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주 미래 모빌리티, ‘백화점식 나열’ 아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글 : 송규진 제주YMCA 사무총장
예산은 곧 정책의 거울이다. 숫자로 표현된 예산안에는 도정의 철학과 우선순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제주특별자치도의 내년도 예산안을 들여다보면, 도정이 바라보는 미래 모빌리티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탄소없는 섬(CFI)’을 표방하며 전기차 천국을 꿈꾸던 제주는 지금, 전기차와 수소차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지난 24일 제주도의회 한권 의원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내년도 제주도의 전기차 구입 보조금 예산은 충격적인 수준이다. 올해 1,019억 원에서 내년 403억 원으로, 무려 60% 이상 삭감됐다. 반면 수소차 구입 보조금으로 91억여 원이 신규 편성됐다. 이 드라마틱한 숫자의 변화를 시장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누가 봐도 제주도가 전기차 보급 정책에서 발을 빼고, 수소차로 급격히 핸들을 꺾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 선회가 치밀한 로드맵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의 우선순위가 변경되었다면 응당 그에 합당한 근거와 인프라 구축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제주는 전기차도, 수소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우선 ‘전기차 홀대론’에 대한 우려다. 제주는 지난 10년간 전기차 보급률 1위를 자랑하며 충전 인프라를 깔아왔다. 하지만 아직 도내 등록 차량 중 전기차 비중은 내연기관을 완전히 대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조금을 반토막 낸다는 것은 사실상 보급 속도 조절이 아니라 보급 의지 상실로 비친다. 전기차 인프라가 완성 단계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예산을 뺀다면, 기존 이용자들의 불편은 물론 신규 진입 장벽만 높이는 꼴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수소차 시기상조론’이다. 수소차가 미래 친환경 모빌리티의 한 축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주는 아직 그린수소 밸류체인(생산-저장-운송-활용)이 완성되지 않았다. 수소 충전 인프라는 전기차 충전소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조차 떼지 못했다. 충전소가 어디에 들어설지, 수소 공급은 안정적인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덜컥 차량 구입 보조금부터 편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정’이다. 기반 시설 없는 차량 보급은 애물단지를 양산할 뿐이다.
여기에 V2G(Vehicle to Grid, 차량 전력망 연결) 기술까지 더해지면 혼란은 가중된다. 제주는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선정되며 전기차 배터리를 전력망으로 활용하는 V2G 기술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충전기와는 다른 양방향 충전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도정은 일반 전기차 충전기 구축, 수소 충전소 건설, V2G 인프라 구축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내년도 관련 예산이 634억 원에 달하지만, 이 막대한 돈을 어디에 먼저 쓸 것인지에 대한 ‘종합 계획’이 없다는 한권 의원의 지적은 뼈아프다.
지금 제주도정에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모든 종류의 친환경 차를 다 잘하겠다는 것은 욕심이자 허상이다. 한정된 예산으로 전기차, 수소차, V2G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백화점식 나열 정책으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성공시킬 수 없다.
지금이라도 냉철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전기차 보급이 목표치에 도달할 때까지는 확실한 지원을 유지하며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야 한다. 수소차는 상용차(버스, 트럭) 위주로 우선 도입하며 충전 거점을 확보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V2G는 시범 지구를 선정해 기술적 검증을 마친 후 확산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제주형 모빌리티 통합 로드맵’이 시급하다.
정책의 신뢰는 일관성에서 나온다. 올해는 전기차, 내년엔 수소차 하는 식으로 유행을 쫓듯 정책이 춤을 추면 도민들은 혼란스럽다. 예산 삭감과 신규 편성이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라, 제주의 미래 산업 지도를 그리는 정교한 설계의 결과여야 한다.
도정은 “예산이 곧 정책”이라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기차 보급의 동력을 꺼트리지 않으면서 수소 사회로 연착륙할 수 있는 정교한 시간표를 다시 짜야 한다. 이것저것 다 건드려보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과만 남기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지금은 과욕을 부릴 때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탄소 중립 수단이 무엇인지 선택하고, 그곳에 행정력을 집중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