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불러본다_박희순의 생태동시집과 제주어 감각의 복원력(3)

[송미아의 독서평론] 3부 : ‘스며듦’의 미학 ― ⪡꼬물꼬물 베렝이⪢의 자존감

2025-08-06     송미아

1부 숨은 들꽃, 드러난 마음 — ⪡엥기리젠⪢의 동심 생태 시학
2부 부리 끝에 맺힌 봄- ⪡쪼글락하고 아꼬운 생이⪢의 경고

3부 ‘스며듦’의 미학 ― ⪡꼬물꼬물 베렝이⪢의 자존감
맺으며- 박희순 시인의 작품세계와 제주어 생태동시집

⪡꼬물꼬물 베렝이⪢ 표지


3부 ‘스며듦’의 미학 ― ⪡꼬물꼬물 베렝이⪢의 자존감

스며든다는 것.
스민다. 스며든다. 스르르. 스르르르.
스며든다는 것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어느덧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저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 나도 모르게 가까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스며듦’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어느 책의 문장은 단순한 은유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삶, 그리고 ‘스며듦’이라는 관점에서도 곱씹어 볼 만한 아포리즘이다. 그렇다. 익숙한 방식대로만 살아가는 것은 때때로 외부의 감각을 닫아버리는 일이며, 스며듦의 문을 스스로 걸어 잠그는 일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어느새 스며드는 것들이 참 많다. 그런데도 여전히 쉽지 않은 것도 있다. 눈에 잘 띄는 자리, 하고 싶은 일, 모두가 인정하는 영역. 오히려 그런 곳에 닿기 위해 사람들은 더 많은 수고와 열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반대로 가는 이는 드물다. 보이지 않는 것, 알아주지 않는 것,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 작고 하찮다 여겨 늘 밟히는 존재들. 그런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다. 이처럼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 속에는 많은 삶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감각을 닫은 채 살아가는 삶, 그것은 타자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삶이기도 하다.

박희순 시인의 ⪡꼬물꼬물 베렝이⪢의 시편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를 멈추게 한다. 이 동시집은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기보다, 아주 작은 생명과 마주하게 하며 그 존재의 리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어떤 존재의 삶을 감지하고 그 의미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스며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그 스며듦이 이루어졌을 때, 대상인 타자와 전달자인 자아 사이에는 조용한 순환이 생기고 관계는 깊어지며, 공존의 감각은 비로소 생명을 품는다. 동심의 문학이란 바로 그 순환 안에서 ‘소중함’을 스며들게 해주는 일이다.

동시는 동심의 문학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심은 단지 유년의 정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먼저 그 세계로 스며들었을 때 비로소 획득되는 감수성이다. 그런 스며듦이 있어야 작품의 결이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박희순 시인의 생태 동시집은 ‘스며듦’의 문학을 성실히 실현한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꼬물꼬물 베렝이⪢는 저도 모르게 젖어드는 귀한 울림을 전해준다. 그것은 단지 시적 언어의 효과에 머물지 않는다. 세계를 관조하는 시인의 폭넓은 감수성에서 비롯된 내면의 진동이자, 삶을 향한 다정한 응시의 결과다.

그동안 우리가 스쳐 지나쳤던 곤충은 지구상 생물 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존재들이다. 가장 작지만 가장 다양한 생명력을 지닌 그들은 꽃가루를 옮기고 땅을 비옥하게 하며,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거나 병해충을 조절하는 등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거나 하찮게 여기고, 그 존재를 인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식의 부재, 혹은 무관심의 관성이 우리 안에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박희순 시인은 바로 그 무관심의 관성을 흔들어 깨운다. 작고 약한 존재들에게 다정한 시선을 건네며 혐오의 껍질을 조용히 벗기고 그 안에 숨겨진 생명의 윤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그 작은 생명들 안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마주해 온 아이들의 눈동자를 발견한다. 곤충의 속성을 아이들 내면 깊이 자리한 자존의 '결'과 겹쳐 읽어낸다는 것은 단순한 은유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각의 깊이를 요한다. 그것은 오랜 시간 아이들과 함께 살아낸 이만이 체득할 수 있는 감응의 구조이며, 타자를 향한 정서적 직관의 발현이다.

