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향한 녹색 쾌락주의자

[송미아의 독서평론] -임종길 작가의 그림일기 『오늘은 뭐 했지?』

2025-09-29     송미아

1. 봄빛으로 적어낸 생명의 일기
2. 모든 생명의 권리 존중
3. 생명의 환원으로 이어지는 기록
4. 평화를 향한 시대 읽기

그는 늘 녹색을 바라본다. 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임종길 작가. 꽃 한 송이와 나무 한 그루, 작은 연못의 물결과 그 곁을 찾아든 제비 두 마리까지 모든 생명은 녹색의 길 위에 놓여 있다.

≪오늘은 뭐 했지?≫의 글과 그림은 맑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작은 화면에 담긴 수채 세밀화는 섬세하면서도 온기를 머금은 선으로 독자의 마음에 닿는다. 따스한 필체와 절제된 색채감이 더해져 그림일기는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 안에는 정원에서 묻어난 땀방울과 계절을 응시한 눈길이 고요히 배어 있다.

‘녹색손’이라는 닉네임처럼 나무와 꽃의 정원, 화실과 연못, 그리고 그가 펼치는 녹색운동은 모두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그의 기록은 자기 정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주의 숲과 들, 생활사의 풍경과 시대의 문화까지 품어내어 삶의 지평을 넓힌다. 그 길은 결국 인간과 자연이 함께 걷는 평화의 길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이라는 낱말을 ‘평화’로 바꿔쓴다.

이렇듯 임종길 작가가 2년 동안 정리한 글과 그림 200여 편의 그림일기는 일상의 기록을 넘어 생태적 사유를 일깨운다. 독자들은 이 한 권 속에서 개인의 삶을 넘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태적 삶의 방식과 시대적 환경윤리를 함께 감지하게 된다. 생태학이 말하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일상의 관찰과 삶을 그림일기로 이어가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의 접점을 지켜내는 실천적 의미의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1. 봄빛으로 적어낸 생명의 일기

임종길 작가의 그림일기에는 봄의 왈츠가 흐른다. 잎맥 하나에 번지는 연둣빛, 얼음을 뚫고 피어나는 작은 꽃송이, 산등성이를 따라 퍼져나가는 초록의 물결은 요한스트라하우스가 연주하는 첫 음표들이다. 그래서 임종길 작가는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며, 삶의 기록자가 된다.

① 봄 단풍의 왈츠 ― 이름을 부른다는 것

봄빛으로 물든 산의 수채화는 울긋불긋한 색감에서 짙은 녹색까지 결을 겹겹이 품어낸다. 마치 악보 위에 번지는 선율처럼 화면을 감싼다. 붓끝이 스며든 자국은 번짐과 겹침 속에서 산이 살아 숨 쉬는 리듬을 전한다. 무엇보다 시의 필체 위에 곁들여진 작은 산의 모습은 오히려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단출한 능선이 남긴 여백은 시선을 넓혀 주고, 독자는 그 빈자리 에 봄단풍의 다채로운 빛을 떠올리며 긴 여운을 붙잡게 된다.

 

이와 어우러진 시 <봄 단풍>은 봄의 색을 단풍에 대입하며 계절의 역설을 왈츠처럼 노래한다. 나무마다 다른 색을 품어내는 봄의 풍경은 시인의 언어 속에서 참나무, 감나무, 졸참나무 같은 고유한 이름으로 쪼르르 불려 나온다. 그것은 마치 봄이 되면 잊지 않고 불러야 할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일과도 같다.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자, 자연을 하나의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생명으로 마주하는 길이 된다. 그렇게 불린 나무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관계 속의 주체가 된다. 결국 임종길 작가가 노래하는 봄은 삶과 자연이 함께 추는 왈츠로 화사한 합창처럼 독자의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② 향기의 시학 ― 이래도 꽃향기에 무심할래?

봄이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봄의 냄새와 빛깔, 감촉을 혼자만 품기에는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차장 옆 라일락 꽃을 보며 떠올린 詩를 ‘짧은 글’이라 불렀다. 그러나 필자에게 봄꽃의 향기가 전해 준 이 짧은 글은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이래도 꽃향기에 무심할래?”라는 물음은 가슴 깊이 스며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심상의 잔향으로 남는다. 만약 제목을 붙인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이 문장을 택할 것이다.

