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금 명종이 말한 ‘대첩’을 이제부터 제대로 알리자”

[미디어 窓] 제주대첩 47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2025-07-30     김형훈 기자

다국적 왜구에 맞선 거대한 승리

‘제주대첩의 날’ 기념일 지정 필요

역사 교과서에도 제대로 표현돼야

[미디어제주 = 김형훈 기자] 역사는 ‘사실(事實)’을 기초로 한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가 역사적 사실인 ‘사실(史實)’로 인정받지 못한다. 수많은 사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을 받고, 우리 곁에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입에 오르내린다.

제주대첩도 그런 역사 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제주대첩은 ‘사실(史實)’임에도 등한시된 역사였다. 제주대첩이 ‘사실(史實)’이라는 증명은 ≪조선왕조실록≫이 해준다. 명종 10년인 1555년, 왜구가 호남 일대를 휩쓸고 제주까지 피해를 입혔다. ‘을묘왜변’이라고 불리는 왜구의 난동에 조선 중앙정부는 노심초사했다. 임금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근심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행히 중앙정부가 해외로 부르던 섬, 제주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제주의 승리 후에 명종이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내린 글을 보자.

“외로운 섬에 병력이 미약하고 원병도 때맞춰 이르지 못해 어떻게 방어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잠자리조차 편하지 못한 날이 여러 날이다. 그런데 승전 보고를 들으니 마음에 있던 근심 10개 중 7~8개가 줄었다. 평소 경(卿)의 충의와 목숨을 나라에 바쳐 북채를 쥐고 죽으려는 정신이 아니었다면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하여 이와 같은 ‘대첩(大捷)’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7월 7일 기해>

'명종실록'에 '대첩(大捷)'이라는 표현이 명확하게 보인다.

실록은 ‘대첩’이라며 제주공동체의 승리에 화답했다. 적은 군사로 천여 명에 달한 왜구를 몰아냈다. 실록에서 거론한 ‘대첩’은 위대한 역사를 보증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제주대첩을 알리는 일은 미약했다. 미약했다기보다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주대첩을 이끈 제주에서도 그랬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제주도지≫(2019년판)에도 제주대첩, 혹은 을묘왜변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없다. 제주도가 이런 지경인데, 제주 밖의 상황은 어떨까.

역사를 배우는 가장 기초가 되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을묘왜변이나 제주대첩은 빠져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디어제주>가 제주대첩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기초가 되는 일이 나섰다는 점이 아닐까. 여기엔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특별자치도의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다.

<미디어제주>가 제주대첩 470주년을 알리기 위해 했던 일은 ‘승전고를 울려라’는 타이틀을 단 ‘제주대첩의 날 선포식’이었다. ‘승전고를 울려라’는 제주대첩이 단순한 과거가 아님을 알린 날이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 살고 있는 이들이 배우고, 이를 미래에 전하자는 외침이기도 했다.

미디어제주 주최로 연린 '제주대첩의 날 선포식' 행사.

470년 전, 제주 땅에 살던 사람은 어땠을까. 조선 건국 이후 을묘왜변 이전까지 제주에 들이닥친 왜구의 침략 사례는 30회에 이른다. 왜구의 흔적은 제주 도내 신당의 역사에도, 신화에도 남아 있을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을묘왜변 때의 왜구는 이전과 달랐다. 규모도 달랐고, 구성도 달랐다. 천 명 단위의 왜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것도 다국적 왜구였다. 중국 본토에도 터를 잡고 있었고, 멀리는 필리핀과 베트남까지 넘나들던 그런 왜구였다. 그러기에 우린 기억해야 한다. 국제적 규모의 왜구를 제주에서 몰아낸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알릴 의무가 있다.

제주대첩의 가치는 새로 봐야 한다. 단순하게 노략질만 일삼던 왜구가 제주를 거쳐갔다고 보면 안 된다. 그들은 제주성을 함락해서, 새로운 터전으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제주도가 왜구의 본산지가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제주공동체는 민관이 하나가 돼 그런 왜구의 결심을 없앴다는 점이다. 이처럼 가치 있는 1555년의 제주대첩을 적극 알려줘야 한다.

이젠 후속 작업이 필요하다. 제주공동체는 사흘을 버티며 왜구를 물리쳤다. 음력 기준으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전투를 벌인 결과가 곧 ‘대첩’이었다. 왜구에게 압도적 패배를 안기고 승리를 거둔 시점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27일이 된다. <미디어제주>는 그날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제주대첩의 날’을 선포했다. 다음은 ‘제주대첩의 날’을 기념일로 안착시키는 작업이다. 이 일은 제주특별자치도가 적극적으로 해줘야 한다.

을묘왜변은 조선 조성을 각성하게 했다. 왜변 이후 판옥선이 만들어지고, 개인화기인 총포도 더 적극적으로 개발된다. 을묘왜변 40년 후에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는 기초적인 군사적 장비가 을묘왜변 이후에 만들어졌다. 때문에 다국적 왜구를 격멸시킨 제주대첩은 더 가치가 있다.

역사 교과서에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을 등재시키는 작업도 필요하다.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의 역할이 여기에서 중요해진다. 그러고 보면 제주대첩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470년 전 제주공동체 모두가 일어섰듯이, 현재에 살고 있는 제주도민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주대첩의 날 선포식’을 기획한 <미디어제주>도 끝까지 제 역할을 할 것을 거듭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