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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협,『 2015 제3회 의녀 홍윤애 추모제 및 문학제』개최
제주문협,『 2015 제3회 의녀 홍윤애 추모제 및 문학제』개최
  • 유태복 시민기자
  • 승인 2015.07.0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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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인협회(회장 고훈식)는 지난 30일 오전 11시 장대비 속에서2015 제3회 의녀 홍윤애 추모제 및 문학제』를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소재 '홍윤애 묘'에서 도내 문인 등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개최했다.

▲ 제주문협 고훈식 회장(초헌관). 홍창국 부회장(아헌관). 현용식 편집위원(종헌관)이 유교식 제례로 봉행했다.
 

이날 고훈식 제주문인협회 회장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도 많은 분이 참여하여 주심에 더 없는 기쁨이다."며 “다른 지방자치에서는 없는 문화콘텐츠도 만들고자 고심하는 형편인데, 제주도는 유배문학 자원이 넘쳐나서 숭고한 의녀 홍윤애와 조정철의 러브스토리는 어느 문학적인 사랑보다도 뛰어나기에 차후 세계적인 예술로 승화된다.”며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제3회 의녀 홍윤애 추모제’는 제주특별자치도 후원으로 제주문인협회 임원인 고훈식 회장(초헌관). 홍창국 부회장(아헌관). 현용식 편집위원(종헌관)이 유교식 제례로 봉행했다.

참가자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제주여성의 진가가 더욱 빛을 발하리라고 참가자의 뜻이 모아졌고 의녀 홍윤애에 대한 측은지심이 예술로 승화돼 제주도민의 관심과 정당한 평가로 확산되기를 소망하며 제를 올렸다.

이어서 ‘의녀 홍윤애 추모문학제’로 문상금 시인이 홍랑의 묘에 바친 조정철의 헌시를 낭송했고, 김가영 수필가는 조정철의 추모 글을 발췌해 낭독했다. 특별 강연으로 현행복 한학자가 조정철과 의녀 홍윤애의 역사적인 배경과 제주도에서의 정황을 알기 쉽게 특강했다.

의녀(義女) 홍윤애(?~1781)는 조선시대 정조 때 제주목에 살았던 여인으로 사랑하는 연인 조정철(1751~1831)이 모함에 걸려 죽게 되자 그를 살리려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순절해 제주여성의 정의로운 기질과 당찬 기개를 널리 알린 제주여성의 귀감이다.

홍윤애가 조정철 때문에 매를 맞고 비명횡사한지 31년 만에 제주 목사로 왔다. 이때가 조정철의 나이 61세 환갑 되던 해이다. 그는 오자마자 홍윤애의 묘비명을 지어 애도시를 새겨 넣었다. 정철이 제주에 왔을 때 홍윤애와의 사이에 난 딸은 이미 죽고 사위 박수영(朴秀榮)도 그가 도임하던 해에 죽고 만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온 이듬해 동래부사로 떠난 후, 충청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성,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을 거친 후 1831년 5월 19일 지중추부사로 별세했다.

한편 의녀 홍윤애의 정인 조정철의 애끓는 기록엔, “윤 5월 15일에 홍랑(洪娘)이 죽자, 이날부터 죽 비가 내리지 않다가 8월 초 2일에 이르자 비로소 큰 폭풍우가 동이로 붓듯 나무들이 꺾이며 열흘이 가까워도 그치지를 않아 흉년이 이미 들게 되었다. 수직 장교(守直將校)들이 서로 애기하기를 ‘한재(旱災)와 못비 세차게 내리는 비바람은 모두 이것을 여랑(女랑)의 원기(冤氣)가 섬에 불러온 것’ 이라고 하여 자못 전설로 말해졌다. 아마 장교무리들이 먼촌사람이기 때문에 낭자가 나 때문에 죽은 줄은 모르고 다만 김시구(金蓍耈)의 혹형으로 함부로 죽인 것을 원망하며 섬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중에 소문을 듣고 절구 한 수를 마음에 초 잡아 두었다."

 

하늘로 감아올리는 원인모를 재앙
죽음은 실로 나 때문이지 어찌 그대의 원혼일까
가뭄에 열흘 거듭된 세차 비바람
섬사람들, 오히려 여랑(女랑)의 원한이라 말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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