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증언요지]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증언요지]
  • 양호근 기자
  • 승인 2008.03.28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래 내용은 제주4.3연구소가 28일 오후 2시 제주도 문예회관에서 개최한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일곱 번째 '소외된 그늘에 사는 사람들'에서 나온 이야기 입니다.

[고순열 할머니] "담 튀다 총에 맞아 죽고, 집 안에서 총에 맞아 죽고..."

고순열 할머니에게 4.3은 이중고였다. 결혼 후 지금까지 친정의 피해는 물론, 남편이 4.3 피해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김여랑(당시 19세, 인천형무소 1년, 판결일 1948.12.5)씨는 고순열씨의 남편으로 결혼 전 농업학교에 붙잡혀가 죽을 만큼 매를 맞고, 인천형무소로 옮겨져 1년의 형을 마치고 나왔다. 그 후 지원입대를 하고 상이군인이 돼 제대를 했다. 4.3 때 맞은 후유증과 전쟁 부상으로 날이 궂을 떄면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 고순열씨 역시 친정아버지 고경옥(목포형무소 5년, 판결일 1948.12.8)씨와 외삼촌 강재남, 강재선씨를 잃어버리고 힘든 삶을 살아왔다.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이 된 도남동 '못동네'의 피해 상황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낮은 조금 넘은 때인 모양입니다. 남편이 고구마를 갈고 있는데 경찰이 오라고 해서 가니, 손을 보고 "너 어제 저녁에 봉화 불 올렸지"하는 겁니다. 그렇게 농업학교로 잡아가 두드렸습니다. 음력 9월에 잡아가서 10월까지 그 천막 속에서 군화 신은 발로 바른말 안한다고 머리르 차고, 매에 죽으면 뒀다가 살아나면 다시 때리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천 형무소로 보내져 1년을 보낸 후 돌아오니 동네사람들이 "저놈 새끼! 폭도 새끼!"라고 손가락질해서 부화가 나니까. 스무살엔가? 군대에 지원을 했다고 했어요. 오늘 가면 내일 죽는 시절에... 총 맞아 상이군인으로 제대하고 온 후에 나와 결혼했습니다.

제대 후 손을 못 써서 상이군인 혜택을 2년인가 받았지만, 그것도 딱 중단 되어 버리고, 2000년에는 보훈청에 갔지만 하르방이 말을 못하니 기록이 있어도 말을 못하니까 미달이라고 했습니다. 젊을 때도 바람 불고 날이 궂으면 막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빙빙 돈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이 들어서는 말을 전혀 못하고 머리가 멍청해져서 어떤 때는 말을 좀 알아듣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몰라. 죽어지지 않고, 죽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는 거...(김여랑씨는 채록 후 지난 2006년 고인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고경옥인데, 확이해 보니까 인천에서 5년형 받은 것으로 나왔어요. 거기 간 후 아무 소식도 없고... 시에 소까이 사는데 도청으로 모이라고 해서 나도 같이 갔어요. 어떻게 소개 왔는지 조사를 했는데. 저 사람은 학식도 많고 보통사람이 아니겠다 해서 육지에 보낸 거야. 5일 정도 벤또를 도청에 가지고 갔었어요. 그리고 20일 더 있으니까 목포에서 이름만 적어서 우리 집으로 다섯 사람인가 편지가 왔어요. 아버지도 목포에 갔다고 살아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두, 석달 지났는가? 인천에 갔다고... 친정제사를 내가 하는데 아버지 죽은 걸 안보니까. 그 때 서른일곱이었나...

