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문학이었다
[기고]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 사업’ 참가자 강주나
제주는 어디를 봐도 이미 문학적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달리 투명한 바다도, 심각한 고민도 별거 아니라는 듯 날려버리는 바람도, 어디에도 묶이지 않아 여기 저기 자유롭게 기웃거리는 강아지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관광객 옆을 무심히 지나는 몸빼 입은 시골 아낙도. 그것들의 빈틈에 나의 상상이 흘려들어 혼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몽상 속에서는 얄미운 사람을 골탕 먹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미스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혼자 모래성 놀이하듯 장난으로 만든 이야기에 혼자 키득거리다가, 흐뭇해하며 성을 쌓고 부쉈다. 이제 시간이 됐다. 일상으로 돌아갈.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 하면 좋겠어요” 익숙한 패턴이다.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잠시 고민한다. 이 사람은 어떤 답을 원할까? 그의 상상을 충족시켜줄 대답, 아니면 그의 이상과 다른 실제 현실을 알려줘서 빨리 포기시키는 게 더 나으려나. “어떤 점이 좋을 것 같아요?” “공기 좋고 풍경 좋은데서 여행 온 사람들이랑 매일 술 마시며 얘기하면 좋잖아요.” “맞아요. 그런 게 참 좋아요” 난 내 눈빛을 들킬 새라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을 매만졌다. “그런데 그게 일상이 되면 여기도 다른 데랑 같아요. 여기서도 밥벌이는 해야 하니까요. 그러다보면 결국 영업과 경쟁을 해야 하고요. 그리고 손님들이 보시기에 매일 저녁 술 먹는 게 일인 것 같지만,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손님들이랑 술 먹기 전에 후다닥 청소와 빨래를 해치우는 거예요. 손님들께 낭만적으로 보이기 위해, 그리고 여행 오신 손님들의 낭만을 실현해드리려면 낭만적이지 않는 구차한 것은 누군가가 해야 하잖아요. 그걸 제가 해요.” 청소와 빨래는 해본 적 없어 보이는 남자 손님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그건 아줌마를 쓰면 되지 않나요?”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 아까보다 입 꼬리를 더 올렸다. “맞아요. 그 아줌마가 “저”예요. 작아서 소박한 가게에는 직원을 쓸 수 없거든요. 소박하다는 것은 수입도 소박한 거잖아요. 그런데 시골이라고 소비가 생각보다 많이 소박해지진 않아요”
10여 년 전 제주로 이사를 결심하며,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바다를 보며 책을 읽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하는 나의 모습을 꿈꿨다. 휴가를 내서 제주를 왔을 때에는 돈벌이의 일상이 지워진 여행자의 시간이 좋았다. 제주에서 살면 매일이 휴가의 연속일 줄 알았다. 현실은 휴가같이 보이지만 휴가 없이 매일 단순 반복 일의 계속이었다. 여행으로 왔을 때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개방적이고 매너가 좋았다. 일로 만난 여행자는 달랐다. 가끔은 갑질을 하거나 진상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룻밤 숙박하며 가족을 만난 듯 서로 잘 맞는다며 반가워했던 손님이 악플을 남기도 했다. 구차한 일상의 고민은 여기도 여전했다. 아니 아름답고 낭만적인 제주에서 느끼는 현실의 구질구질함은 더 실망스러웠다.
이곳에서도 여전한 삶의 문제를 잠시 피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예전에는 그럴 때마다 제주로 떠나왔는데 제주로 오니 떠날 제주가 사라졌다. 도시처럼 공연장이나 전시회도 없어 어딘가 다른 세계로 빠져나고 싶으면 소설을 읽었다. 다른 세상의 일들을 읽으면 그 순간만은 내가 사는 시골도 답답하기 만한 좁은 세상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은 ‘청소하는 민박집 아줌마’가 ‘문학소녀’가 됐다. 서울에서는 책모임이 많아서 장르마다 요일마다 연령대마다 다양한 책모임이 있다는데 여기서는 쉽지 않았다. 간혹 그런 자리가 생겨도 집에서 너무 멀거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빽빽하지 않아 좋은 시골생활은 뜻 맞는 사람들과의 거리도 멀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시골 책방에서 모임 공지가 떴다. ‘상주 작가와 함께하는 독서, 시, 수필, 소설’ 나도 모르게 소설에 눈이 갔다. 나의 선택에 내가 놀랐다. ‘글쓰기’라고는 혼잣말처럼 끼적인 SNS가 다였는데, 나, 소설을 쓰고 싶었었나.
