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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의 고향
어린 시절 나의 고향
  • 미디어제주
  • 승인 2011.09.2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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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주시 정보화지원과 지리정보담당 변문희

기성세대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고향의 올레길 한두개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놀이기구가 변변치 않았던 시대라 고작해야 유일한 벗이라면 작은 고무공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 친구들과 놀다보면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붉게 탄 석양이 비양도 끝자락에 뉘엿뉘엿 넘어서야 집에 돌아갔던 시절 지금은 추억의 자화상으로 그려질 뿐이다.

우리 고향은 비양도와 한림시내가 아름답게 펼쳐져 보이는 동명리 한천동이란 전형적인 작은 농촌마을이다.

동명리는 당초 명월리에 속해 있었는데 1861년(철종2년)에 독립하여 지금의 동명리가 되었다. 수류천 이라고 불리울 만큼 옛 북제주군 관내에서 샘이 풍부했다. 또한 물이 맑다 하여 속칭 '한샘이(용수천)'란 명칭이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한림에서 이시돌목장 등 서귀포를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첫 관문 마을이기도 하다. 60, 70년대 자동차가 없는 시절 한림 오일장이 설 때면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10㎞ 이상을 구비진 비탈길을 따라 걸어서 다녔던 제주판 작은 실크로드라 표현해야 옳을 듯 싶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월대와 녹음으로 즐비한 팽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지친 나그네들의 안식처가 됨은 물론이고 정보 공유와 아늑한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마을 어르신들과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장기판을 둘러 안고 '장이야 멍이야' 흥겨운 진풍경속에는 사람들이 구수한 입담과 넘치는 해학 그리고 착한 인심이 넘쳐났고, 그곳에서 나는 그리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수정과 같은 맑은 물과 잘 어우러져 수려함을 자아내던 팽나무들도 지금은 개발과 시대 변화의 커다란 흐름속에 하나하나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함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나는 매주 토요일 저녁은 고향을 찾는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다. 시내집에 모셔오면 하루가 멀다하여 시골에만 가신다고 난리가 아니다.

요즘 어머니의 희망은 아들이 오는 토요일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어보자.

이 풍요로운 가을에 고향을 찾아 어머니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고향의 들녘을 거닐며 흙내음을 마음껏 맡으면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의 자화상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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