도남에서 불태운 곳은 '못동네'인데 재건을 안했어요. 무서우니까 성도 쌓고 성 쌓은 곳 안에서 살았죠. 음력으로 섣달 사일날, 다 태워버리고 소개를 시켰어요. 하루 아침에, 새벽 다섯시 정도에 와서 아무 소리도 안하고 다 불태워 버리고...그때 막 추웠는데 바람은 팡팡 불고 쌀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바가지 하나 못가지고 나왔어요. 그냥 입은 옷에 나오라고 하니까 겁이 나고. 그때 군인 명령이면 얼마나 무서운 때라? 불은 팡팡 나고, 그냥 나왔지. 우리는 총에 죽어질까... 기관총으로 막 쏘으면서 태웠어요. 담 튀다가 총에 맞아 죽고, 무서워 나가다가 죽고. 집안에서 죽고... 많이 죽었어요.

우리 외삼촌은 두 형제가 다 아라동에 살았는데, 큰 외삼촌은 아라국민학교 급사로 있었어요. 숙직이라 학교에 있으니까 군인들이 데리고 가 돌아다니다가 귀찮았는지 쏘아버려 그 자리에서 죽고, 작은 삼촌은 동네에 있었는데 응원대가 잡아가 패두드려 죽었어요. 저기는 신고할 사람도 없는데... 형제가 다 죽었고 조카는 그 때 어렸는데 죽어버렸습니다. 대가 끊겼어요. 우리 집도 우리 아버지가 외아들이고, 또 자식은 나 혼자이고 해서 대가 끊겼습니다.


[김주전 할아버지] 끝까지 쫓아다닌 '연좌제'라는 빨간줄

김주전씨의 큰형으로 인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큰형님, 형수, 셋형님, 셋형수가 희생당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큰 고초를 겪었으며 살아남은 형제들은 항상 연좌제의 그늘에서 허덕였다. 많은 가족 피해를 겪었지만 다행이도 어머니가 살아남아 형제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고우니모루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만, 살아나온 사람은 하나야 하나. 할아버지인데 목 지키는 일을 하다가 산에서 습격이 들어, 목을 잘못 지켰다고 논밭에서 죽이는데 총을 하나도 안 맞아서 밤이 되니까 집으로 돌아온 거야. 옛날에는 돌아가시면 집집마다 조문을 가잖아. 초상날 그 집에 조문을 갔어. 그런데 상 뒤 벽장 속에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1년. 신고하면 죽을꺼니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죽은 줄만 알았으니까 그 아들 생긴 줄도 몰랐지.

문화주택 옆 저수지에서도 사람들 많이 죽었어. 그때 거기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데 턱에 총을 맞아서 턱 없이 살다가 돌아가셨어. 가릿당 동산은 총살하는 것은 못 봤지만 수습하는 거는 조금 봤어. 그때는 옆길로 왔다 갔다 하면서 본 거니까. 이쪽저쪽 옮겼다고 하는데 누가 인부로 갔던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죽은 사람 중에는 화북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듣고, 여기(가릿당 동산)에 구덩이를 파서 묻고 나중에 수습할 때는 누구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사람은 찾아가고. 일부 나오는 것은 남의 것이라도 어디 한편에 묻었다는 것이지. 옛날 어린이들 묘처럼 흙만 살짝 씌어서 덮어 놔두는 것을 봤다고. 말로는 검질 매다가 뼈다귀가 나왔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났지거든. 어린아이들 묘처럼 묻었다가 찾아간 사람은 찾아 가고 했다고.

나도 연좌제를 겪었어. 해군 지원하고 가서 26년간 근무를 했어. 그러다 연좌제 걸려가지고 상사되고도 제 병과를 못하고 2급 취급을 받았지. 월남도 가고 미국도 갔다 왔는데, 누구 잘못 건드렸다가 "제주도 놈 털면 먼지 안나나 보자"해서 결국 연좌제 걸려서... 우리 형님도 연좌제 오래 걸렸다고. 형님은 자유당 때 김종필 총리가 정보부장인가 할 때 요시찰 해제증을 받았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군대에서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어. 연좌제, 난가 이것 만큼은 벗어야겠다고 해서 죽도록 열심히 하니까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고 나왔어.