필자는 제주어 생태동시집 ⪡꼬물꼬물 베렝이⪢ 편에서 많은 울림을 만났지만, 지면상 <딩동, 칠성무당베렝이님>, <매미>, <딱 하루 주어진다면>, <난 아기 도마뱀> 등 네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작품들 속에는 제주어의 입말과 전통의 감각, 그리고 현대적 생태 의식이 어우러진 동심의 감수성이 서려 있다. 그 감수성에 함께 젖어 읽으며 시인이 펼쳐 보이는 세계의 결을 찬찬히 더듬어보고자 한다.


1) 한라산에도 카톡이 울리다 ― 무당벌레 심방이 부르는 전통·디지털 합주

딩동, 칠성무당벌레님 들어오셨어요 / 딩동, 남생이무당벌레님도 들어오셨어요 // 한라산 산 5번지 꽃봉오리 / 진딧물이 공격하고 있어요, 빨리 와 주셔요 // 알록달록 무당옷 입고 어서 오셔요 / 허리춤에 노란 즙 달고 오셔요

– <딩동, 칠성무당벌레님> 전문

딩동, 칠성무당베렝이님 들어와수다 / 딩동, 남생이무당베렝이님도 들어와수다 // 한라산 산 5번지 꼿봉오지 / 진쉬가 공격헴시난 제기 와줍서 // 알록달록 심방옷 입엉 ᄒᆞᆫ저 옵서 / ᄌᆞᆫ등이더레 노린 즙 ᄃᆞᆯ앙 옵서

– <딩동, 칠성무당베렝이님> 전문

<딩동, 칠성무당베렝이님>이 지닌 활기는 첫 구절부터 솟구친다. ‘딩동’이라는 초인종 소리, 거기에 카카오톡 알림 아이콘까지 얹힌 시각적 장치는 아이들의 일상 리듬을 곧장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무당벌레를 ‘심방’이라 부르는 설정은 제주 굿의 이미지를 바로 호출하고, “알록달록 심방옷 입엉 ᄒᆞᆫ저 옵서 / ᄌᆞᆫ등이더레 노린 즙 ᄃᆞᆯ앙 옵서” 같은 행에서는 제주어 특유의 언어가 춤을 춘다. 발음만 굴려도 경쾌한 리듬이 입안에 맴돌고, “노린 즙 달고 오라”는 재치 있는 주문은 아이들 마음속에서 무당벌레가 ‘비장하게 무장한 수호신’으로 변신하게 만든다.

특별한 지점은 전통 신앙이 품었던 공동체적 안위를 현대 메신저 알림으로 재빠르게 호출해 내는 시적 발상에 있다. 옛 제주 민속에서 심방은 혼란을 잠재우고 안녕을 비는 존재였다. 박희순 시인은 그 역할을 알록달록 무당벌레에게 맡기면서 “한라산 산 5번지 꽃봉오리 / 진딧물이 공격하고 있어요”처럼 구체적이고 유머러스한 상황으로 끌고 온다. 덕분에 토속 신앙의 보호·위안 상징은 사라지지 않고, 스마트폰 알림음과 한몸이 되어 살아 움직인다.

수업 시간에 이 동시를 읽은 아이들이 “한라산에도 카톡 돼서 다행”이라며 웃었다는 후기는 이런 상상력이 얼마나 빠르게 아이들 마음에 스며드는지를 잘 보여 준다. 짧은 알림음 하나로 전통과 디지털, 자연과 인간이 통째로 연결되는 경험. 시인은 이를 복잡한 설명 없이, 리듬과 색채, 그리고 사라져 가는 제주어의 맛으로 완성한다.

결국 <딩동, 칠성무당베렝이님>은 제주어의 구수함과 현대 감각, 토속 신앙의 안온함을 한데 묶어 ‘살아 있는 동시’로 빚어내었다. 아이들은 여기서 낯선 전통을 어렵지 않게 만나고, 어른 독자는 디지털 시대에도 꺾이지 않는 동심의 생명력을 확인한다. 활기찬 어조와 자유로운 발상, 그리고 제주 땅이 품어 온 정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작은 무당벌레 한 마리가 한라산과 카카오톡 사이를 신나게 날아다니는 순간을 재치 있게 완성시킨다.
 