그림일기 속 짧은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어느새 독자의 마음과 포개진다. 이 시의 숨결은 눈으로 보는 빛이 아니라 코끝을 스쳐가는 향기에서 시작된다. 산수유의 맑은 향기와 조팝나무, 배꽃의 번짐 속에서 봄이 열리고 라일락과 목련, 산딸나무와 인동꽃이 차례로 이어지며 계절은 무르익는다. 향기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뚜렷하다. 목련이 뚝뚝 떨어지고 인동꽃 향기가 지쳐 스러질 즈음 우리는 생의 덧없음을 맡으며 지나온 시간을 다시 떠올린다.

마지막 물음 “이래도 꽃향기에 무심할래?”는 따스한 일깨움으로 다가온다. 향기를 맡는 일은 스쳐가는 순간 속에서 삶의 깊이를 자각하는 일이다. 꿀벌만이 알아본다는 회양목의 향기처럼, 꽃과 곤충과 사람은 서로를 불러내며 이어진다. 향기는 보이지 않는 다리로 인간과 자연을 묶는 은밀한 고백이 아닐까.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향기처럼 하루 또한 덧없지만, 그 흔적이 모여 계절이 되고 생이 된다.

③ 봄의 주인공-나무들의 합창

봄 한가운데 서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내일까, 임종길 작가일까. 삽과 잎사귀를 든 작은 인물 속에서 우리는 작가와 동시에 그의 곁을 지켜온 아내를 본다. 아마도 그 둘이 하나로 합쳐져, 봄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서 있는 존재일 것이다. 빽빽이 적힌 나무의 이름들이 합창처럼 울려 퍼지는 순간, 그 주인공은 더 이상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삶 그 자체가 된다. 무엇보다 여기 적힌 나무들은 손수 심고 가꾸며 살아온 생명의 발자취라는 점에서 살아 있는 기록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한 장의 그림과 글은 봄의 울림, 나아가 생명의 울림으로 번져나간다. 씨앗 하나,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된 시간이 숲으로 확장되듯 그의 삶 또한 자연과 더불어 깊어져 왔다. 그래서 이 장면은 개인의 소박한 취향을 넘어 환경을 존중하고 자연과 공존하려는 철학의 표징이 된다. 독자는 임종길 작가의 손끝에서 흙내와 봄빛이 퍼져 나가는 것을 감지하며 생태적 삶의 울림이 곧 인간다운 삶의 본질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④ 담연(澹然)한 하루의 기록-잔소리와 고등어 반찬

아침에 잔소리를 듣고 집을 나선 임종길 작가. 편치 않는 발걸음은 절물휴양림으로 향했다. 복수초와 오름이 어우러진 길을 걸으며 그는 스스로에게 여백의 시간을 선물한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구워낸 고등어 반찬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소박한 기록 속에서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담연(澹然)하다. 왜 잔소리를 들었는지, 어떻게 마음을 가다듬었는지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을 우리는 이미 짐작할 수 있다

글씨와 그림 속 복수초와 바람꽃은 막 얼음을 뚫고 나온 듯 또렷하다. 선명한 노란빛의 복수초와 그 아래 소박한 흰색의 변산바람꽃이 나란히 놓여 봄의 첫 울림을 전한다. 땅 위에 번진 연둣빛은 긴 겨울을 밀어내며 새 계절의 문턱이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위로 펼쳐진 산줄기에는 하나하나 이름이 적혀 있어 살아 있는 제주의 오름들이 저마다의 존재를 드러내는 듯하다. 이 한 장면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걷는 숨결과 자연의 결을 고스란히 담아낸 산책길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녔다.

글 속에서 작가는 천문대를 지나며 오름과 능선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것은 생명과 연결된 고유한 호명이었다. 길의 끝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내와 함께 나눈 고등어 구이 한 점, 소박한 저녁상이었다. 복수초의 따스한 노란빛과 고등어의 맛, 그리고 나란히 앉아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며, 이 글과 그림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더불어 물드는 서정을 전한다.
 

