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 페이스’의 위대함과 강렬한 포스

[스포츠와 세상] 삼성 ‘돌부처’ 오승환, 역대 3번째 은퇴투어로 21년 현역 마무리 돌입

2025-08-28     허지훈

사람이 일관되게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다양하게 맺어지는 관계나 상황 등에 따라 형성되는 감정과 표정이 제각각이다. 아무리 좋고 나쁨을 떠나 감정과 표정의 ‘포커 페이스’는 말이 쉽지 상당한 난제와도 같다. 이 말은 즉슨, ‘포커 페이스’ 유지가 사람 성향, 특성과 무조건적으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지표다. 특히 사람이 코너에 몰릴수록 더 심화된다. 우선 초조함, 불안감 등이 극도로 밀려온다. 감정과 표정으로 묻어나는 나머지 심리적인 부분이 크게 흔들린다. 강박관념에 의해 정작 가진 탈랜트나 특색을 표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즐비하다. ‘포커 페이스’ 유지의 어려움을 절로 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포커 페이스’의 유지는 위대하다. 어떠한 돌발상황이 닥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포커 페이스’야말로 개인에게 큰 무기이자 핀치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름길로 자리한다. KBO리그 대표 클로저로 맹위를 떨친 ‘돌부처’ 오승환(43. 삼성 라이온즈)의 ‘포커 페이스’는 클로저 포지션에서 개인의 위대함을 절로 입증시킨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땅에 많은 이들에게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요소가 공통적으로 내재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돌발상황이다. 개인의 신분, 지위, 환경, 관계 형성 등은 물론, 집단 간 비즈니스 관계, 일상 생활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늘 돌발상황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닌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닥쳐오는 돌발상황은 사람과 집단 할 것 없이 심리적으로 갈팡질팡하고 허둥지둥대기 일쑤다.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와 인지가 아무리 철저하다고 한들 돌발상황 발생 시 안절부절 못하는 레퍼토리가 도미노처럼 번지는 일들도 허다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포커 페이스’다. ‘포커 페이스’의 유지는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그도 그럴것이 추구하는 방향과 로드맵 속에서 온갖 돌발상황은 숙명이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다른 난제가 기다리는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거센 파도를 필히 지나야 다음 루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는 한 걸음 더 밟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포커 페이스’를 잃지 않고 뚜벅뚜벅 단계를 잘 거치고 안 거치고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만큼 ‘포커 페이스’가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양궁, 사격 등 기록 종목과 함께 야구는 ‘포커 페이스’의 중요성이 큰 종목 중 하나다. 27개 아웃카운트를 처리해야 종료되는 종목의 특성에 정규이닝 동안 언제 어떠한 돌발상황이 불청객처럼 찾아올지 모르는 묘미가 팀과 선수 개인을 웃고 울리게 한다. 돌발상황과 함께 승패가 급격히 요동치는 것은 예삿일이다. ‘포커 페이스’를 잃지 않고 집중력을 최대치로 쥐어짜내면서 돌발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로 이어지는 단계가 팀과 선수 개인의 한 해 농사와 중-장기적인 방향성, 로드맵 등에서도 필수적으로 대두되는 바이다. 여러 포지션 중 클로저 포지션는 유독 ‘포커 페이스’가 강조되는 자리다. 공 한 개가 팀의 운명을 쥐고 있는 책임감이 막중하다. 마운드 위에서 핀치 상황을 끝내야되는 중압감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실제로 클로저가 ‘포커 페이스’를 잃고 흔들릴 때 경기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은 물론, 야수들과 팀 전체에 크나큰 데미지를 입히게 한다. 클로저의 블론세이브와 패배는 팀 계산 마저 송두리째 바꾸게 만든다. 그만큼 후유증과 후폭풍이 크다. 클로저 포지션이 고독 그 자체라는 이유다.

