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회화의 결을 따라 흐르는 동심의 세계

[송미아의 독서평론] 민병도의 동시조집 ≪구름 과자≫를 중심으로

2025-07-03     미디어제주

서론_시와 그림의 결에서 흐르는 동심 
1. 시詩와 회화繪畵의 접점에서 
2. 부름에서 시작된 관계 맺기
3. 물활론적 상상으로 포용하는 시학
4. 기다림을 배우는 동심 철학 
결론_ 민병도 시인의 예술생태계 

민병도 동시조집 ≪구름 과자≫ 표지


시와 그림의 결에서 흐르는 동심

시 곁에 그림이 있고, 그림 곁에 시가 있다. 그 결이 접점을 이루며 빛을 발하는 작품집. 민병도 작가의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시와 그림 사이에서 공명하는 감성을 만나게 된다. 그림과 시는 각각의 예술 언어이지만 민병도 시인의 손끝에서는 그 둘이 하나의 숨결처럼 엮인다. 동시조 ⪡구름 과자⪢는 시詩와 회화繪畵의 경계를 허물며 태어난 언어의 과일이다.

민병도 작가에게서 우리는 언제나 한 편의 사유를 건네받는다. 지금까지 그가 세상에 꺼낸 시집은 모두 서른한 권이다. 그중 스무 권은 발표 시조집이고, 세 권은 동시조집이며, 번역 시조집 두 권, 시조선집 네 권, 자유시집 두 권이 있다. 이 책들은 서로 다른 결로 고유한 정체성을 품어내며 독자에게 각기 다른 결실을 선물해 왔다.

작가의 시조(時調)는 회화(繪畵)와 더불어 나란히 호흡해왔다. 30여 회에 이르는 동양화 개인전과 더불어 시와 그림의 여백은 언제나 하나의 맥(脈)으로 이어져 오며 언어와 색, 형식과 정서, 전통과 현대감각을 아우르며 그의 작업 세계 안에서 공존해왔다. 세 번째로 펴내는 이번 동시조집⪡구름 과자⪢는 그 예술적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응결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시와 그림의 예술적 흐름은 그의 화가로서의 창작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특히 제31회 개인전 ≪道法自然≫은 그 사유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이에 대해 권원순 미술평론가는 “깨달음과 삶, 생태를 하나로 버무려 끌어안는 전방위적 시도”라며, 그의 회화 세계가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화융(和融)의 경지로 나아가는 예술적 사유의 장임을 짚었다. 이처럼 자연과 존재를 관통하는 도가적 사유는 그가 펼쳐온 회화뿐 아니라 시조의 세계로도 이어진다.

작가의 회화 세계와 맞닿은 시적 감수성은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시조집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른을 위한 ≪새벽 물소리≫에는 삶과 존재를 향한 깊은 성찰이, 동시조집 ≪구름 과자≫에는 동심의 언어로 자연을 바라보는 상상력과 호기심이 차분히 스며 있다. 비록 독자층은 다르지만, 두 시집 모두 자연을 매개로 시인의 내면을 통과하는 사유의 흐름을 공유하며 하나의 예술적 줄기로 맞닿는다.

특히 ≪구름 과자≫는 앞선 동시조집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그림이 함께 실린 풀컬러 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어린이 독자들이 시와 그림을 동시에 감각하며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이자,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 그리고 건강한 동심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라는 작가의 고백이 하나의 예술책으로 구현된 결과다.

동시조는 짧고 운율감 있는 형식 덕분에 낭송하기 쉽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어린이는 이를 통해 언어의 리듬과 소리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시적 상상력으로 일상의 사물과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는 감수성을 키운다. 어른에게는 잠들어 있던 동심과 오래된 감정을 일깨워 삶의 본질을 되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동심의 감성과 삶의 통찰이 어우러진 동시조는 아이와 어른을 함께 품는 문학의 다리이다.

본 평론에서는 먼저 세 작품을 골라 시조와 그림이 주고받는 내적 대화를 조망하고자 한다. 이어,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가 어떻게 존재를 인정하고 관계를 여는 언어의 힘으로 작용하는지를 분석하고, 생명 없는 사물에 어떻게 감정을 부여하여 세계를 확장시키는지의 시적 상상력과, 계절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 식물들의 모습 속에 깃든 동심의 윤리와 인내의 미학에 대해 차례로 고찰하고자 한다.
 

