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주어진 것인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인가.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그게 운명이니 어쩔 수 있겠니?',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다' 는 얘기에서는 운명은 전자에서 처럼 주어진 '필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도 얼핏보면 '필연적 운명'이 엿보인다.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도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그녀를 지켜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를 좀더 여유갖고 생각해보면 꼭 필연적인,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녀를 지켜야 하는 것도 주인공 남자의 '결심'과 '의지'가 다른 무엇보다 강했던 데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결심'과 '의지'가 강했기에, 또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그러한 방향의 '운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운명(運命)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말한다.
사람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간지(干支)로 나타낸 사람의 한 평생의 운수를 뜻하는 '팔자(八字)'와는 뜻을 분명히 달리한다.
때문에 팔자와 관련해서는 '팔자가 기구하다', '그런 팔자를 타고난 걸 난들 어쩌겠소?', '팔자가 사납다', '독에 들어가도 팔자는 못 피한다'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이에반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명제 하에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운명'을 택하느냐도 전적으로 본인 의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한창일 때, 사회과학 서적에서도 '운명'에 대해 강조한 부분이 있었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사회변혁의 기본원리로 설명되기도 했다.
권력층과 압박받는 민중, 이러한 대립구도 속에서 민중은 언제나 피착취받는 현실을 '운명'으로 잘못 인식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순이 생겨난다. 그러나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한다면 사회구조적 관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착취와 피착취', '권력과 피권력', '자본가와 노동자' 등의 모순은 민중들의 의지에 따라 변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에서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제주의 미래이자 비전으로 불리우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사회의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다.
현재 포장된 '제주특별자치도'를 우리의 운명으로 삼을 것인지, 변혁시켜야 할 대상인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제주도민들의 몫이다.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주의 운명' 선상에서 다시한번 생각해볼 때이다.
혼자 장구치고 북치고, 제 3자를 불러다가 논평하든지.ㅉ 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