2) 매미가 울면 지구도 흔들린다 ― 한 시, 두 언어의 울림

나무가 / 우는 줄 알았다 // 설마 / 저 작은 것이 // 나무를 / 흔들고 있을 줄이야 // 설마 / 저 작은 것이 // 지구를 / 흔들고 있을 줄이야
– <매미> 전문

낭이 / 우는 줄 알앗저 // 초마가라 / 저영 쪼끌락헌 것이 // 낭을 / 흥글엄실 줄이야 // 초마가라 / 저영 쪼끌락헌 것이 // 지구를 / 흥글엄실 줄이야
– <재열> 전문

박희순 시인의 동시 <매미>는 작은 존재가 얼마나 큰 울림을 낼 수 있는지를 깊고도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 짧은 시는 ‘작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설마 저 작은 것이 지구를 흔들고 있을 줄이야”라는 반전의 시구는 아이의 동심에서 출발하지만, 그 너머에 어떤 시적 깨달음을 선사한다. ‘매미↔지구’의 대비는 동시문학의 울림에 큰 파장을 준다.

생태학적으로 보면 작고 미세한 생명일수록 생태계 유지와 순환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미는 토양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며 생장을 준비하고 마침내 지상에 올라 울음으로 짝을 부르며 생의 절정을 맞는다. 이 울음은 종의 생존을 위한 필연이자 여름 생태계 리듬의 한 축이다. 인간 중심의 시선에서는 “쪼끄만 것”일 수 있지만 매미는 지구의 소리와 진동을 바꾸는 주체로 기능한다.

시적으로 볼 때 ‘매미’와 ‘지구’의 극적인 대비는 동시 특유의 비유와 상상력이 빚어낸 역동적 구조다. 작고 여린 존재가 감히 지구를 흔든다는 설정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며 세계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움직일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로 이어지며 동시 문학이 전할 수 있는 감정의 폭과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 시는 자연 관찰에 마무르지 않고 생명과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게 만든다. 어린이 독자에게는 “내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자존감의 씨앗이 되고 어른에게는 “무시했던 작은 존재도 세상을 흔든다”는 윤리적 경계심을 일깨운다. 이렇게 박희순의 동시는 어린이 문학의 경계를 넘어 존재론적 생태학적 감수성을 포용하며 작은 목소리가 더 큰 세상을 울릴 수 있다는 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동시의 힘은 이미 국경을 넘어 확인되었다.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에 실린 이향규의 수업 기록에 따르면 그는 런던한겨레학교에서 최승훈의 <고 벌 한 마리가> 윤동주의 <호주머니>, 나태주의 <풀꽃>과 함께 <매미>를 우리말과 영어로 낭독했고 학생들은 “무릎을 쳤다”고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시가 품은 울림은 언어를 넘어 시상의 보편성을 건드린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작디작은 것은 좁은 문을 열어 온 우주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작은 존재 하나에도 무한한 세계가 담겨 있다는 그의 사유는 매미 한 마리가 울어 숲을 울리고 지구를 뒤흔든다는 이 시의 상상력과 맞닿는다. 아이들은 ‘작다’가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인다. 이처럼 매미의 울림은 나무를 흔들고 나아가 우리 삶의 감수성을 흔든다. 짧지만 깊은 이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다.
 

3) 동심으로 꺼내는 존재의 이유 ― 딱 하루의 시학

딱 하루만 주어진다면 / 나는 무얼 할까? // 딱 하루만 주어진다면 / 나는 어디로 갈까? // 딱 하루만 주어진다면 / 나는 누구를 만날까? // 엄마 하루살이는 아빠를 만나고 / 아빠 하루살이는 엄마를 만나 // 딱 하루 주어진 그날 / 내가 태어났어. // 나는 엄마 하루살이의 전부야 / 나는 아빠 하루살이의 전부야.
– <딱 하루 주어진다면> 전문

ᄄᆞᆨ ᄒᆞ루만 주켄 ᄒᆞ민 / 난 무신거 허코? // ᄄᆞᆨ ᄒᆞ루만 주켄 ᄒᆞ민 / 난 어디레 가코? // ᄄᆞᆨ ᄒᆞ루만 주켄 ᄒᆞ민 / 난 누겔 만나코? // 어멍 눈에눈인 아방을 만나곡 / 아방 눈에눈인 어멍를 만난 // ᄄᆞᆨ ᄒᆞ루 주어진 그날 / 나가 태어낫주 // 난 어멍 눈에눈이의 ᄆᆞᆫ딱이라 / 난 아방 눈에눈이의 ᄆᆞᆫ딱이라
– <ᄄᆞᆨ ᄒᆞ루 주어진덴ᄒᆞ민> 전문