1. 시詩와 회화繪畵의 접점에서 

민병도 시인의 동시조는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몸의 언어를 담고 있다. 봄을 깨우는 꽃잎, 제때를 알고 움트는 꽃씨의 날숨, 풀잎마다 맺힌 이슬의 떨림까지 이 시편들에는 소리 없이 건네는 몸짓이 있다. 그 몸짓은 말보다 더 진실하고 가르침보다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어린 화자는 그것을 본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세계의 징후들. 민병도 시인의 시는 그래서 설명하지 않고 그저 다가가 바라보고 몸으로 기억하게 한다. 이 글에서는 그림과 함께 펼쳐지는 시의 감각을 천천히 음미해 보고자 한다.

스케치도 하지 않고
고친 흔적도 없이

언 살을 달래가며
가지마다 꽃을 피워요.

바람을 목걸이하고
세상의 잠, 다 깨워요.

  - <매화는> 전문

민병도 시인의 동양화, '기쁨'

점묘처럼 톡톡 찍힌 점들이 화면 가득 매화를 피워 낸다. 이 그림의 제목은 <기쁨>이다. 보랏빛과 분홍빛이 뒤섞인 하늘을 두 마리 새가 가로지르며 몇 몇 초록 사이에 깃든 봄기운을 깨운다. 언 손을 녹이며 제때를 알아차린 매화처럼 그림은 아이가 처음 맞닥뜨린 설렘을 새의 날갯짓으로 환기하고 그 설렘이 곧 기쁨으로 번져 간다.

동시조 <매화는>도 그 감각을 세 장의 호흡 안에 섬세하게 담는다. 초장에서는 매화가 어떤 꾸밈도 없이 스스로 피어나는 담백한 존재로, 중장에서는 겨울의 냉기를 품은 채 가지마다 꽃을 터뜨리는 인내와 긴장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차곡이 쌓인 정서는 종장에서 극적인 전환을 맞아 바람과 하나 되어 세상의 잠을 모두 깨우는 역동으로 도약한다. 이 전환은 기쁨이 솟구치는 순간을 형식 안에 새겨 어린 독자에게도 형식미의 힘을 또렷하게 들려준다.

제주에서 온갖 바람을 겪어 온 필자는 그림 <기쁨>을 마주하자 꽃샘바람에 떨던 아네모네가 떠올랐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스스로를 지키며 더 많은 꽃잎을 터뜨리던 그 헌신의 몸짓이 얼마나 대견스러웠던지, 그 가녀린 꽃잎이 주는 기쁨을 혼자 누리기 아까워 오래도록 곁을 지켰던 기억이 새로이 떠올랐다.

그림 속 매화 또한 바람을 목걸이 삼아 하루하루 자신을 조금씩 피워 낸다. 한 잎 두 잎 깨어나는 이웃 꽃들의 모습은 몸짓으로 건네는 안부 같고, 그 모든 움직임은 봄의 왈츠처럼 들린다. 손바닥만 한 꽃밭의 생명을 마주하기 전에는 미처 알아차릴 수 없던 내밀한 선율이기에 시와 그림이 함께 들려주는 기쁨의 화음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시와 그림은 함께 말한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봄은 피어나고 기쁨은 무르익는다고. 짧고 간결한 시조 형식 안에 봄의 떨림과 기쁨을 담아낸 이 작품은 동시조라는 장르의 힘을 온전히 보여준다.

빨간 꽃 파란 꽃의
온갖 놀림 참아가며

세상에 흔하디흔한
꽃 한 번 못 피워도

사르르 입에서 녹는
열매 주는 천사 나무

- <무화과> 전문

민병도 시인의 동양화, '꽃의 마음'

<무화과>의 시와 민병도 화백의 그림 <꽃의 마음>을 마주하는 순간, 독일 화가 파울 클레의 ‘Signs in Yellow’가 떠오른다. 노란 바탕에 선과 점과 원이 기호처럼 흩뿌려진 그의 추상화는 설명보다 상상을 먼저 불러내며 끊긴 듯 이어가려하는 내면을 동심의 감각으로 잇는다.

그 노란 순수는 동시조 <무화과>와 그림 <꽃의 마음>에도 깃들어 있다. 시가 꽃 한번 못 피워도 열매를 내어주는 ‘속깊음’을 말한다면, 그림은 그 마음을 닮은 노란 형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탕처럼 찍힌 작은 붉은 점, 그 점을 따라 흐르는 하늘빛 줄기와 초록 잎사귀의 온유한 붓질로 푸근한 리듬을 만든다. 마치 아이들이 손잡고 둥글게 노는 모습처럼 색과 형은 서로를 끌어안아 언어 이전의 기호가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꽃의 마음>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정서를 응축한 한마디로 다가온다. 화려한 개화 대신 묵묵히 결실을 건네는 무화과처럼 그림 속 꽃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주변을 살피며 잔잔한 결을 짓는다. 남보라빛 배경은 피어나지 못해 끓어오르는 어린 마음 같기도, 그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려는 품 같기도 하다.

