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빛을 따라 의인 김만덕을 만나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이나 저것, 오늘이나 내일, 이쪽 아니면 저쪽 그럴때 마다 우리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 한다.
세상을 바꿀 만한 업적을 쌓은 위인들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켜 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그 결정으로 그들은 세상을 이끄는 리더가 된 것이다.
경쟁과 갈등이 치열한 곳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지혜롭고 따뜻한 리더십을 알려주고 진정한 용기와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깨닫게 해준 의인 김만덕의 삶을 찾아본다.
대한민국 최초의 나눔문화전시관 김만덕기념관은 2015년 5월에 김만덕의 삶을 재조명하여 그녀의 도전정신과 나눔의 삶을 기리고자 개관하였다.
김만덕은 신분과 지역 한계를 넘어 장사를 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였고, 꽃으로 피기보다는 새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날아 들어갔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18세기는 물건의 교역량이 늘어나고 여러 지역의 특산물들이 유통되던 시기였다. 당시 상인들은 제주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우황, 진주 등을 육지에 팔고, 다시 타지역의 각종 특산물을 제주도에서 팔면서 조선후기 신흥부자로 떠오르게 된다.
김만덕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으로 포구가 지닌 상업적 중요성을 미리 깨닫고 건입 포구에서 물산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했다. 제주는 화산섬이라 농사를 짓기가 힘든 대신 해산물이 풍부했다. 미역의 경우 당시 제주에서만 채취될 정도로 귀한 물품이었고, 제주에서 돈 대신에 미역이 화폐 역할를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고려시대 이래 최고의 말 목장이었던 제주는 말총이 많이 생산되었다. 말총은 양반들이 상투를 틀 때 사용했던 망건을 만드는 재료로 타 지역보다 질이 월등히 좋아서 그 수요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또한 조선 후기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주 말총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더욱더 물산객주가 활기를 띄었다.
정조 때부터 진상품의 숫자와 품종을 줄이고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줘서 양태 산업에 대한 독점권을 제주에 주었다. 김만덕이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제주는 수재(水災), 한재(旱災), 풍재(風災) 삼재(三災)의 섬이다. 제주 사람들은 매년 기근에 시달렸는데 특히 ‘갑인년(1794년)대흉년’은 제주 사람들을 극도의 굶주림으로 몰아넣었다. 제주 인구 6만 3천명 중에 25%인 1만 5천 여명이 굶어죽을 정도로 갑인년 흉년은 제주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제주 사람들에게 고난의 시기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나라에서 보낸 구휼미마저 풍랑을 만나 잃게 되었고, 이때 김만덕은 쌀을 육지에서 사들여서 자신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선뜻 내놓으면서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만약 나만 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모른 척했다면 제주 사람들은 더욱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김만덕의 기부는 굶주려 죽어가는 제주도민 전체를 열흘 동안 연명시키고 수 천명의 백성을 살려낼 만큼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덕이 실천한 나눔 또한 상인으로서 쌓아올린 재산보다 나눔을 통해 쌓아올린 보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만덕은 정조실록(45권,정조20년)에 보면 “제주의 기생 만덕이 재물을 풀어 굶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김만덕의 선행에 임금이 상을 주려 하자, 김만덕은 이를 사양하고 ‘서울에 가서 왕궁을 보는 것’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 말했다.
당시 임금인 정조는 유사모 목사의 장계를 통하여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고 ’내의원 차비대령행수의녀‘라고 하는 벼슬을 내린 뒤 만나 기민구제에 헌신한 김만덕의 공로를 칭찬했다.
그녀는 30여 년간 수 많은 육지 상인과 제주특산물과 육지의 물산을 오랫동안 주고받으면서도 육지로 나간 적이 없었다. 장사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거래하는 물건을 다루는 육지 상인들의 활동 거점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관계를 맺기도 어렵고 육지로 나갈 수 없어 참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그것도 나이 환갑에 다다른 58세 때에 거친 바다를 건너 먼 거리를 여행하려고 했을까? 당시 제주는 출륙금지령(제주도민들이 제주 섬을 떠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킨 정책) 인조 7년(1629년)부터 순조(1823)까지 이백여 년간 유지되었다. 때문에 여성의 출륙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출륙금지령은 조선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완성되어가던 과정에서 발생한 정책으로 인조 7년(1629년)부터 순조(1823)까지 이백여 년간 유지되었다. 제주 사람들이 다른 지방으로 나가버리니까 공물과 진상에 문제가 생기자 조정에서 제주 사람들이 다른 지방으로 나가는 걸 금지하고 통제한 정책이다. 제주 사람들이 탈출한 이유는 나라에서 요구하는 공물과 진상의 어려움이 가장 크고, 다시 유민 발생으로 인구가 줄어들었는데도 진상품이 줄지 않아 더욱 심한 고통을 받게된 것이다. 출륙금지령으로 당시 제주사람들의 고통은 컸지만 반면에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대신 제주의 신화, 제주의 언어, 독특한 식생활 문화의 고유성, 선박 등 보존 계승되는 효과를 얻었다.