2. 모든 생명의 권리 존중

스쳐 지나칠 법한 작은 생명이 눈앞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와 연결된 자신을 발견한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의 눈길이 머물러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은근히 일러준다. 생태적 시선은 바로 이런 데서 출발한다. 인간의 관점에 종속되지 않고, 작은 생명 하나에도 고유한 가치와 목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이는 생태학과 환경운동가들이 오래도록 강조해 온 ‘모든 생명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사유와 맞닿아 있다. 벽 모퉁이의 무당벌레, 돌틈에 깔린 도롱뇽 한 마리가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유는 그 존재 자체가 생태계의 순환을 이어가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임종길 작가의 그림과 글은 이 작은 것들을 눈여겨보게 한다.

① 돌을 덮는 손길 ― 도롱뇽의 비밀

돌 밑에서 마주친 도롱뇽. 그 생명은 마치 땅속의 비밀처럼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감국 뿌리 사이에서 그 생명을 본 순간, 놀람과 동시에 돌을 다시 내려놓는 손길은 본능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멸종위기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작은 생명을 그 자리 그대로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의 반사였다. 그 짧은 순간은 생태학에서 말하는 지표종의 진실을 전한다. 도롱뇽 한 마리를 마주했다는 것은, 그가 몸담은 숲과 물과 흙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도롱뇽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인터넷 신문<제주의 소리>에 도롱뇽 관찰일기를 연재하며 멸종위기종 보호에 앞장섰던 故 고봉선 시인의 고성리 현장이다. 그는 도롱뇽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물줄기와 숲을 기록했고, 그 목소리는 결국 환경부의 보호 표지판을 세우는 데까지 이끌어냈다. 한 시인의 꾸준한 관찰과 기록이 생명을 살리고, 한 지역의 환경을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만난 작은 도롱뇽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이어진 생명의 증언처럼 다가왔다.

그림 속 도롱뇽은 짙은 청록빛으로 살아 있으며 뿌리와 흙의 망 속에 품에 안기듯 자리한다. 돌 하나를 다시 덮어 주는 선택이 생태계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되듯, 일기의 서술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의 자리를 지켜 줄 때 비로소 생명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잔잔히 전한다.

② 작은 연못의 합창-놀러오는 손님

개인의 집에 연못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데, 여기에는 그의 오랜 시간이 깃들어 있다. 장기간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학교에 꽃과 나무를 가꾸고 연못을 만들던 경험이 고스란히 이어져, 지금 그의 집 연못은 물빛과 풀잎, 곤충과 새가 어우러진 하나의 생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손끝으로 그려낸 스케치와 곁들여진 기록은 자연이 품은 질서와 순환을 바라보는 사유의 흔적이다. 물을 채우고 풀을 심고 꽃을 기다리며 이어지는 글의 호흡에는 생명을 돌보려는 마음이 잔잔히 배어 있다.

연못에 찾아든 곤충과 새들, 물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은 그 자체로 생태의 교향곡을 이루며, 기록자는 그 앞에서 겸허히 배운다. 이 그림일기는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손길을 나누는 동행의 자리를 일깨워준다. 작은 것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생태적 삶의 깊이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드러난다.

엊그제 내린 비바람이 연못에 물을 가득 채워 주었다. 지인에게 얻어온 수련 한 뿌리를 심고, 물가에는 꽃창포와 부처꽃을 심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온다. 박새, 참새, 직박구리, 동박새, 그리고 뜻밖에도 제비까지 날아들었다. 작은 연못이 이렇게 금세 생명으로 가득 차다니, 그 풍경이 그저 아름답다.

③ 제비 둥지의 완성- 평화의 기쁨

연못에 물이 고이고 풀과 벌레가 찾아들며 작은 생태계가 형성되듯, 제비 또한 그 생태계의 일부로서 집을 짓고 삶을 이어간다. 이는 생태학적 시선에서 말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 곧 한 존재의 터전이 다른 존재의 삶을 품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만든 연못이 제비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는 제비 둥지를 발견하는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장면은 기쁨의 발현일 뿐 아니라, 작은 새의 생태를 몸소 함께하는 몸의 반응이라 본다. 그는 제비의 존재와 관계 맺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깊게 느낀다. 연못과 새들이 들려주는 울림과 함께 삶을 길어 올리는 기쁨을 누린다. 그가 말하는 평화의 상태일 것 같다.
 