빨간 꽃과 파란 꽃이 온갖 놀림을 견디는 동안에도 무화과는 묵묵히 열매를 내어준다. 화면에 퍼진 노란 원은 초장의 인내가 중장을 지나 종장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흐름을 닮았다. 한가운데의 작은 붉은 점은 말없이 건네는 달콤한 이타의 마음처럼 우리의 숨은 헌신을 떠올리게 한다. 시와 그림은 서로를 비추며 독자의 마음에 잔물결 같은 여운을 남긴다.

아빠와 강에 갔다가
돌멩이 하나 주워왔다.

가만히 귀에 대면
물새들 울음소리

손으로 문질러보면
피라미도 폴짝 뛴다.

- <돌멩이 하나>전문

민병도 시인의 동양화, '道法自然- 들풀'

민병도 화백의 작품 <道法自然– 들풀>과 동시조 <돌멩이 하나>는 서로 다른 매체 속에서 같은 언어를 건넨다. 하나는 색과 형으로, 다른 하나는 시어와 감각으로 자연을 전한다. 두 작품을 함께 놓고 바라볼 때 우리는 ‘들풀’처럼 소외되고 작지만 살아 있는 것들과 ‘돌멩이 하나’가 품은 세계와 소통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만남을 관통하는 철학은 화백이 즐겨 쓰는 화두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온 이 말은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는 뜻으로, 억지나 꾸밈없이 스스로 그러한 상태가 가장 큰 길임을 가리킨다. 민병도 화백은 이 이치를 예술의 근본으로 삼는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들풀 한 포기와 돌멩이 하나까지도 그 자체로 온전한 우주로 바라보며 화폭과 동시조의 행간에 담는다.

시조 속 아이는 강가에서 주운 작은 돌멩이를 통해 세계의 미세한 신호를 듣는다. 귀에 대면 들려오는 물새들의 울음, 손으로 문지르면 튀어오르는 피라미의 생기. 이 돌멩이는 마음을 기울일 때 감각을 열어 주는 작은 우주다.

화백의 <들풀> 역시 화면 중심의 원형 안에 무수한 들풀 형상이 추상적 붓질로 교차되어 있다. 손바닥에 올린 돌 하나가 그 안에 강물과 하늘과 새와 물고기를 품듯, 이 원형의 장(場)을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생명들의 속삭임이 가득하다. 화면을 감싸는 수직의 선들은 그 생명들이 머무는 우주의 결을 이루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귀 기울이게 한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동심의 시선은 자연 하나하나를 결코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의 눈은 돌멩이 하나를 통해 생명의 신호를 듣고, 화가는 들풀의 떨림을 화면 속 우주로 키워 낸다. 들풀 하나, 돌멩이 하나가 세상과 통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작은 것의 위대함과 삶의 감각을 다시 배운다. 이것이 민병도 화백이 말하는 도법자연의 예술이자 <돌멩이 하나>가 전하는 동심의 언어다.
 

2. 부름에서 시작된 관계 맺기

‘존재는 언제부터 가치를 얻게 될까?’라는 물음은 오래된 철학의 주제이자 오랜 시간 ‘시’가 응답해온 질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시의 대답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작동한다. 존재는 이름을 얻는 순간, 혹은 누군가의 감각에 닿는 어떤 기척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민병도 시인의 동시조에는 이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의 감각’을 살뜰히 붙드는 시선이 깃들어 있다. 이 장에서 함께 들여다볼 <씨앗>, <미미>, <봉숭아 꽃>은 바로 그런 존재의 시학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슴이 콩닥콩닥
땅 한번 내려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꽃잎이 지기도 전에
이사 갈 집 걱정이네.

- <씨앗> 전문

<씨앗>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에 발을 디딘 존재의 설렘과 불안, 그리고 삶의 자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나아가려는 내면의 동요를 담고 있다.

왜일까. 이 짧은 시를 읽는 동안 자연스레 초등학교 입학식 풍경이 떠오른다.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낯선 줄에 선 아이들. 그 곁에서 함께 긴장한 마음으로 첫 아이를 입학시키는 부모의 모습이 겹쳐진다. 하늘 한번, 땅 한번 바라보며 아이가 새로운 삶 속에서 무사히 관계 맺고 자라날 수 있을까 조심스레 염려하는 마음. 이제 막 싹이 튼 씨앗처럼, 그 존재를 바라보는 이의 눈에는 어느덧 졸업식과 이후의 삶까지 담겨 있다. 자라날 존재를 믿고 응원하는 마음이 동시조의 행간 행간에 베어든다.

