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늘 붙어다니는 존재입니다. 생명이 무한하다면 죽음이라는 단어는 굳이 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생명엔 늘 끝이 있기 때문일테죠. 그래서 삶과 죽음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맺음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하루 1200여명이 태어나고, 700여명 가량이 세상과의 이별을 고한다고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이들도 많지만 요즘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노년층의 자연사가 더욱 늘고 있어요.
죽음. 과연 그 죽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답은 무조건 아니죠.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더라도 죽음을 막을 순 없답니다. 좀 더 연장은 할 수 있겠지만요. 그래봐야 무슨 소용일까요. 꾸역꾸역 사는 인생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 생명이 연장되면서 괴롭게 생을 보내는 어르신들이 더 늘어난다고 합니다. 사회보장이 확실하게 되지 않는 이상 생명연장은 ‘즐거운 꿈’이 아닌, ‘괴로운 현실’이 될 뿐입니다.
어쨌든 사람은 언젠가는 세상을 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즐거운 일만은 아닌 듯 하네요. 내년이면 제 나이도 쉰둘인데, 그러다보면 60에서 가속도가 붙어서 70, 80도 곧 찾아올 것만 같아요.
제 개인에겐 그래도 그 수치는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은 80이라는 숫자를 이미 넘어셨습니다. 대체 제 부모님은 어떤 마음일까요. 수치가 바뀌는 것에 대한 불안은 없을지 궁금합니다. 부모들이야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만 그걸 정말로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니까요.
유은실의 <마지막 이벤트>는 젊은 시절, 아니 나이가 들어서도 말썽만 피우다가 세상을 뜬 할아버지의 얘기를 담고 있어요. 물론 주인공은 할아버지의 손자인 영욱입니다. 영욱이는 다들 싫어하는 할아버지를 유독 좋아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영욱이는 할아버지랑 늘 함께 잠을 자요. 아빠·엄마·고모들은 할어버지의 행동 뿐아니라 모습 자체도 싫어하는데 말이지요. 특히 할아버지의 얼굴에 핀 검버섯은 다들 더더욱 싫어합니다. 영욱이만 빼고요. 영욱이는 오히려 할아버지의 얼굴을 장식한 검버섯을 매만지며 잠을 청하곤 합니다. “엄마 젖을 만지고 자는 애는 있어도, 할아버지 검버섯을 만지고 자는 애는 처음 본다”고 다들 그럴 정도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영욱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건 할아버지 뿐이니까요.
그러던 할아버지가 운명을 달리합니다. 할아버지는 “죽을 때가 된 것 같다”며 영욱이에게 아빠·엄마·고모를 불러달라고 하지만 모두들 거짓으로 여깁니다. 앞서 5차례나 “죽을 것 같다”면서 다들 불러모았거든요. 마치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닮았어요. 결국 늦게야 아빠·엄마가 할아버지를 발견했으나 그 땐 이미 늦고 맙니다. 할아버지가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받은 건 왜일까요. 아빠의 역할도, 남편의 역할도 제대로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해요.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영욱이에게 ‘마지막 이벤트’를 하겠다고 합니다. 영욱이에게만큼은 이벤트를 잘 해준 할아버지이기에 영욱이는 내심 기대를 하지만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욱이가 과연 ‘마지막 이벤트’의 뜻을 알기나 하겠어요. 책에서는 ‘남자 수의’가 아닌, ‘여자 수의’를 입고 떠나게 해달라는 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이벤트로 표현됩니다.
할아버지의 유서엔 이렇게 써 있거든요.
“지난 세월 돌이켜보면 부끄러움과 후회뿐이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꼭 여자로 태어나서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나의 영혼은 여자로 거듭나리라.”
<마지막 이벤트>는 제 둘째딸을 울린 작품입니다. 그 책을 읽으며 펑펑 울던 찬이가 떠오릅니다. 아니, 어른도 감정을 몰입해 <마지막 이벤트>를 읽다보면 울컥해지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솔직히 저는 찬이만큼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어요.
찬이가 북받쳐서 엉엉 운 이유는 있습니다. <마지막 이벤트>의 영욱처럼 찬이도 할아버지랑 함께 잔 기억들이 숱하거든요.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이어서 할아버지와는 자지 않지만 4학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곧잘 할아버지 품에서 잠든 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랑 잘 때는 발을 할아버지 배에 떡하니 올려놓곤 했어요.
<마지막 이벤트>는 여자 수의라는 이벤트를 통해 죽음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들지만 사실 그게 잘 받아들여지진 않네요. 영욱이의 행동이 찬이를 많이 닮아서인지, ‘만일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그런 생각만 떠오르네요.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이벤트>의 영욱이처럼 찬이도 슬퍼할테니 말이죠. 찬이를 위해서라도, 찬이 할아버지가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이 글에 담아봅니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