나는 어릴 때부터 말이 많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지 못했다. 작은 이야기를 들으면 상상과 과장에 비약도 잘했다. 나에겐 항상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주워 모으듯 담아둔 이야기들이 한 움큼 있었다. 그 조개껍질을 두 손에 쥐고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면 혼자 신이 나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것들은 나에게만 흥미로 워서 그들에게 단순 잡담으로 물방울처럼 튕겨져 증발했다. 내가 모아두기만 한 조개껍질은 그냥 무더기였다. 그렇게 수집한 잡담을 잘 엮어 증발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 생각은 머리에만 맴돌며 핸드폰 메모장에는 잡담들이 쌓였다. 기대하는 사람도, 독촉하는 사람도 없어 메모장에는 글은 늘지 않고 잡담만 늘었다.
글쓰기 모임을 가는 날, 방에서 혼자서 공깃돌 던지고 놀던 아이가 게임하러 나가는 것처럼 설랬다. 처음으로 소설이라고 쓴 글을 가지고 갔다. 나처럼 처음인 사람도 있고, 이미 여러 번 글쓰기 모임을 해 본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게 신세계를 열렸다. 그렇게 많은 공모전과 글쓰기 책들이 있는지 몰랐다. 먼저 소설 쓰기 해본 선배들은 이제 시작하는 나에게 길안내를 해줬다. 그들은 내가 하는 실수들은 이미 자주 해 본 것이었다. 그들은 나의 첫 독자였다. 그들이 내 글을 읽어야 하는 기한이 있으니 나는 모임 전까지 어떻게든 잘 써서 내려고 조바심 내며 매수를 늘렸다. 그리고 결국 완성했다.
소설 모임 모두가 어려워하는 것이 있었다. ‘인물과 거리 유지하기’ 작가님은 일기 검사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우리의 주절거리는 혼잣말 같은 글을 봐주셨다. 쓰면서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작가님은 일기장 아래 선생님이 남긴 친절한 조언처럼 희뿌옇게 보이던 내 글의 부족한 점을 명확히 짚어 주었다. 모든 캐릭터들의 성격이 나와 비슷해서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지 못했고, 소설 흐름에 불필요한 내 개인사와 취향이 담겼다. 사건을 풀어낼 때는 이야기로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친구한테 말하듯 설명했다. 서사에만 골몰해 내 소설에는 ‘글’이 약했다.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읽는 감각, 독자가 느낄 읽기의 리듬을 생각하게 됐다. 독자로서 쉽게 후루룩 읽던 작품들이 쉽게 쓰인 것이 아니었다. 소설책을 읽을 때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 작가는 인칭을 이렇게 정했을까? 왜 사건을 시간 순으로 하지 않은 것일까? 인물의 묘사는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로 인한 효과는 무엇일까? 내 소설을 그렇게 잘 만들지는 못해도 다른 소설을 읽는 안목이 생겼다. 소설이 더 재미있게 읽혔다.
나는 첫 소설로 과거 가장 아팠던 이야기를 썼다. 친한 친구에게도 굳이 내보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속으로 기회가 된다면 글로 남기고 싶었다. 이미 오래전 흘러가 버렸다고 잊어버리기보다 생의 어느 한 순간으로 의미 있게 남기고 싶었다. 아직 서로 잘 모르는 회원들 앞이라 부끄러웠지만 소설이라며 시치미를 떼고 내보였다. 우린 서로를 소설로 이해하고 소통했다. 소설로 조언을 받으면 과거의 일들을 더 생각하면서 내 이야기를 좋은 소설로 만들기 위해 고치고 고쳤다. 오래 전 일이라 이젠 다 아물었다며 괜찮을 줄 알고 그 상처를 꺼냈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글의 밀도를 높일수록 그때 아픔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때의 나에게 공감하니 다시 아팠다. 하지만 그 감정이 그때처럼 분노는 아니었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면서 잊고 싶던 그 시절과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거리를 두고 볼 여유가 생겼다. 지금보다 어렵던 그 시절은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았다. 내 기억 속 그들은 가해자였는데, 내 소설 속 그들은 주요 인물이었다. 그들을 캐릭터로 구체화 시킬수록 내 마음의 비늘이 한 겹씩 벗겨졌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밉기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잘 이겨낸 과거의 작은 나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던 나를 꺼내주었다. 오랫동안 울고만 있던 작은 나는 드디어 해방되었다.
