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지를 통해 보는 탐라국 건설과 그 진실
혼인지를 통해 보는 탐라국 건설과 그 진실
  • 고희범
  • 승인 2011.10.18 10: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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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15회 제주탐방 후기

탐라국의 개국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사람이 살지 않던 아주 아득한 옛날,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이들은 모흥굴, 지금의 삼성혈에서 솟아났는데, 맏이를 고을나, 그 다음을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그들은 용모가 의젓하고 기품과 도량이 넉넉하고 활달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가죽옷을 입고 육식을 했으며 사냥을 업으로 삼았으나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고량부 삼신인이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갔다가 섬 동쪽 바닷가에 자줏빛 안개에 싸인 채 떠내려온 나무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산에서 내려와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새 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관대를 갖추고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옥함을 지키고 있었다. 옥함 안에는 푸른 옷을 입고 나이 15~16세 돼 보이는 처녀가 셋 있었다. 옥함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도 있었다.
 
사자는 고개를 두 번 숙여 절하며 말했다.
“저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저희 임금님께서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 고량부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는지라 저에게 세 공주님을 모시고 가라고 명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마땅히 혼례를 치르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삼신인은 “이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 세 사람에게 내린 것”이라 하며 기뻐했다. 사자는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삼신인은 곧 깨끗한 ‘희생’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하고 혼례를 올려 ‘흰죽’이라는 굴에서 살았다. 사자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오를 때 생긴 말의 발자국이 지금도 남았는데, 이곳이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이라는 곳이다. 또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은 ‘혼인지’라 불렀다. 

 

고량부 삼신인이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목욕했다는 혼인지

혼인하여 동굴에서 살던 삼신인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샘물이 맑고 비옥한 땅을 구한 뒤 활을 쏘아 화살이 가는 방향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고을나가 차지한 곳을 일도, 양을나는 이도, 부을나는 삼도라 했다. 지금의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다.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을 ‘활쏜디왓’이라 하는데,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지방기념물 ‘삼사석’(三射石)이 그곳이다.
 
땅을 나누어 가진 뒤 오곡의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으며, 가축을 기르니 날로 풍요를 얻어 마침내 인간 세상 ‘탐라국’을 이루게 되었다." (박찬식 '삼신인과 혼인한 벽랑국 세공주' 중에서)

 

삼신인이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한 뒤 살았던 혼인지 근처 동굴. 세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다.

10월 7일부터 11일까지 열린 탐라문화제가 종래와는 달리 탐라개국 설화로 개막되고,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주말, 우리는 탐라국 개국에 얽힌 신화, 설화, 또는 전설과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찾아 성산읍 온평리 '혼인지'(婚姻池)로 향했다.

탐라국은 언제쯤 생겼을까? 고량부 삼신인(三神人)의 용출설의 진실은 무엇일까? 삼신인과 벽랑국 세 공주의 결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벽랑국은 어느 나라일까? 이날 탐방은 전통문화연구소 박경훈 소장의 안내로 이루어졌다.
 
신화나 설화에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신앙이나 사상을 표현하기도 하고 소망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극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탐라국 개국설화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찾아가는 길은 다양하다.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역사기록과 삼국시대의 기록,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의 기록을 나침반 삼아 구전신화와 풍습, 전통의 의미를 재해석해내는 것이다.
 
탐라의 개국시기는 언제일까?
학자들에 따라 BC 1세기, AD 1세기, AD 3세기, AD 5세기 등으로 다양하다. 대체적으로는 BC 1세기경 고량부 세 부족이 외부에서 들어온 뒤 AD 3세기경 농경세력이 입도하면서 탐라국 개국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주의 구전역사를 대표하는 제주 심방들의 사설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심방들이 굿을 시작하면서 신들에게 굿을 하는 장소를 고하는 대목이다. 천지개벽 신화로부터 시작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소개하고 산과 물 얘기를 하다가 여기가 제주도라는 설명을 하게 된다.
 
"영평 8년 을축 3월 열사흗날 자시에는 고을나, 축시에는 양을나, 인시에는 부을나, 고량부 삼성친이 모흥굴로 솟아나서 도읍한 국이외다."
 
