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뒤의 얼굴, "언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놓쳤는가"

11월 21일 ‘지역 기록의 시선 - 인권 감수성’ 세미나 열려 재난과 기록의 간극 속, 지워지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묻다 언론·학계, 인권 보도의 기준과 감각을 함께 돌아본 자리

2025-11-24     김은애 기자

[미디어제주 = 김은애 기자]

“측은지심이야말로 언론이 지켜야 할 첫 감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 감각을 갖고 있는지, 저는 의문입니다.”

세미나실 내부의 공기가 천천히 바뀐다. 재난의 기록이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의 고통은 숫자로 희석되는 시대. 뉴스는 폭염의 최고치와 강풍의 시속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 쓰러지고,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온은 가려질 때가 많다. 김형훈 제주언론학회 회장이 던진 이 질문은 이날 세미나의 방향을 집요하게 이끌었다.

11월 21일, 제주인권교육센터에서 열린 ‘지역 기록의 시선 - 인권 감수성’ 세미나. 제주학연구센터, 제주언론학회, 언론인권센터가 공동 주최하고 제주특별자치도의회와 한국언론학회, 한국방송학회가 후원한 행사다.
목적은 분명했다. 지역을 기록하는 언론의 시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그 시선이 누구의 얼굴을 놓치고 있는지 고민해보는 시간.

(좌)허찬행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우)이정원 한국언론학회 이사 (사진=미디어제주)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허찬행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는 언론의 오래된 관성을 정면으로 짚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라는 말 뒤에 숨은 언론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유명인의 이혼 공방을 생중계하듯 전하는 기사들, 그 와중에 아무 상관 없는 제3자의 성정체성이 무단으로 노출된 보도, 드라마 홍보 문구의 비하 표현을 언론이 반복해 보도한 사례. 너무나 흔해서, 무감각해질 지경이다.
허 이사는 의도와 결과를 분리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 말했다. 언론이 인권 침해를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침해 요소가 있다면? 반성은 필요하다. 

“의도의 유무가 아니라, 반복되는 관행이 문제를 만듭니다. 관행은 구조가 되고, 구조는 차별을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언론의 인권 보도 준칙이 선언적 문서로 머물지 않도록, ‘현실의 언론’에 적용 가능한 지표를 제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인권을 해치지 않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고 권리를 확장하는 보도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권 보도 준칙은 ‘사후 사과를 줄이기 위한 최소 기준’이 아니라, ‘인권 감수성을 사전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로 재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기준 제안이 아니라, 지금의 언론 환경을 향한 경고처럼 울린다.

두 번째 발제에서 이정원 한국언론학회 이사는 제주 폭염의 기록을 꺼냈다. 그는 올해의 폭염을 ‘기후 변화’가 아닌 ‘기후 재난’으로 다시 명명했다. 10월까지 이어진 열대야, 해마다 갱신되는 ‘역대 최고 기온’이라는 익숙한 헤드라인. 하지만 그 수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이 이사는 “폭염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쏟아졌지만, 고통은 불평등하게 분배됐다”고 말한다.
냉방이 되는 실내에서 시원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있는 반면, 생계를 위해 한낮의 열기 속에서 그대로 일해야 했던 사람도 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는 더위로 목숨을 잃었다. 에어컨 설치 노동 중 쓰러진 청년의 죽음. 이는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 재난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끝으로 그는 ‘기후 건강 리터러시’라는 새로운 윤리적 틀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기후 건강 리터러시'란, 기후 정보를 읽는 기술을 넘어 ‘기후 변화로 인해 누가 다칠 수 있는가’를 묻는 감수성이다. 기후 재난을 단순히 기록하는 언론에서 벗어나, 위험이 ‘보이기 전에’ 사람의 안부를 묻는 언론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재난을 사후적으로 다루는 데 익숙한 언론에게, 그는 ‘예감하는 보도’라는 큰 과제를 던졌다.

토론은 두 발제가 던진 질문을 따라 자연히 깊어졌다. 

먼저 문정임 국민일보 제주 주재기자는 현장에서 마주한 언론의 무감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제주도가 “무더위쉼터 400여 곳 운영”이라고 발표해도, 실제 경로당 쉼터 중 상당수는 문을 여닫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경로당 내부 구성원이 외부인을 받지 않기로 하면, 그곳은 곧바로 ‘쉼터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행정은 수치로 답하고, 언론은 수치로 묻습니다. 이때 사람의 고통은 쉽게 누락될 수 있습니다.”
문 기자는 제안한다. 기자 개개인의 이메일로 피드백을 보내보면 어떨까. 실명을 불러 “당신의 이 보도에는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할 때, 기자는 가장 빠르게 배울 지 모른다.

오유정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은 지역 연구기관 역시 ‘지역의 미디어’라는 사실을 환기했다. 기록·연구·해석이 모두 도민의 안부를 향해야 하며, 그 안에서야 비로소 인권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윤희각 부산외대 교수는 포털 중심의 뉴스 유통 구조가 자극적 제목을 양산하고, 결과적으로 인권 감수성을 갉아먹는 구조적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인권 감수성 지표가 포털에 도입된다면 언론 문화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며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신효은 JIBS 기자는 생활의 아주 작은 틈새를 포착한 기사 한 줄이 행정의 대응을 바꾼 경험을 공유했다. “재난의 시대일수록 사람들의 미세한 온도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이날의 논의를 환기할 질문이 하나 나왔다.

“지역 언론이 지역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바꿨다면, 중앙 언론의 지역 인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전국이 제주를 말할 때, ‘일부’의 일탈이 ‘전부’로 비쳐질 때가 있다. 특히 관광지인 제주 특성상 특정 축제나 식당에서 발생한 ‘바가지’ 논란은 제주 전체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곤 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제주에서 시작된 감수성이 국민의 시선을 바꿀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지역의 시선이 중앙의 시선을 흔들 수도 있다는 희망, 그리고 최소한 제주 언론인이라면 그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 기후, 경제, 사회 속 각종 논란… 언론은 늘 사건을 다뤄왔고, 그 과정에서 세상은 점점 ‘재난의 시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재난’의 실체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세상은 정말 그렇게 척박한 곳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뉴스는 사건으로 도배된다. 

이런 시대 속에서 언론이 다시 ‘사람의 안부’를 되찾을 수 있을까. 속보 경쟁과 수치의 언어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쥘 수 있을까.

‘숫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누구의 고통을 먼저 포착할 것인가’, ‘지역의 감수성을 전국의 기준으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세미나는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내리진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원칙만은 또렷이 제시했다.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일, 그 단순하고 오래된 윤리가 결국 언론의 품격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11월 21일 금요일 제주인권센터에서 열린 제주학-언론학 교류 세미나 참석자들. (사진=미디어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