딱 하루만 주어진다면?으로 시작되는 질문은 삶의 본질에 대한 천진한 탐색처럼 느껴진다. 아이의 목소리로 쓰인 이 물음은 서서히 부모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마침내 “딱 하루 주어진 그날 / 내가 태어났어”라는 고백에 이른다. 하루살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만남이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이 서술은,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제주어 <ᄄᆞᆨ ᄒᆞ루 주어진덴ᄒᆞ민>은 이 감정을 더욱 따뜻하게 전한다. ‘어멍 눈에눈인 아방을 만나곡 / 아방 눈에눈인 어멍를 만난’이라는 표현은 ‘한눈에 반하다’는 뜻의 제주어 ‘눈에눈이’를 통해 사랑의 순간을 더욱 진하게 그려낸다. 아이가 “ᄆᆞᆫ딱” 곧 부모의 전부라고 말할 때, 그 말에는 크고 요란한 수사가 없다. 대신 제주어 특유의 입말과 정감 어린 말씨가 덧입혀져, 그 존재의 무게가 오히려 더 단단하게 전해진다. 제주어는 이 시에서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생생히 드러내는 언어로 작용한다.

이 동시는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이야기하면서도 시간의 길이보다 그것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루살이의 하루는 허망한 소멸이 아니라 사랑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고, 아이는 그 하루의 결실이다. 짧은 생의 밀도를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것들 속에 깃든 소중함을 일깨운다.

박희순 시인의 시는 아이의 시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른에게도 동심을 통해 삶의 뿌리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관계의 본질을 되묻는다. 이처럼 아이의 말에서 출발한 시적 질문은 어느새 모든 생의 존재 이유를 담아내는 깊이로 나아간다.
 

4) 작은 몸, 큰 울림― 동시에서 길어 올린 자존의 날개

공룡책을 펴놓고 / 공룡 위에 누워본다 // 티라노사우루스도 되어 보고 / 알로사우루스도 되어 본다 // 크르릉 크르릉 공룡인 척 했는데 / 겁도 없이 우루루 몰려와 꼬리를 잡네 //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가서는 / 또 공룡 흉내 내어 본다 // 한 번만이라도 / 공룡이 되어서 으스대고 싶다
– <난 아기 도마뱀> 전문

공룡 책을 페와 놘 / 공룡 우티 누워 본다 // 티라노사우루스도 뒈어 보곡 / 알로사우루스도 뒈어 본다 // 크르릉 크르릉 공룡인 체 헤신디 / 겁도 엇이 우루루 몰려완 꼴리를 심네 // 총지 빠지게 도망 간 / ᄄᆞ시 공룡 숭 털어 본다 // ᄒᆞᆫ번 만이라도 / 공룡이 뒈엉 으스대구정ᄒᆞ다
– <난 애기 독다귀> 전문

박희순 시인의 동시 <난 아기 도마뱀>은 조그마한 도마뱀이 공룡이 되고 싶어 책 위에 몸을 눕히며 시작된다. 티라노사우루스, 알로사우루스가 되어 보겠다며 “크르릉 크르릉” 소리까지 흉내 내는 장면은, 이불을 망토 삼아 히어로 놀이에 빠지는 아이들의 일상과 그대로 포개진다. 친구들이 몰려와 꼬리를 잡자 깜짝 놀라 달아나지만, 도마뱀은 곧 다시 책 위로 돌아와 우쭐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작아 보이는 자신이 잠시라도 크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 한 번만이라도 거대한 공룡이 되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시의 첫머리부터 따뜻하게 묻어난다.

제주어 <난 애기 독다귀>에서는 그 유쾌함이 한층 더 짙다. “꼴리를 심네”처럼 꼬리를 잡는 장면이 구수한 입말로 살아나고, “총지 빠지게 도망 간 ᄄᆞ시 공룡 숭 털어 본다” 같은 표현은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면서도 다시 용기를 내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제주어 특유의 리듬이 더해져, 독자는 마치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뛰노는 소리를 곁에서 듣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지역어가 품은 질감은 도마뱀을 더욱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빛나게 한다.