프로 입문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존재했다. 그러나 KBO리그 대표 클로저로 거듭나는 과정과 열정, 노력 등은 클로저의 위대함을 절로 깨우기에 충분했다. 44년의 KBO리그 역사에서 숱한 클로저들이 팀 승리 지키기와 성과 쟁취에 상당한 공헌을 세웠지만, KBO리그 역대 최고의 클로저를 논할 때 오승환의 이름을 빼놓고 얘기하기 어려운 이유다. 경기고(서울)-단국대를 거쳐 2005년 삼성에 입단한 오승환이지만, 프로 입문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고교 3학년이던 2000년 경기고의 개교 100주년을 맞아 팀의 황금사자기 챔피언, 대통령배 준우승 달성에 힘을 보태며 나름 시장성을 뽐냈다.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 빼어난 방망이를 자랑하며 이동현과 함께 팀의 코어를 지탱했다. 그럼에도 스포트라이트는 동기인 이동현(現 SPOTV 해설위원)에 집중됐다. 당시 청소년대표를 지내면서 초고교급 투수로 군림한 이동현의 위세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짭짤한 팀 공헌도에도 스포트라이트와 거리가 있었다. 단국대 입학 후 허리와 팔꿈치 부상으로 긴 재활을 거치면서 마음고생도 적지않았다. 투수로 본격적인 툴이 고정된 상황에 투수에게 생명과도 같은 두 부위의 부상은 재기의 날갯짓을 가로막는 요소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오승환은 묵묵히 땀방울을 쏟아내며 칼날을 다듬었다. 대학 4학년이던 2004년 팀의 춘-추계리그 챔피언에 앞장서며 주가를 높였다. 긴 재활을 딛고 빼어난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게 레이더망에 포착되는 밀알이 됐다. 2005년 삼성에 2차 1라운드로 부름을 받으면서 프로 커리어를 열었다.

프로 입단과 함께 오승환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데뷔 첫 시즌인 2005년 묵직한 구위와 위력적인 직구로 팀의 주요 셋업맨으로 중용되더니 시즌 중반 클로저로 전향해 두자릿수 세이브를 달성하며 KBO리그 최초로 단일 시즌 두자릿수 승수-세이브-홀드(10승-16세이브-11홀드)를 달성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팀의 챔피언 타이틀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것은 물론, 생애 단 한 번 뿐인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며 휘황찬란한 커리어 수집의 초석을 닦았다. 2년차인 2006년부터 바야흐로 오승환의 시대였다. 2006년 ‘2년차 징크스’가 무색하게 아시아 한 시즌 최다 세이브 신기록인 47세이브를 세우며 생애 첫 구원왕 타이틀을 움켜쥐었다. 2년 연속 삼성의 한국시리즈 챔피언 등극에 앞장섰다. 2007년에는 KBO리그 최초로 2년 연속 40세이브를 달성하며 삼성을 넘어 KBO리그 대표 클로저로서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다. 삼성의 ‘지키는 야구’를 지탱하는 한 축으로서 뒷단속을 확실하게 가져간 오승환의 아우라는 강렬하다 못해 어마무시했다.

2008년 39세이브를 기록한 이후 팔꿈치와 어깨 수술 여파로 잠시 주춤했어도 오승환의 클래스는 어디가지 않았다. 2010년대 초반 삼성 ‘왕조’ 건설에 앞장서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1년 또 한 번 단일 시즌 아시아 최다 세이브 타이인 47세이브를 달성하면서 평균자책점 0.63으로 난공불락의 위엄을 뽐냈다. 이후 2012년 37세이브, 2013년 28세이브로 삼성의 3년 연속 통합 챔피언을 이끌며 다섯 손가락에 챔피언 반지를 모두 끼는 영예를 안았다. 2013년 종료 직후 FA 자격을 얻고 일본프로야구 대표 명문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한 오승환은 2년 연속 닛폰시리즈 준우승의 아쉬움에도 센트럴리그 2년 연속 구원왕에 오르며 오사카(한신의 연고지) 땅에서 한국인의 기개를 멋지게 펼쳤다. 한국과 일본에 이어 야구 본토인 미국 메이저리그로 건너간 오승환은 세인트루이스(2016~2017), 토론토(2018), 콜로라도(2018~2019)를 거치면서 셋엇맨과 클로저를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며 전천후의 면모를 과시했다. 한-미-일을 거치면서 특유의 ‘돌직구’와 함께 가미된 변화구가 위력을 더 배가시키며 경험치와 내공 등을 더욱 충전했다.