혹 누군가에겐 이런 해석이 엉뚱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는 시인이 썼지만, 독자와 만나는 순간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독자는 각자의 시간과 감정 속에서 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자신만의 씨앗 하나를 피워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적 풍경은 시의 마지막 연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꽃잎이 지기도 전에/ 이사 갈 집 걱정이네’라는 시구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존재 안에 이미 삶의 감각과 방향성이 움트고 있음을 상징한다. 삶은 언제나 피어나기 전부터 시작되고, 존재는 다가올 미래를 향해 묵묵히 준비한다. ‘이사 갈 집’이라는 표현은, 존재가 시간과 관계의 경계에 서서 삶을 계획하고 있다는 은유처럼 다가온다. 그 집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지만 씨앗 안에 미지의 설계도가 숨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작은 떨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가올 봄을 함께 기다리는 것이다.

미미는 우리 집 막내,
고양이 이름이다
‘미미, 미미’ 부르면
‘야옹 야옹’ 대답한다.
이름을 불러주면서부터
한 가족이 되었다.

- <미미>전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누군가를 세상에 들이며 관계의 문을 여는 일이다. 민병도 시인의 <미미>는 고양이라는 생명을 향한 부름과 그에 대한 다정한 반응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미미, 미미 부르면/ 야옹 야옹 대답한다”는 시구에는 ‘인정받고 관계 맺음을 시작하는’ 깊은 상호성이 담겨 있다. 이때 미미는 반려동물을 넘어 불림과 반응의 언어 속에서 ‘우리 집 막내’가 된다.

이 시의 귀여운 현장이 자연스레 상상된다. 동시조 <미미>를 읽자마자 필자는 길고양이 ‘토리’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낯설었고, 고양이에 대한 선입견 탓에 나는 망설이며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순간들을 지나 조심스럽게 ‘토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토리는 내 삶 안으로 들어왔다.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는 단순한 호명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말의 손 내밈이었다. 이후 삼백여 일을 함께하며 나는 그 이름으로 매일 사랑을 건넸고, 때로는 위로를 받고 웃음을 되돌려받았다.

‘미미’라는 이름과 ‘야옹 야옹’이라는 대꾸 속에도 그런 나날의 온기가 배어 있지 않을까. 서로를 알아보고 부르며 주고받은 정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나는 그 진심을 토리를 통해 배웠다.

어쩌면 이 한 장면을 담은 <미미>는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진실을 비추는 작품이 아닐까. 우리는 누군가를 부르고 또 누군가에게 불리며 살아간다. 사람은 그 부름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고 관계는 그런 언어의 흐름 속에서 자라난다. 시인은 이 동심 안에서 이름 짓기가 삶을 향해 나아가는 말의 의식임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이 동시조의 독자들 역시 각자의 ‘미미’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고양이든 아니면 매일 그리운 사람이든 말이다.

봉숭아 씨를 받아
손바닥에 올려보면

쌔근쌔근 새록새록
숨소리가 들린다.

손톱에 꽃물 들이는
잠꼬대도 들린다.

- <봉숭아 꽃> 전문

손바닥 위 작은 봉숭아 씨앗은 아직 꽃이 아니지만 두근두근 이야기 가득 품은 주머니 같다. 귀를 기울이면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와 씨앗이 꿈틀거리며 눈을 뜨려 하는 순간이 손바닥 깊숙이 전해진다. 꽃은 처음부터 화려하게 피지 않는다. 소리와 촉감처럼 살금살금 신호로 먼저 다가와 우리 마음을 간질인다.

봉숭아는 벌써 고운 꽃물을 준비한다. 아직 피지 않았는데도 꽃물 기척이 잠꼬대처럼 번져 나와 누군가의 손끝을 살포시 물들일 꿈을 꾼다. 그 설렘은 어린 날 마당에서 놀다 물든 손톱 기억을 살며시 끌어올린다.

필자는 봉숭아 꽃에 얽힌 기억을 품고 있다. 꽃을 좋아해 동네 구석구석에서 꽃모를 모으던 코로나 시기, 시댁 마당은 어느새 작은 꽃동산이 되었다. 화려한 꽃들 사이 돌담을 지키고 선 봉숭아를 발견한 날, 남편과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꽃물을 들여주었다. 으깬 꽃잎을 손톱에 얹고 비닐로 칭칭 감으며 첫눈이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던 마음도 함께였다.