여기서 시인이 택한 ‘흉내’라는 시적 장치는 표면적 장난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마뱀이 공룡 울음을 따라 할 때, 아이들은 자신 또한 커다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속으로 연습한다. 현실에서는 몸집도 꼬리도 작지만 상상의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강하고 크다. 이런 놀이는 ‘작아도 괜찮아, 언젠가는 크게 자랄 수 있어’라는 믿음을 자연스레 내면화한다. 끝내 진짜 공룡이 되지는 못해도, 반복해서 책 위로 돌아와 으스대는 도마뱀의 끈질김은 새 도전을 앞둔 아이들에게 부드럽게 용기를 건넨다.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살피고, “언젠가 너도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따뜻한 응원을 전한다.

짧은 행마다 톡톡 튀는 의성·의태어와 간결한 반복은 낭독의 즐거움을 더한다. 시인의 섬세한 관찰이 빚은 장면들은 유머러스하면서도 다정하고, “네 꿈이 아무리 커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속삭인다. 그림책으로 펼치면 초록빛 도마뱀과 알록달록 공룡 그림이 어우러져 아이들의 상상력을 더욱 키워 줄 것이다. <난 아기 도마뱀>은 웃음을 선물하면서도 “스스로를 작게 여기지 말라”라는 든든한 격려를 남기는 동시다. 언젠가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만의 공룡 울음을 만들어 세상 앞에 더 당당히 설 것이다.

⪡꼬물꼬물 베렝이⪢ 뒷표지

<굼벵이>·<불나방>·<꼽등이>·<별이 되고 싶은 반딧불이>에서도 박희순 시인은 저마다 다른 어둠 속에 머무는 작은 존재들을 불러 세워 아이들의 자존감을 살핀다. <굼벵이>는 “평생 굼벵이로 살진 않을 거야”라며 땅속에서 날개를 꿈꾸는 희망을, <불나방>은 “유리창에 부딪혀도 괜찮아”라며 다시 날아오르는 용기를, <꼽등이>는 굽은 등을 숨긴 채 웅크린 아이 곁으로 다가가 “걱정 말라고 손이라도 잡아줄걸” 하고 속삭이는 연민을 들려준다. 여기에 <별이 되고 싶은 반딧불이>는 자신의 빛으로 남을 위한 길을 밝히겠다는 다짐을 담는다.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게 / 풀잎 가시에 베이지 않게”라는 구절은 작은 존재라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며, 끝내 “작고 작은 별이 될래”라고 말하는 반딧불이는 소멸이 아닌 존재의 환한 마무리를 꿈꾼다. 이 응원의 목소리는 <난 아기 도마뱀>의 마지막 구절 “스스로를 작게 여기지 말라”와 맞물려 아이들 마음에 단단한 자존감의 씨앗을 심어 준다.

아이들은 때때로 누군가의 단 한 마디에 커다란 동기를 얻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권영애 작가의 책 ⪡그 아이만의 단 한 사람⪢이 떠오른다. 작가는 한 사람에게서 받은 존중과 사랑이 아이가 평생을 살아낼 힘이 된다고 말한다. 맞다.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아이는 세상을 향해 긍정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다.

장기간 독서지도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며 수없이 체감했던 일이다. 아이의 아픈 구석을 들여다보고, 말없이 공감해 줄 때 아이는 어두운 자아를 걷어내고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다. 생각의 각도를 바꾸고 힘을 낼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해 주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 한 편 한 편을 대할 때마다, 독서지도사로서의 마음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맺으며- 박희순 시인의 작품세계와 제주어 생태동시집

박희순의 생태시리즈 동시집을 들면 “너를 불러본다”는 낮은 목소리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너’는 아이일 수도, 풀꽃 한 송이일 수도, 잊혀 가는 제주어 한 단어일 수도 있다. 시인은 “잠시 발밑을 보라”는 다정한 손짓으로 어른들까지 자연의 목소리 앞에 불러 세운다. 짧은 동시 한 편이 누군가의 하루, 때로는 삶까지 흔들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작디작은 곤충·풀꽃·새들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 작은 존재를 통해 우리 안의 연약한 자아를 함께 쓰다듬으며 하루의 기쁨을 누린다.

박희순 시인.

