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할망을 ‘늙음’이 아니라 ‘젊음’으로 새로 해석해야”

[미디어 窓] 설문대할망전시관 감상평

2025-06-26     김형훈 기자

거대 전시관에 이것저것 담으려 욕망 드러내

어린이 뛰노는 공간 ‘제주의 미래’ 인기몰이

물장오리에 빠져 죽은 이야기로 정리돼 다행

중국 <신선전>의 ‘마고’를 참고할 필요 있어

설문대할망전시관 내부.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 김형훈 기자] 거대함의 욕망은 끝이 없다. 건축물이 그렇다. 흔히 ‘마천루’라 불리는 하늘로 솟아오르려는 욕망은 경쟁을 자극한다. 마천루의 욕망에 빠진 이들은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건축물을 바라보며 소망을 이뤘다는 듯이 흡족해한다. 그게 그렇게 기쁜가? 기뻐할 일인가? 설문대할망전시관(이하 전시관)을 보면 그런 느낌이다. 애당초 전시관을 만들겠다는 도전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문제는 지어졌다는 데 있다. 지어졌으니 망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전시관은 설문대할망을 닮아서인지 거대하다. 거대하다 보니 이것저것을 담았다. 제주 사람들의 삶과 역사, 신들의 이야기, 설문대할망 이야기 등이 거기에 있다. 백화점이라고 해야 할까, 박물관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저것을 담다 보니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여기에 어린이들이 뛰노는 ‘제주의 미래’라는 놀이공간도 있다. 고육지책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전시관이다. 이것저것을 담지 않았으면 어떤 전시관이 됐을까? 그런 고민도 해본다. 현재 눈에 보이는 전시 형태를 탓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앞으로 나갈 방향성을 찾는 작업을 진지하게 해봤으면 한다. 그래서 글을 쓴다.

설문대할망전시관 중 '제주의 미래'. ⓒ미디어제주

전시관은 현재 무료 관람이다. 주말이면 사람이 넘친다. 특히 ‘제주의 미래’는 아이들로 꽉 차 있다. 이것저것을 담으면서 번잡해지긴 했으나, 사람을 담는 데는 일정 부분 성공한 셈이다. 전시관을 찾을 미래세대인 어린이들에게 ‘맛보기’의 중요성을 알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전시관 이름에 ‘설문대할망’이 들어가 있으니, 이름에 맞는 콘텐츠를 발굴하는 일이 남았다.

전시관 개관 소식은 기자의 눈과 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거대해서가 아니다. 과연 설문대할망을 어떻게 소개했을지가 궁금했다. 우려되는 부분이 적잖았기에 그렇다. 설문대할망은 이야기 요소로는 ‘신화’에 접근하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시중에서 ‘신화’라고 대접을 해주지만, 설문대할망은 ‘신화’에 미치지 못하는 ‘전설’에 가깝다. 전설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산천이나 역사적 인물에 이야기를 입히는 걸 말한다. 제주도 자연 곳곳의 이야기는 설문대할망이 덧붙여져 전설로 남았다. 우도가 그렇고, 송당리 솥덕, 물장오리 등이 그렇다. 온 섬이 설문대할망 전설로 도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신화는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데, 설문대할망은 아쉽게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 때문에 신화로 접근하기는 아직 부족하다. 여기서 하나 더, 설문대할망의 죽음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있다. 기자를 전시관으로 이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문대할망은 서로 다른 전설이 합쳐져 이상한 이야기로 진화했다. 설문대할망은 물장오리에 빠져 죽는데, 어느 순간 오백장군 설화와 합쳐지며 그의 죽음을 미스터리로 빠져들게 했다. 오백장군은 설문대할망과 연관이 없는데, 아들로 둔갑하고 만다. 심지어 설문대할망이 아들인 오백장군을 위해 죽을 쑤다가 솥에 빠져 죽고, 아들들은 어미가 솥에 빠져 죽은 줄도 모르고 죽을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로 진화한다. 그건 신화로서는 절대로 이야기될 수 없는 구조라는데 있다. 여기에 유홍준이 2012년에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제주편>에 죽솥 이야기가 등장하며, ‘오백장군은 설문대할망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번진다. 이후 물장오리에 빠져 죽은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사라지고, 죽솥에 빠져 죽은 안타까운 설문대할망의 모습으로 확산됐다. 기자는 전시관에 이 부분이 어떻게 설명돼 있을지 궁금했다.

다행이랄까. 전시관에서 영상으로 마주하는 설문대할망(전시관 상설 4관에서 볼 수 있다)은 물장오리에 빠져 죽는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그러지 않고 설문대할망을 죽솥에 빠져 죽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면 전시관은 엉망이 됐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바라본 설문대할망전시관. ⓒ미디어제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족함이 가슴에 남는다. ‘할망’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할망’은 숫자를 나타내는 ‘늚음’으로 해석하는 데 문제가 있다.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설문대할망은 우리나라 곳곳의 지형창조형 거인인 ‘마고할미’ 계열이다. 장한철의 <표해록>을 보면 “오랜 옛날 초기엔 선마고(詵麻姑)가 있었다. 서해로 걸어서 내려왔고, 한라산에서 놀았다.”고 쓰고 있다. <표해록>은 설문대할망이 마고할미 계열임을 일깨워 주는 역사적 흔적이다.

그런 점에서 ‘마고’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면 앞으로 전시관에서 설명할 설문대할망을 새롭게 변신시킬 수 있다. ‘할망’은 단순한 ‘늙은 여성’이 아니라 ‘거대한 존재’ 혹은 ‘범접하지 못할 존재’로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고할미의 실제 사료를 찾아보면 그렇게 나오기 때문이다. 중국 문헌 <신선전>에 마고가 등장하는데, 18~19세의 아리따운 여성으로 표현된다. <신선전>에 등장하는 마고의 특징을 잠깐 옮기면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① 수백 년 이상 죽지 않고 사는 존재임에도 늘 18~19세의 젊은 여성
② 손톱은 마치 새 발톱과 같음
③ 정수리는 상투를 틀었는데, 나머지 머리칼은 허리까지 늘어뜨림
④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기린’ 고기를 먹음
⑤ 쌀을 진주로 바꾸는 재주가 있음

마고는 수백 년을 살면서 죽지도 않고, 18~19세의 젊음을 그대로 유지한다. 늙은이로 표현되지 않는다. 설문대할망에 부여된 ‘할망’이라는 격도 나이듦의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신선전>에 등장하는 마고의 모습처럼 해석해 보면 어떨까. 제주를 창조한 여성으로서 상징성은 ‘나이’에 있지 않고, 오히려 젊음이라는 ‘강인한 생명력’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됐으면 하는 소망이다. 어쩌면 그렇게 해주는 게 창조신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