3. 생명의 환원으로 이어지는 기록

불현 듯, 노벨문학상 수상작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의 삶을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탄생과 죽음을 거대한 원의 두 지점처럼 보여준다. 욘 포세에게 아침은 단순한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이 세상에 들어서는 문턱이며, 저녁은 끝남이 아니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환원(還元)의 순간이다.

그의 언어는 절제되고 반복적이며, 그 리듬 속에서 삶은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되풀이되는 원의 흐름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태어나고, 살고, 죽지만, 그 모든 과정은 개별적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숨결 속에 연결되어 있다. ≪아침 그리고 저녁≫은 바로 이 존재의 연속성을 관조하는 시적 기록이다. 임종길 작가의 그림과 글 또한 이 상징성과 맞닿아 있다. 무의 스케치에서 아침을 읽고, 동물의 뼈에서 저녁을 읽는 일은, 결국 인간의 삶 역시 자연의 질서 속에서 순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땅속의 힘에서 솟아오른 무가 빛을 향해 나아가듯, 인간 또한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삶의 에너지를 받아 태어난다. 그리고 저녁에 이르면, 남은 흔적은 다시 자연으로 흡수된다.

① 아침의 신비 ― 무에서 배운 탄생의 울림

임종길 작가의 일기 속 무 한 덩어리도 이와 닮아 있다. 무 아랫부분은 흙에 조금 묻혀 있을 뿐이고, 잔뿌리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묻는다. “어떻게 이렇게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그 생명이 자라기까지는 무수한 존재들의 보살핌이 분명히 있었다. 주변의 기운과 보이지 않는 영양분이 스며들어 무가 무럭무럭 자라난 것처럼 말이다.

탄생의 기쁨은 요란하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묘사된 탄생의 순간은 길고도 적나라했지만, 그만큼 깊은 감동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또렷이 울리는 그 장면은 한 생명이 세상에 오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엄마 뱃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통이 있었을까. 또 얼마나 간절한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지인들의 기도가 이어졌을까. 한 생명의 탄생은 수많은 기도와 노력이 모여 이루어진 결실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임종길 작가는 무 한 덩어리를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던진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단순한 뿌리채소일 뿐이지만, 그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생명 활동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뿌리의 호흡, 흙속의 미생물, 햇빛과 물과 바람이 함께 얽혀 그 생명을 키워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를 잊고 산다. 어쩌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지구를 위기에 빠뜨리는 원인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일기는 여운을 남긴다. 아침의 신비, 탄생의 신비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함께 평화의 상태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잔잔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② 저녁의 환원-자연의 귀결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빼꼼히 이어진 손글씨의 나열은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온기를 품어, 독자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죽음을 차분히 바라보게 한다. 의식의 흐름을 닮은 이 시각적 장치는 삶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귀결을 드러낸다. 화면에 나타난 동물의 뼈는 세월이 남긴 종착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것은 섬뜩하기보다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한 세상을 잘 살아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 곧 환원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아침이 탄생과 꿈의 자리라면 저녁은 그 꿈의 소멸과 동시에 자연의 품으로 스며드는 순간이다. 임종길 작가의 그림일기는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생명의 또 다른 변주로 바라본다. 삶의 끝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시 자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기의 빼곡한 나열과 반복되는 문장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리듬을 만든다. 의식의 흐름처럼 자유롭게 이어지는 언어는 구조적 정돈보다 무의식의 결을 드러낸다. 뼈와 살이 사라지고 남은 흔적 위에 겹쳐진 기록은 개인적 경험을 넘어 보편적 생명의 궤적을 그려낸다. 결국 이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저녁을 통해 자연의 영원성과 문학적 언어의 깊이를 연결하는 상징적 기록으로 완성된다.
 