쌔근쌔근 새록새록 숨소리를 품고 있는 봉숭아 씨앗은 마침내 꽃이 될 것이고 사람들의 사랑도 그 꽃빛처럼 곱게 물들어 갈 것이다.

봉숭아 씨앗 하나가 가르쳐 준 것은 기다림과 설렘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결이 언젠가는 붉은 빛으로 피어날 거라는 다정한 약속.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손바닥 위 작은 씨앗을 바라보며, 마음속 어느 구석에 남아 있는 동심을 살포시 깨워 본다.

민병도 시인의 동시조는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존재를 부르고, 동심이라는 감각을 통해 자연 가까이에서 삶의 본질에 다가간다. 결국 <씨앗>이 전하는 설렘과 두려움, <미미>의 다정한 부름과 응답, <봉숭아 꽃>의 숨죽인 기다림은 모두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존재는 작고 연약해도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순간 빛을 얻고, 이름을 통해 관계를 맺으며, 시간이 익히는 인내로 마침내 스스로를 꽃 피운다.
 

3. 물활론적 상상으로 포용하는 시학

사물은 말이 없지만 바라보는 눈과 느끼는 마음에 따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병도 시인의 동시조에는 이러한 ‘움직이는 사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말 없는 꽃씨는 누군가의 시선 앞에서 재빠르게 숨고, 밥그릇은 사랑의 크기를 헤아리는 도구가 되며, 길 잃은 바람은 꽃잎에 기대어 쉰다. 이 모든 풍경은 아이의 감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이처럼 시인은 정지된 사물에 내면을 부여하고 그 안에 감정과 의지를 숨겨둔다. 이는 ‘사물이 살아 움직인다’고 보는 물활론적(物活論的, animistic) 상상에 기반한 감응의 언어다. 동시조의 짧고 정갈한 형식은 이런 생명의 흔들림과 마음의 떨림을 더욱 정제된 리듬으로 담아낸다. 결국 이 시들 속에서 세계는 다시 살아나고 아이는 작은 것들과 교감하며 세상을 배운다.

바라만 보는 데도 꽃씨가 떨어진다
새들이 오기 전에 찬바람 불기 전에
서둘러 제 자리 찾아 재빠르게 숨는다 

- <꽃씨> 전문

꽃씨는 재간둥이다. 올해 처음 겪은 일이다. 작년 수돗가 근처에 심었던 매발톱이 어느새 아파트 모서리 땅으로 이사를 갔고 올봄 그곳에서 다시 꽃을 피워냈다. 바람이 옮겼을까 나비가 데려갔을까 아니면 놀러온 고양이의 발끝에 살짝 묻어갔을까. 민병도 시인의 <꽃씨>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꽃들은 해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리를 옮기며 새로운 곳에서 은근히 피어난다는 것을. 꽃밭을 가꾼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몸짓이 조금은 느껴진다.

이 동시조는 짧지만 유쾌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꽃씨는 말도 없고 손발도 없지만 누군가 쳐다보기만 해도 툭 아래로 내려간다. ‘바라만 보는 데도’라는 표현에는 작은 생명체의 놀람과 기민한 반응이 깃들어 있다. 그 모습은 오히려 바라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시는 말보다 먼저 반응하는 몸의 언어이자 본능처럼 움직이는 존재들의 감각을 생동감 있게 포착해낸다.

이 작품의 문학적 힘은 ‘꽃씨’라는 사물에 생명과 의지를 부여하는 물활론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정지된 자연물에 내면을 입히고 그 존재를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주체로 상상하게 한다. 이는 동심의 감각을 끌어안으며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감응의 언어로 작용한다. 꽃씨가 제 발로 땅을 찾아가고 스스로 숨는다는 상상은 단지 귀여운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생명 있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품은 문학의 본령을 드러낸다.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꽃씨들이 깡총깡총 작은 다리를 굴리며 땅속 어딘가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생생한 환상은 언어가 상징과 감각을 매개로 어린이의 세계를 열어주는 문학의 고유한 기능을 상기시킨다. 숨는다는 것 그 자체가 동심의 특권일 수 있다. 숨바꼭질하며 크는 아이들, 때로는 작아지는 몸짓 속에서 더 반짝이는 순간을 만난다. 꽃씨는 말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그 자리에 작은 웃음 하나를 남긴다. 그리고 시는 그 웃음 속에 삶의 리듬을 담아 전한다.

밥 그릇에서 밥 나오고
물 컵에서 물 나오지만
저마다 저울로 잰 듯한
그릇이고 한 잔인데
몰랐네 엄마라는 그릇
바다보다 크다는 걸.