우리 큰 형님은 똑똑했지. 일본 해군에도 갔었고, 그런데 똑똑하니까 산에 우두머리가 형님을 부른 거야. 우리도 몰랐어. 어떻게 알았냐면 누가 삐라를 뿌리다가 잡혔는데 우리 형님 이름을 거느린 거야. 부모도 누구고 엉덩이에 피가 날 정도로 맞아서 들어오니까 이젠 할 수 없다 해서 5.10선거를 기준으로 가족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을 갔어. 집까지 불태워 버렸지.

할아버지, 할머니, 큰형수는 음력 초엿세 열여드레날 도두리 비행장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셋형님은 산에 도망갔다가 귀순해서, 재검속 되어 행방불명되고, 큰형님은 그 당시 그대로 행불이야. 어머니까지 돌아갔으면 우린 엉망이 됐을 거야. 그래도 어머니가 있어서...어머니도 아들들 때문에 고생 많았지.


[김인근 할머니] "호루라기 소리만 들어도 구토나와"

김인근씨는 4.3으로 아버지, 언니, 오빠, 올케, 조카 둘을 잃어 버렸다. 아버지는 고우니모루 저수지에서 총살당해 후에 시신을 처리해 왔으나 오빠는 산에 납치 입산 된 후 토벌대에 잡혀 희생 돼 행방불명 됐다. 어니와 올케는 제주교육대학교 위쪽 논밭에서 총살당했다. 올케의 어린 자식들 역시 총살 현장에서 희생됐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행방불명됐다. 김인근씨의 어머니 역시 총살 현장에서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고서도 요행이 목숨을 건졌으나 총상 후유증으로 늘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85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인근씨는 4.3으로 가족들이 희생당하고 어려운 삶을 지내오는 동안 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만 들으면 어지럼증과 구토증세를 보이는 등 현재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열세살인데. 지금은 오늘 한 거 내일 되면 잊어버리는데 그때 건 생생한거라 마씸. 그때 말만 골아 가면 이제도 바들바들... 호루라기 소리하고 쓰리코단가? 차 소리만 나면 발발 떨어난 거야. 그때 일은 잊어버리질 않아. 그 때 생각하면 화장실 가고파. 오바이트도 나와 불고 그렇게 떨다 보니... 이제는 협심증으로 고생이라.

그때 화북 중부락 13반, 신산모루 13반이라실 거라. 아버지, 어머니, 오빠, 올케, 언니 이렇게 있었는데, 전부 죽고 나 혼자 도망쳐서 살아난 거마씸. 오빠가 일본에 유학가서 공부를 하고 온 후에 대한청년단에 책임을 져서 일을 해서. 그때 (무장대가) 화북국민학교를 불에 태우면서 우리 오빠를 산으로 심어서 올라가난, 오빠가 산으로 도망갔젠 해서 우리 온 가족을 심어당 뭐 해버린 거.

9연대가 집으로 들어와서 빨리 나오랜 하난 온 식구가 아버지 따라 화북국민학교로 가서마씀. 우리 하방이영 취조 받아난 곳이 4학년 교실이라 마씀. 아버진 형편 아니게 때려부난 얼굴이 반은 죽은 사람되고, 나는 불러 가난 책상에 칼 닮은 거 탁 때리멍... 솔직하게 고르랜 머리를 때리는 거라. 총이영 칼이영 봔 더 무섭고 하는 데 복도로 창 밖을 영 보난, 화북유지 동장님들이영 쫙하게 세워서 탁탁 묶엉 그 앞엔 총을 겨누고 있는 거라. "아이고~저걸 쏘우려고 하나..."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빠빠방 허난 사람들이 쓰러진 거라.

우리 아버지는 문화주택 위에서 총살 시켜 그 물속에 빠쳐분 거라. 다른 사람들은 신체들 빨리 찾아가고 했지만, 난 친척도 없고 해주질 않으니까 저수지에 벌겅헌 물만 보멍 울기만... 겨우 어떤 사람 의지해서 아버지를 건져놓고 잠시 묻어 둰, 집에 가서 어머니 오면 제라하게 묻지 했는데. 잠깐 잠든디 으으으~소리에 눈 번쩍 떵 보난 어머니가 머리 다 허우쳐졌지, 온몸이 피투성이로 손가락 꺾어졍 지렁지렁, 치마고 버선이고 벗어지고, 맨발 채 나 앞에 서서마씸. 어머니랜 부르지 못하고 무서워서 다른 데로 도망가부런."

