겹기도 한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이 자리까지 오셨잖아요. 부끄럽더라고요”라고 전했다.

1학년 1반 담임을 맡은 송은경 교사가 늦깎이 제자들에게 1년 동안의 학사일정을 안내하고 있다.

“이게 다 뭐냐? 장난이 아니다, 진짜. 이걸 언제 다 공부해? 난리네. 난리…”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 책상에 앉은 신입생들이 여기저기서 실소를 터뜨렸다. 조금 전 ‘뒤늦은 만학의 꿈’을 떠올리며 눈물을 찍어댔던 굳센 각오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교과서와 참고서의 무게만큼이나 한숨도 깊어졌다. 그때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린다. 담임선생님 입장이시다.

“1학년 1반 담임 송은경입니다. 영광이네요. 저도 가슴이 설렙니다.” 첫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기습 질문이 들어온다. “선생님, 이제 머리 아파서 어떡해요? 노친네들 때문에?” 앞으로 잘 봐달라는 늦깎이 신입생의 농익은 인사다. 베테랑 교사답게 ‘걱정반근심반’인 학생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학교만 잘 나오시면 됩니다. 0점 받아도 졸업할 수 있어요. 걱정 붙들어 매시고 건강만 잘 챙기세요. 컴퓨터로 진행하는 원격 수업도 있으니 인터넷 클릭 방법만 잘 익히시면 됩니다. 일단 첫날이니까 출석 부를게요. 1번 강남원, 2번 강명순. 3번 강순애. 4번 강여옥…”

'크게' 대답도 하고 '번쩍' 손도 들고 '벌떡' 일어서서 인사도 나누고. 고이 접어 간직해 온 황혼의 꿈들이 이제야 제 빛을 내고 있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부의 이름을 호명하자 차례로 손을 들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신입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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