- <이상한 그릇> 전문

물컵엔 물이 담기고 밥그릇엔 밥이 담긴다. 너무도 익숙한 일상의 이치를 따라가던 시선은 마지막 줄에서 문득 멈춰 선다. ‘몰랐네 엄마라는 그릇/ 바다보다 크다는 걸.’

이 짧은 두 줄의 울림은 깊고도 넓다. 어린 화자는 이제서야 알게 된다. 엄마라는 존재는 단지 무언가를 담아내는 평범한 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숨어 있었는지를. 자신이 헤아리지 못했던 사랑의 크기를.

시의 화자는 어린이다. ‘저마다 저울로 잰 듯한/ 그릇이고 한 잔인데’ 이 구절은 세상 모든 사물이 정해진 규칙과 분량을 따르고 있다고 믿는 아이의 인식을 보여준다. 이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처럼 아이의 세계가 일정한 법칙과 분량으로 정돈되어 있다고 여기는 질서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엄마라는 그릇은 그 법칙에서 벗어난다. 엄마는 따지지 않고, 경계를 세우지 않는다. 시는 그 마음을 ‘바다보다 크다’는 이미지로 확장하며 아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도 깊은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보다 더 넉넉한 것이 바로 ‘엄마라는 그릇’이다.

‘이상한 그릇’이라는 제목은 동심의 눈으로 본 세상의 반전을 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작고 평범한 그릇이지만 그 안에 바다보다 큰 사랑이 담겨 있다는 이 시의 메시지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의미의 전복(顚覆)을 통해 드러낸다. 이는 겉과 속의 괴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역설적 표현이며, 동시에 아이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을  비추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그 깨달음은 유쾌하고도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기에 위트가 살아 있다.

아이는 모든 사물이 제 역할과 용량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엄마라는 그릇은 그 질서에서 벗어난다. 이 낯선 반전은 놀라움에서 출발해 포근한 감정으로 이어지며, 동심은 종종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사랑의 진실에 도달한다. 결국 ‘이상한 그릇’은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을 배워가는 첫 질문이며 일상의 사물 속에 숨어 있던 감정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엄마는 담는 존재가 아니라, 기꺼이 넘치도록 채워주는 존재라는 깨달음. 그 사실을 가장 단순한 사물의 이미지로 풀어낸 이 시는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해가 잠자러 가면
들도 산도 따라가네

길 잃은 바람마저
꽃의 품에 잠드는데

캄캄한 어둠을 뚫고
물소리만 환하네

 - <물소리> 전문

동시조 <물소리>는 밤을 조용히 밝히는 시다. 제목은 ‘물소리’이지만, 시는 해가 잠자러 가는 풍경에서 시작된다. 해가 잠든다고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아이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들도 산도 해를 따라 조용히 잠들고, 길을 잃은 바람은 꽃의 품에서 쉬어 간다. 자연 전체가 함께 숨 쉬며 잠드는 모습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포근하게 감싼다.

‘길 잃은 바람’이라는 표현에서는 아마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출 것이다. 바람도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상상은 어른에게는 낯설지만 아이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 바람이 꽃잎 사이에 기대어 쉰다는 장면에서는 품을 내어주는 마음과, 기꺼이 기대는 마음이 함께 전해진다. 작고 여린 존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다정한 동행이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밤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물소리만 환하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아이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을 만난다. 들리는 소리가 빛이 된다는 말은, 어쩌면 아이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소리가 풍경을 밝히는 이 마법 같은 감각은 동심이 가진 세계관의 빛이다.

<물소리>는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서로 기대어 쉬는 모습을 통해 동심의 눈이 세상을 여는 방식을 보여준다. 민병도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말한다. 동심이란 단지 어린 시절의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는 마음이라고.

민병도 동시조의 세계는 꽃씨와 밥그릇, 길 잃은 바람 같은 사물에 감각과 숨결을 불어넣으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언어를 들려준다. 물활론적 상상은 여기서 존재와 존재 사이를 잇는 다리다. 사물은 말을 하지 않지만 시인의 귀와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마음을 건넨다. 그렇게 움직이는 사물들은 우리에게 타자를 대하는 새로운 윤리를 일깨운다. 누구도 작거나 하찮지 않다는 믿음, 그리고 서로를 향해 살며시 다가가는 마음. 그것이 민병도 시학이 동심을 넘어 모두에게 건네는 다정한 초대장이다.
 

4. 기다림을 배우는 동심 철학 

민병도 시인의 동시조에는 시간이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와 감각의 변화를 이끄는 내면의 흐름으로 등장한다. 봄의 출발에서 겨울의 인내를 거치는 자연의 시간은 시 속에서 하나의 윤리적 여정이 된다. 그 여정은 어린 화자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 안에 담긴 기다림과 수용, 상처와 자람의 이야기는 어른의 마음에도 고요히 가닿는다. 