4. 평화를 향한 시대 읽기

① 진짜 수업을 향한 갈망 ― 교육의 창을 열다

학생 편지는 참 진솔하다. 거침없이 선생님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이 묻어 있다. “주인을 닮은 종”이라는 비유는 번지르르한 겉모습 뒤에 숨어 있는 공허함을 꼬집으며, 선생님의 태도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학생의 응어리는 무엇일까. 겉으로는 선생님을 향한 날 선 말이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답답함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막막함을 종소리와 임종길 선생님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옮겨 놓았을지도 모른다.

학생의 글에서 그 속내를 다 읽어낼 수는 없다. 오히려 분명히 알 수 없는 그 여백이 흥미롭다. 혹시 학생은 선생님과 친밀한 관계이기에 이렇게 거침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종이라는 비유를 빌려 쓴 글과, 그것을 받아 다시금 뜨끔했던 마음을 일기에 담아낸 임종길 작가의 기록은, 일상 속에서 오가는 솔직한 말과 그 말이 남기는 여운을 잘 보여준다.

필자는 이 글 속에서 ‘입시미술 같은 틀에 갇힌 수업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의 미술세계를 아이들에게 펼쳐 보이려 했던 임종길 선생님’을 본다. 학생은 그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선생님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친 말투 속에는 ‘진짜 미술 수업’을 향한 갈망이 배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그 갈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내적 갈등이 표면으로 터져 나온 것일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교육 제도는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감당하기 힘든 프레임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입시만을 위한 수업은 이제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이들을 입시의 틀에 가둔다면, 그것은 곧 그들의 가능성을 스스로 잃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열어 주고, 사고의 시야를 넓혀 주는 소중한 창이 되기를 바란다.

② 공부는 칼이었다 — 배움과 폭력의 이중성

칼은 뜨끔하다. 무엇이 그토록 칼을 그려 내야 했을까. 그렇다. 지난 겨울 이후 우리는 균열된 시대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쩌면 이 그림일기는 시대가 개인에게 들이민 폭력의 형상처럼 다가온다. 공부는 본래 자기 성찰과 성장을 위한 길이어야 했다. 그러나 경쟁과 강요 속에서 행해진 공부는 진정한 배움이 아니라 서열과 성적의 틀에 갇혀 버렸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주체적 의지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주어진 규칙에 순응하는 존재로 길러졌다. 배움은 내면을 단단히 세우는 힘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억압과 좌절로 변질되었다.

임종길 작가의 말처럼 공부가 타인의 불행을 자초하는 순간, 교육은 본질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는 칼이 된다. 실천적 성찰이 결여된 공부는 끝내 무력하다. 이 일기의 시선은 바로 그 모순을 직시한 흔적이며, 우리에게 “어떤 공부가 삶을 살리는 공부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던진다.

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은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고 진정한 앎에 다가설 때 비로소 지혜가 된다. 스스로 성찰하며 공동체와 더불어 쓰일 때, 지식은 누군가를 살리고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식을 쌓았음에도 사익을 좇거나 권력과 결탁해 사회의 균형을 무너뜨린 이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지식은 날 선 칼날처럼 사람을 해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그 지식을 바탕으로 성찰과 연대를 실천하며 공동체를 지탱해 왔다. 피 묻은 칼끝은 이러한 양가적 현실 속에서 사회적 프레임 뒤에 감춰진 상처를 드러내며, 시대가 요구한 성공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웅변한다.

