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기의 불꽃, 도전 정신이 주는 가치
[스포츠와 세상] ‘추자도 청년’ 지동원, 현역 황혼기 호주 A리그 이적으로 새 도전
‘도전(Challenge)'. 도전이 주는 가치는 현대인들에게 특별하다. 사회 각계 다양한 장르의 울타리에 묶인 많은 현대인들이 각기다른 상황, 환경 등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이, 성별, 신분 등을 뛰어넘는 도전은 박수갈채를 받기에 아깝지 않다. 엔딩의 해피와 새드 유무를 떠나 도전의 일념 하에 각자 롤과 영역 등을 개척하는 자체만으로도 도전의 가치를 드높인다. 한 개인의 삶이 흔히 도전의 연속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포츠에서 도전은 필수 불가적인 요소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부딪히고 깨지는 일은 다반사다. 이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가 동반된다. 그러나 풍족한 열매를 위한 코스가 도전에 있다는 점에는 이의를 다는 이가 없다.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똑같다. 개인과 추구하는 로드맵 안에서 행해지는 도전은 가지고 있는 탈랜트나 쌓은 커리어 등을 두둑하게 찌우는 촉매제다.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한 시대를 주름잡은 ’추자도 청년‘ 지동원(34)의 호주 진출도 현역 황혼기에 도전이라는 일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웠다. 고국 땅을 떠나 타국에서 가진 탈랜트와 노하우, 내공 등을 표출하려는 ’프로 마인드‘가 도전 정신과 절묘하게 부합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2한일월드컵 때 대한민국의 많은 소년들은 방과 후 축구와 한 통속이었다. 각 종 메이저대회 때마다 국민성이 폭발하는 대동단결함에 어린 소년들이 방과 후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뛰어놀고, 2002한일월드컵 공인구인 ‘피버노바’를 필두로 각 종 월드컵 상품 구매, 학교 앞 문구점 오락실에서 축구 게임 삼매경에 빠지는 광경은 월드컵 열기에 도화선을 지폈다. 이는 소년들의 엘리트 축구 입문에도 큰 영향을 줬다. 운동능력이 좋고 뛰어놀기를 좋아하던 소년들이 축구선수의 지향점과 동기부여 확립 등을 도모하는 시대적 환경이 충분하게 마련되면서 엘리트 축구 입문 러시가 빗발쳤다. 당시 ‘태극전사’들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투혼, 축구 강국들을 줄줄이 돌려세우는 ‘자이언트 킬링’의 결과까지. 엘리트 축구의 길로 뛰어든 많은 소년들에게 축구선수라는 지향점을 세우는 모토가 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축구 인프라가 몰라보게 향상되면서 테크닉과 스킬 등의 배양이 맨땅 운동장 시절보다 용이해졌다. 어린 시절 다져놓은 테크닉과 스킬 등이 선수로서 시장 가치에 깊은 연관성을 띄는 만큼 인프라의 확충은 꿈나무들에게도 큰 호재였다. 그러면서 배움의 모토 안에 도전 정신을 덩달아 입히는 부수적 가치도 짭짤했다.
‘삼다도’ 제주 안에서도 북단에 위치한 추자도 태생인 지동원은 흔히 말하는 ‘월드컵 키즈(2002한일월드컵을 보고 축구를 시작한 세대들을 말한다)’다. 추자도에서 육상 장거리 선수로 활약하다가 5학년 때 화북초로 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화를 신었다. 엘리트 축구 입문과 함께 눈높이컵(화랑대기 대회의 전신)과 칠십리배 등 각 종 대회에서 남다른 ‘싹’을 드러내며 빼어난 운동능력을 입증했다. 초등학교 시절을 통해 엘리트 축구 내성을 키운 지동원은 오현중 진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진 포텐을 폭발시켰다. 특히 중학교 시절 2년간 전국소년체전 무대는 이름 석자를 전국구로 알리는 핵심 사건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05년 청주 소년체전에 유일한 2학년으로 월반한 지동원은 당시 1살 위의 형들 틈바구니 속에서도 남중부 제주선발의 핵심 스트라이커로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이듬해 울산 소년체전에서도 당시 남중부 제주선발의 3득점을 홀로 책임지는 경이로운 폭발력을 자랑하며 성장 곡선의 상향을 이어갔다. 2년 연속 남중부 제주선발의 동메달 견인과 함께 뭍 지역 자원들과 견줘도 전혀 뒤질 것이 없었다. 이에 진학 시장에서 주가가 치솟는 것은 자연스러운 단계였다.