제주에서 태어난 박희순 시인. 그녀는 제주의 자연과 이이들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동시작가이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체험하는 동시와 생태 동시, 제주어 동시를 쓰고 있으며 지속가능한 생태, 소멸위기 제주어를 살리기 위한 ‘동시콘서트’를 연속적으로 진행하며 동심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SBS교육대상과 제18회 대교눈높이 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5학년 국어교과서에 ‘벽부수기’ 동시가 수록되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도서로 ⪡나는 꽃이야, 너는⪢이 선정되었다. 동시집으로는 ⪡바다가 핑계 낸 해님⪢, ⪡말처럼 달리고 싶은 양말⪢, ⪡엄마는 못 들었나?⪢, ⪡나는 꽃이야, 너는⪢, ⪡바다가 튕겨낸 해님⪢ 등이 있으며, 경계존중 그림책 ⪡똑똑똑, 선물 배달 왔어요⪢ ,제주어 동시 컬러링북 ⪡엥기리젠⪢, ⪡쪼꼴락하고 아꼬운 생이⪢, ⪡꼬물꼬물 베렝이⪢, 제주신화이야기 ⪡신나락만나락 춤추는 신화⪢등을 펴냈다.

아울러 ‘욕심꾸레기 곤줄베기’외 여러 동시들은 동요로 작곡되어 방송과 유튜브를 통해 널리 소개되었고, 특히 ‘매기독딱’은 제주어창작동요제 대상작으로 선정되어 제주어 예술의 생명력을 입증했다. 박희순 시인은 동시·그림·음악이 어우러진 북콘서트와 제주어 시 콘서트로 독자와 무대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왔다. 앞으로도 학교·도서관·해외 도시를 무대로 제주어 동시 콘서트와 생태 컬러링북 시리즈 콘서트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한결같이 “작은 존재, 큰 울림”을 노래해 온 그의 통합적 창작력은 제주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며 제주어보전 활동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번 평론의 대상이었던 제주 생태와 제주어 감수성을 아우르는 동시 컬러링북 시리즈는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까지 ⪡엥기리젠⪢, ⪡쪼꼴락하고 아꼬운생이⪢, ⪡꼬물꼬물 베렝이⪢ 편이 출간되었고, 마지막 권인 ⪡와! 제주바다⪢는 출간 준비 중이다. 각 권에는 제주의 작은 동식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박희순 시인의 동시와 신기영 화가의 세밀한 컬러링 그림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독자는 책 속 QR코드를 통해 박희순 시인의 목소리로 동시를 들을 수 있으며, 따라 낭송해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또한 색연필이나 물감으로 그림을 채색할 수 있는 컬러링 워크지가 실려 있어, 시와 그림을 자연스럽게 감상하며 참여할 수 있다.

독서지도 관점에서 대상층을 살펴보면, ⪡엥기리젠⪢은 고학년, ⪡생이⪢는 중학년, ⪡베렝이⪢는 저학년에게 특히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굳이 학년 구분 없이 전 연령대 아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통합형 생태 예술 도서라 할 수 있다. 자연관찰을 바탕으로 한 생태 정보와 감성적인 시어가 결합되어 있어, 시적 감수성과 과학적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더불어 이 책은 온 가족이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으며, 양로원이나 요양원의 어르신들께도 제주어 동시 낭송과 색칠 활동을 통해 회상 치료와 감정 표현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박희순 시인의 동시는 작은 곤충 한 마리, 들꽃 한 포기에서 출발해 아이에게서 가족으로, 그리고 어르신에게로 파동을 넓히며, 세대와 세대를 잇는 따뜻한 독후 활동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울러 이 동시집들에서 제주어는 그 자체로 ‘숨결’이다. ‘ᄒᆞᄊᆞᆯ 멈추는 거’(잠깐 멈추기)처럼 토박이 어휘 하나를 살려 놓으면, 읽는 이의 입안에서 리듬이 되살아난다. 이처럼 신기영 화가와 함께한 “동시 + 컬러링” 통합 작업은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되고, 온가족에게는 함께의 맛있는 독서가 되고, 어르신들에게는 회상치료의 매개가 된다. 박희순이 ‘사라져 가는 제주어 보존’을 위해 시와 그림을 동등한 비중으로 묶어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박희순의 문학적 가치는 “작은 존재가 품은 거대한 의미”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길어 올린 데 있다. 곤줄베기의 한 입, 매미 한 마리가 지구를 울리는 울음, 애기똥풀 한 포기를 통해 그는 한 사회가 돌보아야 할 생명의 윤리와 언어의 미래를 들려준다. 어린이는 그의 동시를 따라 웃고 노래하며 자존감을 얻고, 어른은 잊고 있던 감정과 생태 감수성을 회복한다. 시와 그림, 낭송이 어우러진 그의 통합적 작업은 제주어 문학의 지평을 넓히며 “작은 것들의 큰 울림”이란 진실을 오늘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