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7 09:10 (토)
순대국밥의 이름으로
순대국밥의 이름으로
  • 홍기확
  • 승인 2015.09.09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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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00>

# 1. 양단수(兩單手)

『혼자라는 건』, 최영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바둑에서 단수(單手)는 상대의 돌을 잡는, 즉 죽이는 수를 말한다. 단수로 공격을 당한 상대방은 빠져나갈 곳이 있다면 탈출해야 한다. 장기로 치면 단수는 장군, 빠져나감은 멍군이라 하겠다.
 여기에 더해 양단수(兩單手)도 있다. 한 수로 인해 상대의 돌 두 개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수다. 상대방은 한 곳은 버리고 한 곳을 살려야 한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은 금물. 바둑의 격언인 위기십결(圍碁十訣)의 다섯 번째인 사소취대(捨小取大), 즉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해야 할 때다.

 가끔은 인생에서 양단수를 맞을 때가 많다.

 빠져나갈 곳이 없으면, 외로이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이 제격이다.


# 2. 덕과 재주

 ‘非人不傳 不才勝德(비인부전 부재승덕)’

 인간이 안 된 놈들에게 벼슬과 재물, 기술과 권력을 물려주지 말 것이며, 재주와 지식이 덕을 이기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의 성어(成語)지만 정치인들이 비리를 저질렀을 때, 군장교들의 정신교육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얘기다.
 조훈현 국수의 자서전, 『고수의 생각법』에도 이 구절이 나온다. 조훈현 국수의 바둑 스승은 천재 제자에게 재주가 아닌 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조훈현은 재덕(才德)의 조화를 이루어 국수(國手)가 되었다.

 가끔은 인생에서 내 것이 아닌 걸 소유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가끔은 인생에서 지금은 감당하기 힘든 데 하고 느낄 때가 많다.

 덕보다 재주가 앞설 때, 순대국밥에 소주 한잔을 통해 멈춘다.


# 3. 제자리 걸음

『지하철에서 1』, 최영미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조훈현의 역사적인 대국, 1989년 제 1회 응창기배(應昌期杯) 마지막 대국을 모태로 한 2014년 드라마 『미생』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개봉한 바둑 영화, 『신의 한 수』도 총관객수 350만 명을 넘으며 낯선 장르로는 중박 이상으로 선전했다.

 내 바둑실력은 이제 4급에서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최근 10년간 10여판을 둬 보았는데 이기고 지고를 반복한다.
 신기한 일이다. 분명 훈련과 실전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줄어야 하는데…. 어쩌면 나는 세월과 함께 바둑 실력이 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끔은 인생에서 분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멈춰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이런 느낌에는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이 제격이다. 싸구려 순대국밥이면 더욱 좋다.


# 4. 규칙과 변칙

『환절기』, 박준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바둑의 규칙은 간단하다. 집을 크게 짓거나 상대의 돌을 많이 따먹으면 그 뿐이다. 바둑돌은 한 수 한 수의 쓰임도 정해져 있지 않다. 모두 동등한 돌 하나다. 각 말들마다 역할이 정해져 있고, 운행의 방법이 규정된 장기나 체스와는 다르다.

 인생의 규칙은 바둑과 달리 복잡하다. 바둑의 돌처럼 각자가 동등하지 않다. 
 집을 크게 짓기 위해서는 아버지, 할아버지를 잘 만나야 하거나, 본인이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돈을 빼앗기 위해서는 타고난 돈이 많거나, 머리가 좋거나, 본인이 죽도록 힘써야 한다.
 사람마다 역할이 정해져 있진 않지만, 출발점은 모두 다르다. 출발점이 저 뒤에 있는 사람은 죽도록 뛰어야 한다.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 한다.

 가끔은 인생이 바둑처럼 단순한 규칙만 있고, 모두 같은 출발점을 가졌으면 하는 때가 많다.

 이런 시기에는 싸구려 순대국밥 곱빼기가 제격이다. 부른 배를 두드린다.


# 5. 그래도 괜찮아

 벤자민 프랭클린의 명언.

 ‘인생의 비극은 우리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현명해 진다는 것이다.’

 순진한 편이라 사람들에게 자주 양단수(兩單手)를 맞는다.
 재주는 많으나, 모조리 잔재주다.
 생활력은 느는 것 같지 않고 인생내공도 정체기다.
 달리기로 치자면 나는 거북이요, 상대방은 토끼다.

 그래도 괜찮다.

 순대국밥의 조리법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다만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맛있게 먹는 방법은 알고 있다.
 바둑을 잘 두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 모른다. 다만 그 때 그 때 이기고 지며 맛있게 두는 방법은 알고 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다만 그 때 그 때의 순간에 맞추어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알고 있다.
 

# 6. 그래서 괜찮아

 『Wartime writings, 1939-1944』, 생떽쥐베리

 ‘One is animated by a smile(사람은 미소에 의해 활기를 얻는다)’

 그래서 괜찮다.

 순대국밥을 두 번째 먹었다고 해서 처음보다 잘 먹는 것은 아니다.
 바둑을 두 번째 두었다고 해서 처음보다 잘 두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두 번째 살았다고 해서 처음보다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우연한 미소가 순대국밥과 어우러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두 편의 시를 적으며 글을 마친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산중문답(山中問答)』, 이백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물어봐도
대답 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아꽃 흐르는 물 따라 묘연히 떠나가니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있다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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