③ 붉은 지구 ― 책임의 일기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게 달아오른 지구다. 푸른 빛을 잃은 행성은 마치 화성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으며, 표면 곳곳에는 갈라진 대륙과 검게 타버린 숲이 드러나 있다. 마른 강줄기와 앙상한 나무들, 황폐해진 땅은 생명의 숨결을 잃은 듯 보인다. 위로는 태양빛이 강렬히 내리쬐며, 회복할 틈도 없이 지구 전체를 불덩이로 만든다. 그림 속 고래 한 마리는 물을 잃은 듯 허공에 남겨져 있다. 바다의 상징인 고래는 생명의 환영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사라져가는 생태계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이 붉은 구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동식물의 흔적과 붉은 빛은 기후 위기의 현실을 날카롭게 증언한다. 그것은 경고이자 절규이며, 우리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일기에서 “정작 개선할 힘이 있는 자들은 나쁜 상황을 알면서도 느긋하다”고 적었다. 이는 권력과 자원을 쥔 이들의 무심한 태도를 고발하는 동시에, 기후위기의 무게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먼저 더 깊게 드리운다는 불평등의 진실을 드러낸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저소득층은 극심한 폭염을 겪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고, 상위 계층은 훨씬 낮다. 같은 재난이라도 계층에 따라 체감하는 강도와 피해 규모는 달라진다. 방글라데시와 같은 기후 취약국에서는 해수면 상승과 홍수로 가장 가난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먼저 잃고 있으며, 선진국보다 훨씬 큰 타격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기후위기는 모두에게 닥치지만, 그 불평등한 그림자는 사회적 약자와 취약국가의 삶을 가장 먼저 짓누른다. 임종길 작가의 그림과 일기는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붉은 지구는 경고의 이미지이자 우리가 반드시 응답해야 할 책임의 일기이다.
 

녹색 손길로 적어낸 평화의 일기

정감 속의 울림이랄까. 그림일기는 참 진솔했다. 가벼운 듯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독자 감상의 해설도 가능할 것이다. 필자 또한 그림에 취해, 또 한 문장에 취해 나름의 주관적 해설을 덧붙였음을 고백한다. 일기를 일기장 속에만 보관하면 개인의 기록에 머무르겠지만, 세상으로 던져질 때 그것은 문학작품으로 날개를 단다. 특히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임종길 작가의 일기 안에서 마주하는 울림과 성찰의 지점들 앞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수밖에 없다.

임종길 작가의 그림일기 ≪오늘은 뭐 했지?≫는 일상 속에서 시대와 생명의 숨결을 함께 품어낸 생태적 사유의 집이다. 봄빛으로 적어낸 생명의 기록에서 시작해 작은 도롱뇽과 연못, 제비 둥지의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작은 것에서 비롯된 울림이 어떻게 평화의 지평으로 확장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한 송이 꽃, 한 그루 나무, 작은 물웅덩이에 저마다의 이름을 붙이고 불러주며 관계 맺기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아울러 그의 그림일기가 특별한 이유는 독자들에게 성찰의 몫을 남긴다는 점이다. ‘아침과 저녁’이라는 생명의 원에서 드러나듯, 탄생과 죽음을 모두 자연의 순환 속에 놓아 본다는 통찰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무 한 덩어리에서 배운 생명의 신비, 뼈와 흔적으로 남은 저녁의 귀결은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자연과 분리되지 않음을 일깨운다. 생은 찰나적 기쁨의 연속이 아니라, 관계와 순환 속에서 이어지는 평화로운 흐름임을 관조하게 한다.

그는 또한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붉게 타오르는 지구의 그림은 기후위기의 불평등한 무게를 정면으로 드러내고, 공부를 칼에 비유한 기록은 교육 제도가 안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되묻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날카로운 문제의식마저 결국은 “평화를 위한 길”로 모아진다. 생명을 존중하는 감수성과 제도를 넘어서는 교육의 가능성, 그리고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기후 책임은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임종길 작가는 충북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며, 교육과 예술, 환경운동을 함께 실천해왔다. ‘녹색손’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배움터 ‘도토리 교실’을 운영하며 생명 존중의 가치를 나누었고, ≪두꺼비 논 이야기≫를 집필했으며 ≪콩알 하나에 무엇이 들었을까?≫,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 등에 그림을 그리며 어린이와 자연을 잇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은 뭐 했지?≫의 그림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교사이자 예술가, 환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오늘은 뭐 했지?≫는 자연과 인간, 개인과 사회, 예술과 삶을 연결하는 ‘녹색손’의 기록이다. 작가가 말하는 ‘소소한 쾌락주의자’의 태도는 순간의 향락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생태적 삶의 방식이다. 그의 일기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공부란 무엇인지, 평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물음의 끝에서 남는 답은 분명하다. 평화를 향한 녹색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