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끈, 첫 번째 이야기
가방끈, 첫 번째 이야기
  • 홍기확
  • 승인 2014.12.24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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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61>

 가방끈이 끊어졌다.
 몇 년 전 처제 둘이 돈을 모아 선물해준 옆으로 매는 비즈니스용 가방이다. 낡긴 했지만 수납공간이 다양하고 무엇보다 정이 많이 들었다. 살리고 싶다.

 86세에도 열심히 일하는 도몬 후유지의 책, 『공부하는 힘, 살아가는 힘』을 읽었다. 첫 챕터의 첫 번째글부터 죽비소리가 나의 내면에 공명한다. 주로 절에서 수행시 쓰이는 죽비(竹篦)는 대나무를 부딪쳐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이 소리로 수행자들의 졸음을 쫓거나 자세를 바로 잡는데 쓰인다. 죽비소리 일갈.

 “종신현역(終身現役), 평생공부(平生工夫)”

 설명이나 사족이 필요 없다. 삶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종착역에 들어가고 있는 할아버지의 유언(遺言)이자 그윽한 유언(幽言). 위 여덟글자는 나의 2015년 다이어리 맨 앞장에 기록되었다.
 그는 또한 말한다.

 “가장 빠른 답이 반드시 가장 적절한 답은 아니다. 특히 ‘배움’은 성취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배우다. 자라다. 나아지다. 이런 동사는 속도나 효율로는 환산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방 카운터펀치.

 “사람은 누구나 평범함을 쌓아 올려 비범해지는 존재다.”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얘기를 펼치고 싶지 않다. 대단한 사람이 되자는 얘기도 아니다. 자기계발, 개발하여 멋진 직업을 갖자는 얘기를 펼치기는 더더욱 싫다.
 다만 점차 나아질 자신의 평범함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다. 평범하더라도 꾸준하자는 말이다. 우직하게 꾸준함을 지속하자는 얘기다.
 우리는 평범하다. 하지만 그 안에 특별함이 있다. 그 종착역에는 혹시라도 비범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특별함을 찾던 비범함을 찾던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평범함에서 특별함, 비범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코코 샤넬은 말한다.

 ‘무엇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면 많은 걱정을 벗어버릴 수 있다.’

 변호사. 회계사. 의사. 판사. 변리사. 관세사. 교사. 사(事), 사(士), 사(師). 무엇이다. ‘무슨 사람’이다.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 꾸준한 사람. ‘어떤 사람’이다.

 그룹 베이시스의 노래제목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처럼 ‘어떤 사람’을 소개시켜 달래야 한다. ‘무엇’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너는 ‘무엇’인고? 너를 사랑해주는 ‘어떤 사람’은, 변호사나 회계사처럼 ‘무엇’같은 직업들이 많지 않을 텐데?

 부자. 무엇이다.
 돈도 많고 정도 많은 사람. 어떤 사람이다.
 미인. 무엇이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어떤 사람이다.
 교수. 무엇이다.
 공부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다.
 노인. 무엇이다.
 나이가 들어도 박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이다.

 우리는 평범하다. 하지만 그 안에 특별함이 있다. 그 종착역에는 혹시라도 비범함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한다. 부모, 아빠가 아닌 멋진 부모, 특별한 아빠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공부한다. 또한 평생을 공부할 것이다. ‘무슨 사람’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달랑 수식어 하나면 되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래와 같은 대화가 평범한 일이 되는 때가 오길 바란다. 이런 때가 오지 않는다면, 이런 대화를 나눌 ‘어떤 사람’이라도 몇 명 얻게 되길 바란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아들 녀석이다. 이 녀석은 결혼했다. 결혼은 했어도 가까이 사는지라, 가끔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전화하곤 한다. 아들 녀석이 말한다.

 “아빠, 갑자기 술이 당기네. 눈도 오는데 진노 쓴물 각 이병 콜?”

 나는 태연히 대답할 것이다.

 “술을 먹고 싶긴 하지만 요즘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안 되겠는걸? 상어와 돌고래의 차이에 대해 한 달간 연구하고 있는데, 마무리를 지어봐야겠어. 게다가 눈이 오니까 갑자기 눈에 대해 쓴 국내외 시(詩)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네.”

 아들 녀석도 맞장구 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잊고 있던 눈에 대한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네. 술을 둘 다 먹고 싶은 건 여전하니 각 일병씩, 각자 집에서 먹자고, 아빠. 엄마한테 안주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해!”

 아들은 나를 ‘낭만적인 아빠’라 부를 것이고,
 나는 아들을 ‘되돌아볼 아들’이라 부를 것이다.
 우리는 짧은 대화로 부모자식 같은 무엇이 아닌, 어떤 아빠아들이 된다.

 가방끈이 끊어졌다.
 집에 돌아와 가죽이 찢어진 부분에 가죽용 본드로 떡칠을 해서 붙여 보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나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 용케도 내 책들의 무게를 한 번 더 지탱해준다.
 내 가방은 평범하다. 하지만 특별하다. 비범함은 바라지도 않는다.
 가방끈을 다시금 잇고 홀연히 도서관으로 향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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