청소하는 게스트하우스 아줌마의 일상이 바뀌었다. 하는 일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청소를 하고 손님을 맞는다. 더 이상 예전처럼 유투브를 들으며 청소하지 않는다. 손으로 청소를 하면서 머리로는 소설을 생각한다. 개성이 부족한 캐릭터를 살리려고 내가 만난 사람들을 헤아린다. 평소 좋은 사람이 돼야 된다는 강박에 좋은 사람만 관찰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외면했다. 그러다보니 소설 속 악역을 묘사가 허술했다. 선한 사람만 나오면 사건의 흥미와 현실감을 살지 않는다. 현실의 선한 사람도 어딘가에 비틀림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싫어했던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내가 어떤 점 때문에 그를 싫어했더라. 좋은 캐릭터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그럴만한 사정과 납득되는 행색과 행동과 말투를 가진 사람이다. 나는 더 열심히 그의 성격과 행동거지, 말투의 디테일을 파헤친다. 예전에 감정적으로 싫어만 하던 사람들을 이제 눈을 반짝이며 들여다본다. 좋고 싫음만 있던 현실이 다양한 캐릭터들이 함께 사는 소설 속 배경이 됐다. 일상의 무탈을 바랐지만 소설에서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머리 아픈 일들이 생겨도 ‘소설이라면’이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아니라 글감이 된다. 내 일상의 일들이 좋고 싫음만 있었는데 이제는 글이 될 것과 아닌 것이 됐다. 글이 될 것은 면밀히 관찰한다. 싫었던 사람들의 상처를,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의 유머를 발견하기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니 평면적이던 세상이 입체로 보인다. 모든 것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미움이 누그러진 사랑의 눈빛을 가지게 됐다.
내 메모장에는 아직도 채집해 둔 조개 껍질 같은 이야기가 많다. 툭하고 스러지는 모래성 같던 잡담이 단단한 구조와 섬세한 장식이 들어간 글로 하나씩 쌓였다. 더 이상 내 수다를 풀려고 가족과 친구를 붙잡지 않는다. 글로 만든 이야기를 소설 쓰기 문우들과 나눈다. 공모전 정보를 잘 아는 문우가 같이 공모전에 응시하자기에 떨어질 것을 알지만 도전해본다. 도전이라는 것도 얼마만인지. 마감 날 다 같이 제출하고서 우리는 같은 경기를 뛴 동료들처럼 서로를 격려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내 글의 부족함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것도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러니 떨어져도 괜찮다. 모임 첫 날 내가 썼던 글을 기억한다. 지금은 부끄러워 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 글을 고치고 고쳐서 이제는 그때보다 더 나은 글을 쓰게 됐다. 부족한 나를 더 이상 자책하지 않고 보듬고 토닥인다. 타인에게 뾰족하게 세웠던 날이 뭉툭해졌다. 매일 보며 무감해진 제주의 풍경을 가만히 지긋이 바라본다. 지긋지긋 구차하던 현실이, 다채로운 문학적 장면으로 다가온다. 같은 장면이지만 매일 매일 조금씩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제 작은 변화를 지켜보며 그 사소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됐다. 애써 사랑하지 않아도 됐다. 작은 사건들이 생겨도 슬쩍 웃어넘긴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거다. 그렇다고 웃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웃으며 바라본다. 모든 것이 문학이었다.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 사업’ 참여 후기 공모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