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광장이 되다" 책으로 이어진 세대와 문화
9월 28일, 한라도서관 ‘2025 책문화동아리 축제’ 개최 아이의 놀 권리, 영어 전래동화, 시니어 구연... 다양한 행사 책으로 세대 잇고, 문화 나눈 잔디마당 "도서관, 광장이 되다"
[미디어제주 = 김은애 기자]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아이들 웃음이 뒤엉킨다.
한쪽에서는 그림책 속 이야기를 영어로 옮겨 읽는 목소리가 들리고, 다른 쪽에서는 엄마들의 진지한 대화가 이어진다.
9월 28일 일요일, 한라도서관 앞 잔디광장의 풍경이다.
이날 도서관은 조용한 공부방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대와 고민이 만나 부딪히는 광장이었다.
‘2025 책문화동아리 축제’가 제주시 한라도서관 잔디마당에서 열린 날이다. 도내 독서동아리와 시민단체, 청소년 기자단, 지역 어르신들 등이 모여 책을 매개로 다양한 목소리를 나누는 자리. 그중 몇 개의 부스를 <미디어제주>가 만났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아이들이 행복해야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주모임
세 살을 지켜줘.
잔디밭 한가운데 걸린 파란 현수막의 문구는 단호했다. 영유아의 과도한 조기 사교육을 막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권리를 지켜내자는 외침이었다.
이 현수막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주모임’에서 마련했다. 이들의 부스 한편에서는 '영유아 영어학원 방지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도 진행됐다. 모아진 서명은 국회에 제출된다.
행사장에서 만난 관계자는 “영유아의 건강한 성장은 사회가 지켜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부모들의 불안을 이용해 사교육이 과열되는 현실을 법과 제도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직접 꿈을 적어 ‘미래 학교 상상 나무’에 매달아보는 체험도 있었다. 아이들이 직접 원하는 학교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를 적어 나무에 매달아보는 활동인데, 결과가 흥미롭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학교"를 원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상상할 때 공부는 더 즐거워져요. 오늘은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현장 관계자의 말에 현장을 찾은 부모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늘 ‘열심히 해라’는 말만 했는데, 오늘은 아이가 적은 꿈을 보며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다 왕 그림책 문화에 퐁당!”
-호꼼슬로작은도서관, 호꼼슬로 청소년 기자단
호꼼슬로작은도서관과 호꼼슬로 청소년 기자단이 함께 운영한 부스 ‘다 왕 그림책 문화에 퐁당!’에서는 아이들이 전래동화를 영어로 듣고, 직접 질문을 만들어 활동을 이어가는 체험이 펼쳐졌다.
그림책에 대한 아이디어는 아이들이 직접 냈다. 그림도 직접 그렸다. 아이들의 제안에 어른들이 화답하니, 근사한 영어-한국어 전래동화 그림책이 탄생했다. 책에는 8개의 전래동화가 실려 있고, 동화와 관련해 아이의 시선에서 맞춘 질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질문 또한 아이들이 직접 썼단다.
이날 체험 진행을 맡은 허윤진(제주대학교 생활환경복지학부) 강사는 “아이들이 만든 질문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하니, 단순한 영어 공부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다문화 가정과 관련된 고민도 들을 수 있었다. 호꼼슬로작은도서관 한주현 대표에 따르면, 문해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걱정하는 다문화 가정 부모가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문해력을 위한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열심히 할까요? 문해력은 '공부'가 아닌, '책'으로 보다 재미있고 쉽게 기를 수 있어요. 전래동화를 영어로 접하고, 다시 한국어로 요약해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언어를 잇게 돼요. 집에서도 부모와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죠.” -한주현 대표
현장 아이들의 반응은 활발했다. 한 아이는 인상 깊은 장면을 그림으로 옮겨 담았고, 다른 아이는 “주인공이 왜 그렇게 했는지 궁금하다”며 스스로 만든 질문을 내밀었다. 허 강사는 “이런 작은 질문들이 모여 아이들의 사고력이 자라난다”며 웃음을 보인다.
“어르신이 들려주는 제주어 동화”
-한라도서관 제주어 읽어주는 어르신
잔디마당 끝자락에서는 ‘어르신이 들려주는 제주어 이야기 동화구연 체험’ 부스가 마련됐다. 네 명의 시니어 이야기할머니들이 무대에 올라, 한라미술관에서 배우고 익힌 구연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자리다.
이들은 한라도서관에서 수 년째 제주어 구연동화를 연습하고, 연구해 왔다. 이에 '한라도서관 제주어 읽어주는 어르신'이라는 단체명으로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이날 만난 제주어 읽어주는 어르신, 정애숙 강사는 그림책과 캐릭터 모형을 활용해 이야기를 펼쳤다. 캐릭터 모형이 등장하니,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구조다. 종을 치며 노래도 부른다. 질문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도 묻는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이 책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저도 같이 들어갑니다. 그게 제겐 큰 기쁨이고, 또 제 삶을 채워주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한라도서관 제주어 읽어주는 어르신' 동아리는 꾸준히 새로운 그림책을 직접 제작하고 있다. 캐릭터 모형 소품도 직접 준비한다. 맞이할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구연 방식을 바꿔가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에 정 강사는 “이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훨씬 외로웠을 것”이라며, 어르신으로서 존중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도서관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
아이들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외침,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배우는 수업, 어르신이 전해준 제주어 동화, 전래동화를 영어와 한국어로 읽어보는 시간. 각기 다른 활동들은 책을 매개로 세대와 세대, 문화와 문화를 잇고 있었다.
이날 한라도서관은 단순한 독서 공간이 아니었다. 어린이와 학부모, 청소년과 시니어가 함께 만나고 연결되는 하나의 광장이었다.
책은 종이 속에 머문 단순한 활자가 아니다. 세대와 세대, 문화와 문화를 잇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이 오늘의 행사를 넘어, 구체적인 현실로 발현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