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아커피처럼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지 않아요”
[미디어 창] 순아커피에서 느끼는 건축 단상
올해 제주도 우수 건축자산으로 등록
사라질 건물을 건축가 노력으로 재생
‘우수 건축자산’에 다양한 혜택도 필요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사람들은 기억을 먹고 산다. 거리를 걷다가도, 노래를 들으면서도, 책을 넘기면서도, 앨범을 뒤지면서도…. 마음의 어느 한쪽에 숨겨둔 기억은 불쑥불쑥 재생되어 나오곤 한다. 그런 기억이 없다면 ‘추억 보정’도 있을 수 없다. 지난 일이 좋게 보이는 ‘추억 보정’은 어쩌면 인간만이 지닌 전유물이다.
건물을 볼 때도 그렇다. 거리를 걸을 때도 그렇다. 오죽했으면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다음처럼 얘기했을까.
“길은 풍경의 저장창고다. 할아버지가 보았던 풍경을 아버지가 바라보고 나도 같이 풍경을 본다는 것은, 나 또한 길의 역사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봤던 길은 누군가가 이미 봤던 길이며, 그걸 함께 본다는 건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다. 여기엔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다.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지고,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덕분에 기억을 공유하게 된 건축물을 하나 꼽고 싶다.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순아커피’다. 반갑게도 순아커피는 올해 ‘제주특별자치도 우수 건축자산’으로 이름을 올렸다. 제주도가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우수 건축자산에 공공 건축물이 아닌, 개인이 지닌 건축물이 오른 건 처음이다. 기억을 공유하며 지켜낸 건축물 ‘순아커피’가 값지며 소중한 이유다.
순아커피는 오랜 기억의 산물이다. 흔히 말하는 적산(敵産) 가옥이다. 순아커피의 ‘순아’는 이 집주인의 큰어머니 이름이다. 일본에서 생활하며 돈을 번 큰어머니가 집을 사달라며 제주에 돈을 부쳤고, 그렇게 사들인 집이다. 큰어머니는 가끔 제주에 올 때 이 집에 들르곤 했으나, 정작 이 집에 산 이들은 현재 집주인 가족이다. 큰어머니는 집세도 받지 않고, 남편 동생네 가족들을 살게 해주었다. 집주인도 여기서 태어났다.
사람이 사는 집은 기억이 누적된다. 중국집도 여기에 있었고, 하숙을 치기도 했고, 안경집도 잠깐 여기를 거쳤다. 순아커피가 되기 전엔 숙림상회였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주인의 어머니가 이 집을 사겠다고 하자, 일본에서 싸게 내주었다. 마치 선물처럼.
숙림은 집주인의 어머니 이름인데, 현재 이 집은 큰어머니의 이름인 ‘순아’를 달고 있다. 큰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사실 이 집은 사라질 운명이었다. 완전 없애버리고, 새로운 건물로 올릴 계획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이어서 보존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때 탐라지예건축사사무소 권정우 소장의 눈에 들어왔다. 권정우 소장은 “살리자”며 집주인을 설득했다. 1주일을 설득한 끝에 옛 정취를 남기며 새로운 얼굴을 달 수 있었다. 권정우 소장은 새로 태어난 이 건물의 역사를 보여주는 컨셉을 집주인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2층으로 향하는 삐걱거리는 계단, 2층에 오르면 다다미방에 일본 주택 고유의 ‘도코노마’가 보인다. 벽을 뜯은 곳은 흙과 대나무로 채운 흔적을 그대로 뒀다. 계단 밑에는 벽지를 신문으로 쓴 시대상이 보인다. 다 기억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수십 년의 사이를 두고 기억을 공존하는 책의 이야기는 마치 순아커피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쇼타가 한 말이 있다. “과거의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진짜 굉장한 일이잖아.”
순아커피에 있으면 예전 살았던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그려진다. 소설처럼 과거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순아커피가 주는 매력이다. 하지만 오랜 옛 건물 모두가 순아커피처럼 되는 건 어렵다. 현실의 벽이 크다. 지금의 건축법으로 따지면 예전 건축물을 재생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별도의 조례를 제정해서라도 쉽게 재생하게 도와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순아커피 마냥 우수 건축자산이 될 건축물을 잊게 된다. 재생하기 귀찮아서라도 기억이 누적되고 공유된 건축물을 없애버리는 이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지 않게, 우수 건축자산이 만들어질 토양을 탄탄하게 해주자. 행정이 그렇게 해주어야지, 누가 하랴. ‘우수 건축자산’이라고 동판만 건네지 말자. 우수 건축자산임을 알려주고, 다양한 혜택을 주는 일 역시 행정이 나서서 해줘야 한다.
순아커피에 간혹 들러 누군가의 기억을 훑곤 한다. 순아커피가 우수 건축자산이 되었다기에, 기념으로 순아커피를 찾았다. 순아커피 주인이 만든 차를 권정우 소장이랑 마시며 순아커피에 담긴 기억을 일일이 소환해본다. 그 자리에서 권정우 소장은 이런다.
“이런 자산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원도심에도 있고, 제주도에도 많이 있어요. 문제는 다음 세대에 어떻게 할 것인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