머나먼 하늘 위에
꽃 한 송이 바치려고

이른 봄 길을 떠나
천둥 불볕 다 참았지

무서리 하늘 뜻 살펴
꽃다발을 바치려

- <국화> 전문

동시조 <국화>는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의 기다림을 아이의 눈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시의 화자는 이른 봄부터 길을 나선다. 천둥도 불볕도 다 견디고 마침내 무서리 내린 가을 아침 하늘 뜻을 살핀 뒤 꽃을 바치려 한다. 짧은 시 속에 담긴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만이 아니라 묵묵히 견디는 마음의 자리를 보여준다.

동시조라는 장르의 특성상 이 시는 어렵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참는 마음’이라는 다소 깊은 주제를 아이의 말투처럼 간결하게 풀어낸다. “천둥 불볕 다 참았지”라는 대목을 떠올리면 방학 숙제를 끝낸 뒤 선생님께 자랑하듯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순박한 어조 덕분에 인내라는 성숙한 감정이 부담 없이 스며든다. 천둥은 두려움, 불볕은 고단함일지라도 화자는 그 모든 순간을 놀라운 평정으로 통과해 간다. 시인이 어린 화자에게 맡긴 이 서술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힘든 시간을 견딘 일상을 자연스럽게 환기하도록 돕는다.

<국화>는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감탄하기보다는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조다. 어린 독자에게는 봄부터 가을까지 기다리며 물을 주고 햇살을 쬐어 주는 마음을, 어른 독자에게는 오래 버틴 시간 끝에 찾아오는 작은 보상을 떠올리게 한다. ‘꽃’이라는 한 점의 이미지가 모든 시련을 한 호흡으로 아우르며 시가 끝날 때 남는 것은 풍성한 색과 향이 아니라 진득한 위로다. 짧은 시지만 한 번 피어난 여운은 쉽게 스러지지 않는다.

해를 향해 팔 벌리던
여름은 꿈이었을까

칼을 든 바람 앞에
긁힌 상처 아프지만

어깨에 별이 점드는
하늘차지 내 차지.

 - <겨울나무>전문

별은 마음의 빛이다. 민병도 시인의 <겨울나무>는 계절을 견뎌낸 나무를 통해 존재의 성장을 비춘다. 그러나 그 시선은 어른의 관념이 아니라 아이의 눈빛에서 시작된다. “해를 향해 팔 벌리던 여름은 꿈이었을까”라는 첫 구절은 동심의 언어다. 해를 향해 팔을 벌린다는 말은 그저 몸짓이 아니다. 빛을 향해 마음을 활짝 내주던 여름날의 희망과 순정을 품은 기억이다.

하지만 그 여름은 지나고 계절은 차가운 전환을 맞는다. “칼을 든 바람”이 불고 가지마다 남은 긁힌 자국이 상처처럼 아리다. 시인은 그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 별이 하나씩 떠오르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늘에만 있을 줄 알았던 별이 나무의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상처는 빛으로 바뀌고 고통은 희망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이는 울음을 삼키는 대신 아픈 곳에 별을 붙인다. 이 상상 속 위로는 문학의 본래 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별이 된 내 친구를 떠올렸다. 처음엔 이별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처였지만 이제는 꽃잎처럼 웃고 있는 하얀 별 하나가 되어 어딘가에 떠 있는 듯하다. 동심은 아픔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그 위에 빛을 얹을 줄 알고 슬픔의 자리에 노래를 놓는다.

<겨울나무>는 그런 마음을 기억하게 한다.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순정의 힘. 삶의 상처 위에 별을 새겨 넣는 상상.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진짜 힘이 바로 그 마음이다. 이 시는 동심의 감각이 문학이 될 때 어떤 빛을 지니는지를 보여준다.

파란 새싹 닮으려고 풀에게 물었어요
해를 이고 달을 지고 별마저 품은 뒤에
몸에서 풀냄새 나면 맨발로 오라네요.

- <파란 새싹 닮으려고> 전문

오늘 필자의 손바닥 꽃밭에서 파란 새싹 곁에 있는 또 다른 파란 새싹을 보았다. 서로 꼭 붙어 있으면서도 억지로 밀거나 덮지 않고, 자연스레 곁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같은 빛을 품어내듯 닮은 색을 함께 만들어내며 나름의 풍성한 풀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그 풀숲에서 나는 향기가 풋풋해서 좋았다. 

