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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해둘 것인가
역사유적,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해둘 것인가
  • 이동현 시민기자
  • 승인 2005.11.21 09:14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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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산책로의 유적(1)-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우리 주변에는 예상 밖에 많은 유적들이 존재한다. 아무 생각없이 제주시내를 걷다보면 사적지를 알리는 표지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표지가 없지만 중요한 유적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유적들이다.

이번에 살펴볼 곳도 그런 유적 중에 하나이다. 제주가 자칫 전쟁에 휩싸일 뻔한 태평양전쟁 말기와 관련된 유적으로 아는 사람만 알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그런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끝으로 향하던 1944년부터 일본은 제주도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일본에게 더 이상 승기는 찾아 보기 힘들었다. 자신들도 그걸 알았던지 일본 본토 방위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일본본토 방위의 중요 기지 가운데 하나로 제주도가 낙점되었다.

때문에 1944년부터 일본은 제주도 요새화를 추진한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을 때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은 무려 74,781명에 이르렀다.

이중 한국인 군인과 군속을 제외한 병력 57,620명이 일본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 서울 57,100명, 광주 34,710명, 대구 13,480명, 부산 15,420명, 여수 680명 등과 비교해도 가장 많은 인원이다.

 또한 당시 제주도 상주 인구가 23만여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제주도 곳곳에 비행장과 진지들이 구축되었는데, 제주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별도봉에 있는 동굴진지이다.

오늘날 별도봉은 사라봉과 함께 제주시민이 가장 많이 찾는 산책코스가 되었다. 시민들이 자기가 편한 시간이면 아무 때나 찾아와서 산책도 즐기고 운동도 한다. 그리고 젊은 연인들은 산책 겸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평상시 찾는 별도봉은 너무나 평화로운 곳이다. 그런 곳에 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진 동굴진지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조차 모를 것이다.

일본군이 만든 동굴진지는 제주교대, 화북천과 나란히 만들어진 별도봉 산책로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지금은 나무로 그 입구를 봉쇄한 동굴입구를 여럿 볼 수 있다.

그 동굴입구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이 드나드기에 충분히 넓은 크기, 동굴입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진입로 등 어느 면으로 보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군이 만든 동굴진지라고 하면 동남아 지역 밀림 속에 있는 동굴진지들을 떠올릴 테지만, 우리와 너무도 가까운 곳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별도봉에 동굴진지를 만들었을까. 별도봉이나 사라봉의 정상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별도봉이나 사라봉 정상에 오르면 탁트인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

가슴이 탁트이는 시원한 풍경이지만, 군사적으로 볼 때 그곳은 적의 침입을 관측하기 아주 좋은 위치라고 볼 수 있다. 즉 일본군이 미군의 침입을 사전에 발견하고 대응하기 가장 좋은 위치가 바로 별도봉과 사라봉이었다.

그리고 별도봉은 바다쪽은 절벽이고, 육지쪽으로는 가파른 산세와 함께 화북천이 흐르고 있어서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때문에 일본군은 별도봉에 동굴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그 외에도 제주에서 가장 좋은 상륙지점 중 하나인 화북-삼양 바닷가를 관찰하고 방어하기에도 좋은 위치에 있다. 화북-삼양 바닷가는 과거부터 배가 드나들기에 좋은 지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귀양오는 사람들이 화북으로 입도했으며,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유적지가 삼양에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별도봉은 제주시 지역 방어에 유리한 지점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일본군이 만든 동굴진지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군이 제주도까지 진출하기 전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미군이 일본 본토 상륙을 위한 거점으로 제주를 공격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아마도 유황도나 오키나와 못지 않은 폐허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제주 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로에 만들어진 별도봉 일본군 동굴진지. 하지만 그곳에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표지판 하나 만들어져 있지 않다.

분명 일제강점기는 우리에게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그렇다고 당시 만들어진 유적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불쾌한 기억일지라도 유적은 유적으로서 인식하고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입구를 막아두고 내버려둔다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동현 시민기자는 제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석사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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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2005-11-23 09: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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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2005-11-22 23:04:19
저도 개방을 하자거나 그런걸 원하는 건 아니구요. 어떤 곳인지 알리는 표지판도 세우고, 그 입구들을 그냥 수풀에 가려져있게 하지 않는 정도의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뭐 장기적으로는 진지동굴을 역사교육에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동현 2005-11-22 23:00:43
질문 보고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화북-삼양 방면으로 삼별초가 상륙했다는 기록이 없네요. 아무래도 제가 다른 기록과 착각을 한 듯 합니다. 참고로 고려사에서 관련 기사를 올려드립니다. [정축丁丑에 김방경, 흔도, 홍다구, 희, 옹 등이 삼군을 거느리고 진도를 토벌하여 적을 대파하고 위왕僞王 승화후 온을 참살하자 적장 김통정은 여중餘衆을 거느리고 탐라로 들어갔다.]

별장 이문경에 의한 삼별초의 탐라 점령은 별님이 알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기사의 틀린 부분은 수정하고 싶은데...수정하는 방법을 모르겠네요. ^^;;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적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2005-11-21 16:33:53
삼별초의 별동대 이문경 장군이 상륙한 지점은 명월포.
제주성을 우회하여 동제원에 진을 치고
송담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그후 본진이 들어 오지 않았나요?
그러면 본진이 화북으로 들어 왔나요?

ㅈㅈ 2005-11-21 11:14:07
제주도를 요새화 하려는 일본의 계획은 1937년과 1944년의 두 시기를 통해 표면화됩니다.
이미 37년 난징 공격을 위해 제주도를 거점지이자, 중간 기착점으로서, 대동아 계호기의 전략적 요충지로 낙점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