어머니 이디(턱 아래)가 무언 마씸. 게난 물을수저로 넣어주면 목으로 안가고 일로(턱 아래로) 출출출... 수건으로 콱 막앙하믄 쪽쪽 빨고 우뚝지고 어깨고 팔 같은 거 옆구리 전부 다. 손가락도 잘라져가멍 지렁지렁 댕겨 다니고... 어머니가 호끔 뭐 해가문 "이꼴 저꼴 안 봐서 그때 며느리영 딸들 갈 때 가불 걸..."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 못 견뎌도 나영 벗행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그 말을 골안마씨.

젤 외로운 건 나 혼자. 어디 가나오나 동기간에 언니여 오빠여. 친족들 형제들 와삭와삭 다녀가면... 우리 조카는 4살짜리 2살짜리. 우리 언니는 걷지도 못하고 그 달에 난 산달이라난 마씸. 언니는 애기 난 죄밖에 없주... 우리 올케가 나 막 잘 해줬는데. 지금도 올케 생각이 나. 바라는 것도 없고 할말도... 제일 기쁜 건 아버지 어머니네들 죄인 벗겨주는 것. 그것 만이주. 더 바랄 것도 어수다 아무것도...


[김낭규 할머니] "총살 당한 우리 아버지...훌륭한 분이었어"

김낭규씨는 당시 신촌국민학교 선생이었던 김대진 교사의 딸이다. 4.3이 발발하면서 김대진은 산에서 활동하다 총살당했다. 김낭규씨는 당시 어린나이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사건 발발 후 어버지ㅇ로 인해 김낭규씨의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희생을 당했따. 그리고 김낭규씨의 자식들까지도 연좌제의 피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다고 생각하며 긍지를 갖고 살았노라 증언했다.

우리 아버지가 옛날 일제 시대에 이덕구씨 하고 일본에 지원병으로 갓떤 모양이라. 군대를 갔다 와서 함덕국민학교에 근무했주게. 그러다가 신촌국민학교 창설되니까 교장으로 임명받았는지 몰라도 책임자 선생으로 왔어. 6학년 담임도 하고 내가 그 때 6살 때 초등학교 방청생으로 들어갔어.

아버지가 학교에 다닐 때는 3.1운동 그 태극기를 만드는, 우리집에서 등사판을 놔가지고 태극기를 만드는 쳇방이랜 헌디가 있었어. 부엌 닮은 디 꽉 대미고 신촌청년이 다 모여와났주게. 그러다가 탄압이 심해져가니까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 김창렬 선생, 김주범 선생, 김종수 선생, 야라무라 선생 이렇게 다닐 때라. 4.3사건이 일어나니까 그때부터는 매일 경찰에서 심으레 오고, 그렇게 해가니까 곱기 시작핸. 우리 동네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강 곱으면 어머니가 밥행갈 때 나는 따라가주게. 강 보문 그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조그만한 방에 곱앙 살아이서.

아버지를 찾으로 사복경찰들이 매일 밤 항상 찾아와. 사복 입엉 온 경찰들이 뭐라고 물어오면, 어릴 때라도 그 비밀을 막 잘 지켜졍. 그러다가 경찰이 심으레 다니니까 어머니랑 삼남매가 동제 혼자 사는 할머니 집에서 사는데, 어머니는 이젠 우리 다 내버리고 조천 수용소에 살래 간거 아니? 간난 동생 두 살짜리를 데령... 어머니는 수용소에 살고 우리 성할머니는 삼남매 데리고 집에 있었는데, 우리 성할머니도 경찰이 학교 마당에 나오랜 핸. 한 열며칠씩 살앙 나온디 얼굴이영 몸이 막 숯검댕이가 되고 새까맣게 피 골란 나완. 아들 때문에 맞은 거난 죽지 안행 산 것도 고맙댄 허멍 목 멕혀서 말도 못 곧고 울멍 헌디...