6년간 해외 생활을 뒤로 하고 2020년 삼성으로 유턴한 오승환은 KBO리그 유턴과 함께 노익장을 과시했다. 2020년 시즌 중도에 합류해 18세이브를 기록하며 달라진 KBO리그 환경의 적응력을 입힌 오승환은 2021년 44세이브, 2022년 31세이브, 2023년 30세이브를 차례로 달성하며 굳건한 아우라를 자랑했다. 2023년에는 최종전 SSG 전 세이브로 KBO리그 최초의 400세이브 고지에 도달하는 등 세이브 기록 브레이킹도 여전함을 나타냈다. 흐르는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고 했던가. 이는 오승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시즌 중반까지 27세이브를 달성하며 뒷단속을 철저하게 해냈지만, 전반기 막판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탔다. 강점이었던 구위가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강점인 직구의 위력 또한 반감됐다. 타자들에 먹잇감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잇딴 블론세이브에 셋업맨으로 보직을 옮기면서 실타래 마련을 모색했지만, 노쇠화 기미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한국시리즈 엔트리 진입에도 실패했다. 올 시즌에도 부진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하는 투구 내용을 뽐내며 세월의 벽을 절감했다. 결국, 후반기 시작과 함께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21년 프로 생활의 종지부를 찍기에 이르렀다. 팀과 KBO리그 대표 레전드인 오승환의 은퇴에 삼성은 오승환의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레전드의 떠나는 길에 대한 예우를 확실하게 했다. 이승엽(前 두산 베어스 감독), 양준혁, 이만수에 이어 팀 역대 4번째 영구결번이자 투수로는 최초라는 상징성은 오승환의 영구결번 가치를 더 높인다. KBO리그 역대 18번째 영구결번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리는 것은 덤이다.

21년간 핀치 상황을 숱하게 겪은 오승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역시 ‘포커 페이스’였다. 핀치 상황의 긴박함에도 좀처럼 표정 변화 없이 본연의 투구 리듬과 내용을 유지하는 ‘포커 페이스’는 상대 타자들에 강렬한 위압감을 선사했다.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기에 급급한 것은 물론, 포수 미트에 펑펑 꽂아넣는 묵직한 직구의 위력이 가공할만한 위엄을 자랑했다. 클로저의 최고 덕목 중 하나인 직구의 속도에 구위의 강력함까지 더해지면서 난공불락의 수식어가 절로 붙여졌다. 그만큼 오승환의 ‘포커 페이스’는 마운드 위에서 핀치 상황에서 팀을 숱하게 건져낸 것 뿐만 아니라 승리의 확실한 퍼즐과도 같았다. ‘포커 페이스’ 효과는 단순히 마운드 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업 종료와 방과 후 종례 때 울리는 학교 종소리와 함께 등장하면서 등장곡인 ‘Lazenca, Save us'의 웅장한 스케일이 상대 팀들에 다음 경기 준비 시그널을 알리는 징조였다. 두 개 곡이 차례로 나오면서 극한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곡의 짧고 굵은 스케일은 오승환의 ’포커 페이스‘를 더욱 덧칠했다. 전성기 시절 오승환의 등판은 상대 팀들이 마치 바리케이트 위에 놓여진 벽을 깨는 것을 연상케했을 만큼 ’포커 페이스‘에 기반한 ’끝판대장‘의 포스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클로저 오승환의 현역 은퇴는 한국 야구의 대표 황금세대 중 하나인 1982년생 개띠들의 현역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다. KBO리그 4회 구원왕(2006~2007, 2011, 2021)과 센트럴리그 2년 연속 구원왕 등으로 한-미-일을 주름잡은 클로저인 오승환의 은퇴는 앞서 이대호(방송인), 김태균(KBSN스포츠 해설위원), 추신수(SSG랜더스 구단주 보좌역 겸 육성총괄) 등과 마찬가지로 많은 야구팬들에 큰 아쉬움을 남긴다. 언젠가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2006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3위, 2008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 등에 큰 힘을 실은 오승환이 보여준 포스는 한국 야구의 황금기를 지탱하면서 전 세계에 위상을 알리는 한 씨앗이었다. 이승엽(前 두산 베어스 감독), 이대호에 이어 KBO리그 공식 3번째 은퇴투어의 주인공이 된 오승환의 은퇴투어가 시작되는 28일 잠실 두산 전부터 공식 은퇴식인 9월 30일 대구 KIA 전까지 많은 야구팬들이 레전드의 마지막을 보기 위한 발걸음이 아쉬움과 축하 등의 감정으로 가득할 이유이기도 하다. ‘포커 페이스’의 위대함을 과시한 오승환의 땀방울이 그래서 뇌리에 강렬하게 박히게 한다. ‘포커 페이스’ 유지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운동선수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포커 페이스’를 잃지 않고 본연의 색채와 특색 등을 잘 구현하면 각자의 발자취를 더 위대하게 재촉하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