'영평'은 중국의 연호로 후한시대 AD 58~75년에 해당한다. 영평 8년은  AD 65년이 된다. 중국의 연호는 한 무제가 처음 사용한 이래 1949년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 사용됐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상당기간 중국 연호로 연대가 표기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심방들의 경우에도 중국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개국 연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고량부 삼신인이 모흥굴에서 솟아났다'는 것은 무얼 얘기하려는 걸까?
이는 북방계의 세 부족이 제주섬의 선주민들을 지배한 뒤 자신들의 뿌리가 바로 이곳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화정책을 구사하기 위한 건국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역사는 지배자의 기록이다. 설화의 생산도 지배자의 의도에 따라 생성되는 것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한 뒤 농사를 지었다.'
우선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를 갖고 왔다는 벽랑국은 어디일까?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초까지 '탐진현'(耽津縣)이라고 불리던 전남 강진군 남쪽의 벽랑도(碧浪島, 현 소랑도)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탐진현이라는 이름은 탐라인들의 활발한 육지 진출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탐라국은 해상왕국으로서 중국 일본 한반도 남부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펼친다. 특히 탐라국의 제해권은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않던 전남 강진, 완도를 넘어 나주평야 일대에까지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 주변의 수십기에 이르는 고분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탐라국의 왕들의 묘는 제주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탐라의 제해권이 미치던 이 지역에 왕들의 묘를 쓴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세 공주로 일컬어지는 농경세력이 입도한 것은 분명하다. 사냥을 주로 하던 지배세력이 농경문화를 지닌 세력과 만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벽랑국의 세 공주와 함께 농경 기술자들이 들어왔고, 농경문화가 이식되면서 사냥을 하던 이들이 마을을 이루어 정착하게 된 뒤 탐라국을 개국하게 된다.
 
최근 그 전통을 살려 매년 입춘에 열리는 '입춘굿'은 탐라개국에 이은 중농정책과 관련이 있다. 왕이 몸소 쟁기질을 하는 입춘굿의 내용은 국가정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조선의 왕이 선농단(先農壇) 에 제사하고 밭을 가는 친경(親耕) 의식을 거행한 것과 마찬가지다.
 
탐라의 개국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박경훈 소장의 해설은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된 뒤 탐라의 왕이 '성주'(星主) 칭호로 바뀌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체제 속에 완전히 편입된 과정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역사는 탐라가 '나라를 바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탐라인의 기억 속에서 탐라국을 지우는 과정이 치밀하게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탐방은 혼인지의 탐라개국에서 1400여년을 건너 뛰어 조선시대 정의현의 안산이던 영주산(瀛州山)으로 향했다. 해발 326m, 높이 176m에 불과한 오름을 '산'으로 부른 것은 정의현을 뒤에서 감싸는 안산이었기 때문이다. 대정현 주변의 오름들을 '군산' '단산' '송악산' 등으로 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중국 고대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상상 속의 삼신산(三神山)인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중 하나의 이름을 딴 배짱이 두둑하다.

 

정의현 성곽 앞에서 본 영주산. 정의현을 감싸듯 북쪽에 버티고 선 모습이 믿음직하다.

영주산은 분화구가 남동쪽으로 벌어진 말굽 모양을 하고 있어 동쪽은 능선이 완만하지만 다른 방향으로는 경사가 가팔라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고, 이 때문에 영주산의 모양도 보는 방향마다 다른 특색을 보여준다.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품이 넉넉해 정의현을 감쌀만하고 주변에서는 가장 높아 산을 오르고 나면 전망도 좋다.

 

영주산은 화산폭발로 터져나온 용암이 남동쪽으로 흘러 분화구가 말굽형을 하고 있다.

영주산은 지난 1월 '은둔의 도읍지 성읍'을 주제로 한 제7회 제주탐방 때 오를 계획이었으나 육지에서 구제역이 번질 때여서 포기한 곳이었다. 가급적이면 출입을 삼가달라는 표선면의 자제 요청 때문이었다. 영주산을 오르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영주산 주변에 방목하는 소들이 곳곳에서 보일 뿐아니라 정상에서도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영주산 정상에서 풀을 뜯던 소들은 우리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산 아래도 풀이 넉넉했는데 정상까지 올라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이랬을 것 같다.
"여기까지 왜 올라왔니?"
"풀 먹으러. 그런데 넌?"
"음... 그냥..."
 
가을 햇살이 눈부시던 날, 탐라개국에서 시작된 우리의 열다섯번째 제주탐방은 조선조의 정의현을 들러, 제주시내 종합운동장에 빈틈없이 주차한 자동차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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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화 2011-10-27 08:47:03
요즘 건강은 잘 챙기고 계신지요

김승화 2011-10-27 08:44:41
멋진글 잘 읽고 갑니다.
김해김씹니다. 김알지 김, 김해김,고양부는 북방계 한족과 일전을 벌여 진 여진족의 후예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