민병도 시인의 <파란 새싹 닮으려고>는 어린 화자가 풀에게 다가가 묻고 듣는 과정을 통해 ‘자람’의 비밀을 탐색하는 시다. 시는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시작된다. “파란 새싹을 닮고 싶다”는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그리움에 가까운 동경이다. 이처럼 맑고 투명한 열망은 동심에서 비롯된다.

어른은 잘 묻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알고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질문한다.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렇게 푸르게 자랄 수 있는지, 풀에게 다가가 묻는다. 시 속 아이의 물음은 생명의 비밀에 다가가려는 작은 용기이자, 배우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풀의 대답은 뜻밖이다. 아이는 풀냄새 나는 몸이 되려면 ‘해’를 이고, ‘달’을 지고, ‘별’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마치 풀이라는 스승이 전해주는 성장의 비밀 같다. 그것은 단지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온몸으로 계절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맨발로 오라고 한다. 맨발은 어떤 꾸밈도 없이 대지와 맞닿은 진짜 몸이다. 감추지 않은 존재,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서야 비로소 풀냄새가 밴다. 성장도 그런 것 아닐까. 겉모습이 아니라 시간과 햇살과 바람을 품은 몸으로 땅 위에 맨발로 서 보는 일.

그리고 이제 하나 더 알게 된다. 풀들이 초록빛으로 무성해지는 것은 서로 곁을 내어주기 때문이라는 걸. 억지로 앞서려 하지 않고 무리하게 혼자 빛나려 하지 않으며, 함께 햇살을 나누는 법을 배워간다는 걸. 이 시에서 동심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는 태도 그 자체다. ‘물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대답을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아이는 그렇게 자란다. 파란 새싹은 그래서 색깔이 아니라 태도다. 곁을 내어주며 함께 자라는 마음, 풀에게 길을 묻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진짜 자람의 시작이 아닐까.

이 세 편의 시에서 민병도 시인은 시간을 견디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상처 위에 별이 떠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바람을 지나야 하는지, 풀냄새 나는 마음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품어야 하는지. 시 속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흐름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하나의 태도다. 

어린 화자들은 그 시간을 다그치지 않는다. 묻고 듣고 기다리는 법을 안다. 동심은 시간을 참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시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윤리이다. 민병도 시의 계절들은 그래서 아름답다. 꽃이 피기까지, 별이 뜨기까지, 풀잎이 자라기까지의 모든 시간이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민병도 시인의 예술생태계

민병도 작가는 시와 그림, 두 세계를 함께 건너왔다. 영남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을 전공한 화가이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시조에 첫발을 내디딘 시조 시인이다. 그 뒤 ≪설잠의 버들피리≫를 포함한 시조집, 선집, 번역시조, 수필, 평론, 시화, 화집 등 40여 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시조작품상, 정운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동리상, 가람시조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외솔시조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받았으며, 화가로서도 30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시조21≫ 발행인, 목언예원출판사 대표, 들풀시조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하며 문학과 미술이 교차하는 예술 공간 ‘목언예원’을 가꾸고 있다.

작가는 동심의 투명한 감성을 따르면서도 시조 형식의 본질은 놓치지 않는다. 그는 “요즘 동시조가 동심만 좇다 보면 전통 율격의 질서를 잃기 쉽다”라고 말하며, 초장·중장·종장의 구조를 바탕으로 시조 고유의 틀을 단단히 세우고자 했다. 형식이 단단해야 감정의 떨림도 오롯이 전달된다는 시적 신념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이러한 태도는 동시조의 정제된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고전의 장단을 품되 그 울림은 경쾌하고 유연하다. 어린이는 노래하듯 읊조릴 수 있고, 어른은 잊고 지냈던 정서의 골격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의 시조는 붓끝처럼 섬세하고, 그림은 시구처럼 조용히 말을 건넨다. 언어와 이미지, 아이와 어른, 시와 삶이 한 자리에 머무는 이 동시집에는 시인의 시선과 예술적 사유가 자연스레 녹아 있다. 말보다 먼저 반응하는 존재의 몸짓, 마음을 감싸는 언어의 따뜻함, 시와 그림이 맞닿는 동심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이 책은 동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속에 어린아이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 한다면, 민병도 시인은 그 숨결을 지켜온 작가이다. ≪구름 과자≫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빚어낸 시집이다. 시와 그림을 함께 품은 이 작업에는 그가 오래 지켜온 예술의 뿌리와 결이 오롯이 스며 있다. 시조의 언어와 시각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이 책은 민병도 시인의 진심과 동심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결실이며, 우리 역시 그 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 의 동심을 꺼내어 그 언어에 살며시 기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