하루저녁은 할아버지영 할머니영 놀암시난 철창 가진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왕 할아버지영 할머니영 나오랜 하는거라. 나는 무의식적으로 밖으로 뛰어서 울멍 옆에 큰아버지 댁으로 들어가신디. 큰어머니가 "우리까지 다 죽여먹젠 햄시냐" 하멍 방석 가져당 입을 꽉 막으멍. 담 구멍으로 보난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당에 나오고 다섯살 난 거, 세 살 난 거 아이들 성제가 막 울어. 우리 할아버지는 "하루에~하루에(김낭규씨의 일본이름)"를 불러뒁 가서 잠깐 있으니까 총소리가 나. 신촌초등학교 동산, 마을회관 있는 보리밭에서 총살 시켜버렸어. 학교 올래에서... 그 후에 동생들 데령 외할머니 집으로 간 거라.

외할머니 집으로 가자마자 어머니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할머니 말로는 어머니가 막 울멍 "우리 애기들 잘 키워줍써" 울멍 울멍 죽으래 가가난. 우리 어머니가 스물여섯살이난 두 살난 우리 밑에 여동생 외할머니한테 떼어주멍 죽으래 갔댄. 우리 외할머니는 그 애기 맡앙 죽으러 가는 딸 보면서 가슴치멍 거기서 통곡행 울고... 어머니를 조천경찰서 앞 밭에서 총살 시키는데 절믕ㄴ 여자고 하니까 막 잔인하게 한번에 죽이지 안행... 한번에 쏘지 않고 이밭 저밭 기어가고 기어오고 하면 또 쏘우고 노리개감으로 죽여 불고 허난. 동네 사람들이 손을 볼 때 손톱이 하나도 안 남아서랜. 막 밭 긁어부난...

우리 아버지는 총살 당하고, 어떻게 했냐면, 신촌 열녀못에 데려다가 신촌 사람들 다 보게 전시시키고, 또 관덕정 마당에 세워놘. 소뭇 숟가락 여기(가슴에) 꼽은냥 전시를 며칠이나 시켠.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인물이 참 좋았었는데 저 인물 좋은 사람 죽었다고 여자분들이 다 울면서 구경했다고 하는 말이 있주게. 다 관람시키고 불살라분거라. 불살라부니까 우리 오촌친척이 애기들도 있고 뼈라도 주워 와야 된다고 해서, 우리 외할아버지하고 오촌이 밤에 가서 재를 다 모아 온 거라. 그래서 이제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같이 합장해서 묻었지.

경찰관이라고 하면 결혼할 때까지도 무서워서 물질하러 가다가도 봐지면 집에 들어와부러. 이제 그 사건 다시 온다고 하면 자살하고 싶은 생각뿐 안나. 우리 동생이랑 나는 연좌제에 고생하고, 우리 아들들도 고생 보고. 전두환이 할 때도 찍어주면 다시는 연좌제 안 걸린댄 했는데, 우리 아들 대학 가서 장교 시험 봐서 신원조회에 걸령 떨어 지난 가슴 아프고. 아들 친구들이 의아해 해도 우리는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해연. 일본에 가젠 해도 여권이 육개월만에 나완.

지금 부모 없이 산 것도 억울하지만 가장 억울한 것은 나나 우리 형제들 공부 못하고 어디 강 마음대로 못하는 것. 그래도 그거 하난 있어. 우리 동생이 어디가면 "김대진 선생님 아들 아니냐? 막 훌륭한 분 아들이다"라고 그렇게 하니까 긍지를 가지고 살아졌덴. 나도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라 온 딸이랜 허문 긍지를 가져서... 아버지 훌륭했다는 긍지로 살아온 거주게.

<미디어제주>

<양호근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