국가정책에 의해 제주섬에 갇혀 살던 김만덕이 화북포를 떠나 나주와 공주를 거쳐 한양에 도착하여 넉 달간의 긴 여정과 한 달여 간의 금강산 기행은 만덕과 새로운 세상과의 완전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에서 태어난 이유로 2백 년 가까이 섬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던 제주 섬사람들의 한을 풀기 위한 처절한 요구였다. 자신의 신분을 면천하거나 경제활동에 도움될 만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라 제주 섬사람들의 뼈저린 소망을 들어달라고 한 것이다.
신분, 성별, 출생지라는 삼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제주, 아니 조선 후기 최고의 여상인이었던 만덕은 주위에 어려움을 돌보고 행복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마음까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흠모의 감정을 한꺼번에 불러 일으킨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녀의 의로운 삶은 추사 김정희가 남긴 ’은광연세(恩光年歲)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라는 글씨와 함께 우리의 삶 속에 가치를 빛내고 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이 남성들이 정의한 위인의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었다면, 당당하게 ‘나’를 살았던 만덕은 한국여성사를 대표할 새로운 인물이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이 되기에도 충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김만덕의 은혜로운 빛이 우리의 삶속에 스며들어 귀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나눔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요.
김만덕기념관에서는 나눔의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하고 나눔의 실천을 체험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어린이 상설 체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23년부터 새로 선보인 상설교육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 김만덕기념관을 방문하는 어린이 가족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만덕의 생애를 동화 형태의 영상으로 교육하고 팝업카드, 종이극장 등 만들기 키트 자료를 활용하여 어린이들이 김만덕과 나눔이라는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나눔체험 활동을 통하여 김만덕의 나눔과 도전정신이 곳곳에 따뜻한 온기가 되어 널리 퍼지기를 기대해 보며, 가족과 함께 방문하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특별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강추한다.
(프로그램 운영기간 2024년 2월~12월 매주 토요일, 마지막 주 토요일 제외시간은 오후 3시~3시 30분)
그리고 도서나눔 프로그램 ’헌책줄게 새책다오‘ 다 읽은 책 1권을 기증하면
새 책 3권이 무료 김만덕기념관 프로젝트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및 지인과 함께 방문하여 다 읽은 책은 맡기고 새 책을 가져가는 것도 좋다.
(운영: 매일 단,월요일 제외,시간: 10:00~17:00)
미래세대인 유아와 어린이들에게 김만덕의 나눔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알려줄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나눔에 대해 소중한 추억을 갖게 해야 될 것이다
‘김만덕상’은 김만덕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계승하기 위하여 ’제주특별자치도 김만덕상 조례‘에 따라 국가나 지역사회에 헌신한 모범여성을 발굴하여 수여하고 있는 상이다. 올해로 45회를 맞이한 만덕제 봉행 및 김만덕상 시상식과 나눔큰잔치 , 김만덕주간 행사등 김만덕의 정신을 알리고 실천하는 데 솔선수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 꼭 방문하여 참여해서 관람하는 것도 추천한다.
김만덕기념관 주변에 산지천, 물사랑홍보관이 있는 금산생태공원, 제주항, 사라봉 모충사등 산지천은 역사, 생할, 기억속의 주민들이 식수원, 목욕과 빨래를 하는 생활의 터전이었다. 산지천이 바다로 흘러가는 하류에 있던 산지항은 원래 작은 포구였고, 예로부터 ’건입포(建入浦)‘로 불려왔다. 일제강점기 이후 건입포는 제주의 관문이자 개항장인 산지항으로 거듭나면서 제주항의 모태가 됐다. 의인 김만덕도 건입포구를 바라보며 제주 백성에게 나눠줄 구휼미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라보던 바다 광경이기도 하다. 김만덕의 간절한 마음이 여러분 마음에도 전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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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
김만덕기념관 Tel 064)759-6090 (휴관일: 매주 월요일,1월 1일,설날,추석)
#의인 김만덕을 기리는 주간을 맞아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
매년 김만덕의 기일(10월 22일)에 가까운 일요일, 사라봉 모충사에서는 만덕제 봉행 및 김만덕상 시상식이 개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