전국소년체전을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맹위를 떨치며 전국구의 싹을 드러낸 지동원은 고교 진학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다름 아닌 광양제철고(전남 U-18)에 보금자리를 튼 것. 전국 각지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즐비한 프로 산하 유스팀의 시스템과 환경은 축구선수로서 이상향과 동기부여에 안성맞춤이었다. 구색이 제 아무리 휘황찬란해도 내실이 없으면 말짱 꽝인 법. 잘 갖춰진 시스템과 환경의 이면에 살벌한 생존 구도가 앞길을 마주하고 있던 상황에서 지동원은 어린 나이에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고교 1학년이던 2007년 대한축구협회(KFA) 우수선수 해외 유학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를 업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딩FC로 유학길에 나섰지만, 어린 나이에 타국살이의 향수병, 낯선 환경의 적응 실패 등이 한데 겹치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함께 유학길에 오른 남태희(당시 현대고. 現 제주 SK FC), 김원식(당시 동북고. 現 천안시티FC)과 달리 나홀로 조기에 귀국길에 오르며 짧은 유학생활을 마감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은 소위 시련이 있어야 내면이 단단함을 더한다고 한다. 이는 지동원에게도 딱 해당되는 말이었다. 짧은 유학생활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승화시키며 고교 무대를 소위 씹어먹었다. 당시 김인완 감독(現 대한축구협회 지도자강습회 전임 강사)의 신뢰와 믿음 속에 1년 선배 윤석영(충북청주FC)을 비롯, 동기 김영욱(서울 이랜드FC) 등 내로라하는 동료들과 환상적인 시너지가 곁들여지며 폭발력과 파괴력이 더욱 배가됐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와 처진 스트라이커, 측면 미드필더 등을 고루 소화하는 능수능란한 전술 이해도에 동료들의 서포터는 득점 양산과 상대 수비 초토화 등의 일거양득이 확실했다. 고교 2학년이던 2008년 제주 백록기 대회에서 팀을 챔피언에 올려놓은 지동원은 곧바로 펼쳐진 추계연맹전에서 득점왕을 품에 안으며 유학 ‘물’의 남다른 효력을 드러냈다. 이듬해인 2009년 전국고교선수권과 SBS고교클럽 챌린지리그(당시 프로 산하 유스팀들의 출전 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초고교급 스트라이커의 진면목을 한껏 과시했다. 또, 2009년 고등리그 왕중왕전에서는 1년 후배 이종호(現 건국대 코치)와 함께 막강한 ‘원-투 펀치’를 형성하면서 팀의 초대 챔피언과 도움왕 타이틀을 동시에 움켜쥐는 등 또래 레벨에서 절대자의 위엄을 입증했다. 그 해 대한축구협회 고등부 최우수선수상도 지동원의 몫이었다.
‘냉-온탕’을 오간 고교시절을 뒤로 하고 2010년 클럽 우선지명으로 전남에 입단한 지동원의 탈랜트는 성인이 돼서도 여전했다. 데뷔 첫 시즌 윤빛가람(당시 경남FC. 現 수원FC)에 밀려 생애 단 한 번 뿐인 신인왕 타이틀은 놓쳤지만, 22경기에 나와 7골-3도움을 쓸어담으며 성인 무대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이어 FA컵(코리아컵의 전신)에서는 5골로 득점왕 타이틀을 품에 안으며 사상 최초의 10대 FA컵 득점왕이라는 대위업을 작성했다. 또, U-19, U-23 대표팀을 오가는 타이트한 스케줄 속에서도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동메달, 2010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선수권 3위를 지휘하는 등 ‘뜨거운 감자’로서 시장 가치가 폭등했다. 각 급 연령별 무대를 통해 보여준 퍼포먼스는 A대표팀 승선으로 연결됐다. 2011 카타르 아시안컵 엔트리 한자리를 꿰차며 생애 첫 A대표팀 승선의 영예를 안았다. 2011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도 범상치 않은 탈랜트를 뽐내며 스타 탄생을 알렸다. 아시안컵 활약상을 몰아 에이스의 상징인 등번호 10번을 부여받고 11경기에 나와 3골-1도움을 올리는 등 스포츠 2년차 선수들에게 꼬리표처럼 붙는 ‘2년차 징크스’에 대한 우려도 불식시켰다.
