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거짓말, 영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거짓말, 영화’
  • 미디어제주
  • 승인 2005.09.17 1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영화제 본선진출작 '강릉에서', '핵분열가족' 예심위원 영화평]

제 4회 제주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작품들 중 <강릉에서>(이장욱)와 <핵분열 가족>(박재영,박수영)을 보면 기존에 발표된 상업영화를 문득 떠올리기 쉽다.

<강릉에서>의 작품은 [연애소설, 이한]을, <핵분열 가족>은 [조용한 가족, 김지운]을 말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뿐 당연히 그 내용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그 비슷한 분위기라는 점은, <강릉에서> 작품은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남자 1명의 부재(죽음)로 인한 얘기라면, [연애소설]은 알다시피 여자 1명의 부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핵분열 가족>과 [조용한 가족]은 코믹풍자극이라는 점에서 크게 비슷한 듯이 보이지만(더구나 제목까지 !!) <핵분열 가족>은 제목 그대로 '가정파탄'의 절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런데 이 두 작품 <강릉에서>와 <핵분열 가족>은 기존 표현방식들에 대한 태도가 현저히 다르다.

 <강릉에서>의 작품 같은 경우에는 플롯 구성이 많이 봐왔던 관습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유연한 전개를 보여줬기에 본선경쟁작으로 선정되지 않았나 싶다.

반면 <핵분열 가족> 같은 경우에는 독립영화만이 누릴 수 있는 짧은 러닝타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나 싶다.

 기존 상업영화였다면 그 긴 러닝타임동안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느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편집에 맞는 상황 전개가 돋보였기에 기존 가족영화에서 봐오던 요소들이 식상하지 않을 수 있던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강릉에서>은 기존 상업영화에서 set 됐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수미상관적인 구조도 그렇고, 아니 뭐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기존의 영화적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병치하는 수법은 뫼비우스의 띠를 상정하므로 인생의 수레바퀴를 비유하는 흔한 표현방식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 효과는 그 안의 내용(영화의 주된 내러티브)의 간절함, 혹은 극적 리얼리티가 얼마나 잘 꾸며졌는가에 의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 동질감을 배 이상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영화의 유연한 스토리 전개에 맞는 부드러운 영상들이 관객들의 감수성을 충분히 자극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마도 <연애소설> 같이 극적인 상황연출은 숨겨져서 조용히 뒤돌아 마지막 장면에서의 긴 여운의 바닷가 정경으로 남아돌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이 작품은 눈물을 짜내려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에서 촉촉한 감성을 느끼게 해줬다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본선경쟁작으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핵분열 가족>은 우선 영화의 가장 큰 핵심요소인 '재미'를 확실히 갖추고 있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이 영화는 가족의 해체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조용한 가족>처럼 어둡지는 않다.

밝은 대낮에 핵미사일이 날아들고(이 장면의 삽입이 영화의 재미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불륜과 사방으로 튀는 피, 황당한 피난대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넘어 '핵분열 가족'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바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방식을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선 이 영화의 상황,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절박하면서도 황당한 설정은 우선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과 영화가 얘기하려는 주제의 심각함(깊이)을 은유적 기교 없이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comedy, 풍자라는 스타일의 힘일 것이다.

물론 풍자라는 효과 자체에 은유의 수법이 녹아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1 대응의 확실함, 동등의 은유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comedy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은유적인 표현인 듯 하지만 그 이상의 다중적인 의미(여러가지로 재해석이 가능한)를 부여하진 못한다고 생각한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표현방법에 대한 심리적인 상태는  은유에 내재된 확실하지 않은 듯한 모호함을 포함한 상징을 내걸기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확실한 상징의 표현 수법은 관객들에게 상상력의 폭을 좁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은유는 comedy가 아닌 것이다. 은유적인 성격이 강한 comedy는 관객들을 확실히 웃길 확실함이 희석되기 때문에 comedy에 내재된 은유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한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관객들을 확실히 웃길 수 있고 영화가 가져야 하는 깊이의 풍부함을 살려냈기에 본선경쟁작으로 선정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 우려되는 점이 있다. 사실, 모든 예술 작품들은 현실의 대칭적 혹은 비대칭적 가상현실로 재해석, 재탄생 해낸 것이다.

영화의 감독들이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밑의 [예술이론]에 대한 정의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핵분열 가족>처럼 정말 영화와도 같은 비현실적 상황을 연출했다고 해서 현실적 느낌을 잃어버렸다고 말해버리면 곤란하다.

반면에 <강릉에서>처럼 정말 '현실적인' 느낌의 영화가 더 리얼리티 하다고 결론내리는 점도 섣부른 판단일 수가 있다는 점이다.

 좀 브라운관을 멀리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는 모든 작품들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건의 사실여부로서의 거짓일 뿐 작품으로서의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헤겔은 "전체는 진리다"라고 말했지만, 나(테오도르 아도르노, 독일철학자. 프랑크프루트학파 1세대 중 한명)는 "전체는  `진리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어디에도 완전한 유토피아는 없다. 단지 특정한 국면에서만 전체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특정한 국면은 대부분 예술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런데 예술의 피치 못할 요소인 가상(vurtural reality)은 가상이 아닌 것, 즉 현실로부터 예술에 주어지는 것이다.

대체 가능한 교환의 세계에 대한 저항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 바래는 것을 원치 않는 눈의 저항이다. 그러므로 가상이란  `가상의 약속,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약속이다. 비현실의 차원에서 현실을 구원하는 것으로서의 예술, 이것이 [예술이론]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 권용선

개인적으로 위 말은 거의 모든 예술적 활동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가 아닐까 한다.

이 두 영화는 결코 기존 영화들의 카피도 아니며 리메이크 작품들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새로운 영화도 아니다.

 영화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어느 한 편의 독단적으로 성공한 영화인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아니다.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영화가 주도할 수도 있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영웅을 영웅답게 지킬 수 있는 왼손과 오른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김명현(호텔리어)  제4회 제주영화제 예심위원이 작성한 영화평입니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