각급 국제대회와 K리그, FA컵 등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유럽 클럽들의 군침을 절로 돋궜다. 그러면서 축구선수로서 꿈이자 로망과도 같은 유럽 진출이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팀의 차세대 프랜차이즈 스타인 지동원의 유럽 진출을 허락한 전남의 지지, 유럽 무대에서 도전 욕구 등이 한데 어우러지며 2011년 시즌 도중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더랜드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세계 최고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하게 된 지동원은 이적 첫 시즌 나름 가성비를 자랑하며 현지 팬들을 심쿵하게 했다. 그도 그럴것이 데뷔 첫 시즌 뽑아낸 2골이 프리미어리그 대표 빅클럽인 첼시,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기록한 것. 학창시절부터 ‘빅 게임 피처’로 맹위를 떨쳐온 기질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도 베일을 벗었다. EPL 첫 시즌 보여준 탈랜트와 포텐을 토대로 2012런던올림픽에서도 남자축구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지동원은 이후 팀내 생존 경쟁에서 밀리며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지만, 독일 분데스리가로 건너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아우구스부르크, SV 다룸슈타트 98, 마인츠 05,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등을 거치면서 유럽 무대의 커리어를 이어갔다. 아우구스부르크 시절 구자철(現 제주 SK FC 유스 어드바이저)과 환상의 시너지를 통한 ‘지-구’ 특공대 결성은 독일 현지 뿐만 아니라 국내 축구팬들의 설레임을 절로 자극했다. 2014브라질월드컵과 2019 아시안컵 출전에 따른 메이저대회 출전 이력 추가도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 이뤄졌을 만큼 ‘저니맨’ 신세 속에서도 나름 의미있는 자산을 쌓았다.
10년간 유럽 생활을 거쳐 2021년 FC서울에 둥지를 튼 지동원은 3년간 잦은 부상과 부진 등으로 크나큰 부침을 겪었지만, 지난 시즌을 앞두고 수원FC로 이적하며 부활의 기지개를 켰다. ‘샤프’ 김은중 감독의 신뢰와 믿음 속에 34경기에 나와 6골-3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K리그 1 상위 스플릿 진출을 이끌었다. 오랜 유럽 생활로 다져진 경험과 내공, 노하우는 물론, 팀의 고참으로서 후배 선수들을 다독이는 롤도 충실히 해내며 베테랑의 완숙미를 철철 풍겼다. 올 시즌 부상 공백 속에서도 11경기에서 도움 1개를 기록하며 고군분투함을 이어간 지동원에게 30대 중반의 나이에 또다른 도전은 축구 커리어의 한 점을 추가하는 밀알이었다. 호주 A리그 매카서 FC로 이적하면서 다시금 해외 무대를 두드리게 됐다. 30대 중반을 향하는 나이에 해외 무대에서 현역 황혼기의 불꽃을 태우려는 욕구, 베테랑의 건재함 과시라는 동기부여 등이 한데 결합되면서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지고 있는 탈랜트, 지난날 쌓은 커리어 등과 무관하게 안정이 아닌 ‘모험’을 택하는 용단과 도전 정신은 당장 결과를 넘어 훗날 커리어나 삶에서도 자산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박수받아야 마땅한 일임에 자명하다.
운동선수로서 30대 중반의 나이는 생애 주기로 치면 황혼기에 접어드는 시기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쇠퇴되는 사람 신체의 특성에 기능 발휘가 전성기 시절보다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커리어의 내리막을 타는 케이스들도 즐비하다. 그러나 베테랑으로서 현역 황혼기를 불태우려는 도전 정신은 후배들에 큰 메시지를 준다. 베테랑의 관록과 내공, 경험치 등을 적극 활용하면서 가진 탈랜트나 특색 등을 표출하려는 열정은 도전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다. 운동선수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세계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각자 처한 환경이나 상황 등에 맞게 도전할 수 있는 대상물이 있다는 부분만으로도 그 가치에 의의가 깊다. 도전의 엔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나중 문제다. 베테랑들에게는 후배들의 성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 내공과 경험치 등의 표출, 신진 세력들은 다양한 도전을 통한 경험치와 내공 등의 축적이 훗날 큰 자산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그렇다. 도전이 주는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