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여름나기, 초목의 묵향에 빠져들었다. 특히 한라일보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는 <제6회 화동 부윤자 서전(書展) ‘취병담을 노래하다’> 에 눈길이 머물렀다.
50여 년 오직 서예가로 살아온 제주 출신 화동 부윤자 선생. 1982년 지방행정 공무원 서예대전 ‘대상’ 수상 이후 다양한 수상 기록을 남겼으며, 1998년 제주를 ‘빛낸 사람’에 선정, 2020년 광주광역시 미술대전에서 최우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소암 현중화 선생과 여초 김응현 선생의 사사를 받아,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등 오체를 두루 섭렵했다. 그의 서풍에는 진솔하고 자연스러운 전통적 서법의 필치가 느껴진다. 석사논문 ‘소암 현중화의 서예술 조형성 연구-행·초서를 중심으로(素菴 玄中和의 書藝術 造形性 硏究-行·草書를 중심으로)’를 발표했고,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폭넓은 창작의 안목을 갖췄다.
서예 평론가 조민환(전 성균관 대학교수)은 “제주의 거센 바람이 붓끝에서 춤을 추는 듯한 거침없는 붓놀림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여성이지만, 남성적 기세의 양강미(陽剛美)가 충만해 있는 서예 창작 세계를 펼치고 있다.”고 평했다. 그렇다. 화동 선생의 서체는 활기찬 기상의 남성미가 역력하다. 작품마다 그만의 확고한 성정이 묻어 있다. 제주 바람에 맞서 맏이로 살아왔던 인고의 삶이 내재한 것 같다. 여린 듯 부드러움과 거침없는 필력에는 제주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자연의 맥을 감지할 수 있다.
이번 여섯 번째 개인전은 7월 15일부터 7월 26일까지 한라일보 1층 갤러리 ED에서 ‘취병담(翠屏潭)을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이번 작품에는 제주 유배 문화를 통해 제주특유의 풍광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짙게 배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제주와 관련된 사료들을 찾아 유배인들이 제주의 자연과 풍속 등에 관한 생각, 어사와 목사 등 지방 관료로 임명되어 제주를 찾았던 관리들이 한라산과 제주도를 순례하면서 느낀 풍광 등을 담은 시문들을 작품화하였다.
유배인들의 다양한 시문과 취병담에 얽힌 이야기를 서예 작품 창작에 담아내어 유배 문화에 대한 이해를 관람객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은 조선시대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의 취병담(翠屏潭) 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보여준 행·초서이다.
전시회 관람객 김영숙 시인은 “작품의 작품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제주 풍광은 물론이고, 화동 부윤자의 이미지가맞물려 서예의 필체가 그 속에 녹아들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예는 붓으로 표현되는 예술 장르이다. 서예가가 창작활동을 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지를 밖으로 꺼내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의지가 스며든 작품은 그 속에 담긴 의지의 작용으로 감상자의 내면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김영숙 시인처럼 감상한 사람들에게 서예가의 의지가 침투하여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 같은 의지가 공명 작용을 일으킨 것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붓들 들고 무아지경에 몰입하는 화동 부윤자 선생의 모습이 그려지며 작가 특유의 묵향에 빠져들게 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매우 다채로웠다. 서체와 소재의 다양성 덕분일까. 잔잔한 전시실에 색다른 생동감이 흘렀다. 갑골문을 시작으로 금문·전서·행서·초서, 행초서, 국한문 혼서 등 주제와 서체를 절묘히 조합시켜 다채로운 묵향이 풍긴다.
화동 선생은 주제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그동안 지향해 오던 세계관을 작품에 펼쳐내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영주 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취병담을 선택하여 제주에 왔던 문인 사대부들의 추구했던 풍류에 대한 사료 연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빼곡한 필체의 창작 노트의 분량을 보면, 전시된 작품 이면에 이들을 빛나게 했던 ‘뒷배’의 고독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대표 작품은, 이익태의 <취병담(翠屛潭)>의 내용을 행·초서로, 용연야범가는 행초서·한글혼용을 자신만의 서체로 붓끝의 노련미를 과감히 펼쳐내고 있다. 아래 대표 작품과 자료 해설을 첨부한다.
자료에 의하면 이익태 목사는 숙종 20년(1694), 62세 나이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재임하는 동안 관덕정, 운주당, 우련당, 향교 등을 중창하였으며, 우암 송시열은 귤림서원에 배향하여 현재 오현의 기초를 세우는 등 제주목을 크게 정비하였다.
주성(州城)의 서문 밖으로 3리에 대천(大川)이 있어 대독포(大濱浦)로 흘러 들어간다. 포구 못 미쳐 용추(龍湫)가 있는데 물색이 깊고 검어 끝이 없다. 양 언덕은 비취빛 절벽으로 푸른 낭떠러지인데, 둘레 좌우에 임석이 병풍을 이뤄 기괴(奇怪)하여 눕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다. 담세 潭勢)는 서로 구부러지며 수백 여 보(步)나 되고 깊숙하면서도 고요하고 요조(窈窕)하다.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포구와 바다 사이에는 한 개의 띠를 이룬 자갈톱(沙場)을 사이에 두고 조수(潮水)가 통하기도 하고 혹은 막히기도 한다. 담(潭)의 서쪽은 누에머리 모양으로 나와 평평하면서도 둥글게 대(臺)를 이루었는데 그 밑에 산의 뼈대로 이어진 층(層)이 바다로 들어가면서 거대한 바위가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리고서 어지러이 널려있는 돌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형상의 용머리 용두(龍頭)같으므로 용두암(龍頭巖)이라 한다. 배에서 내려 대(臺)에 오르면 어부의 집들이 처마를 잇대었고 뒤에는 고깃배들이 노를 잇대었으며, 앞바다에는 하늘이 온통 안개에 물든다. 희미하고 망망한 바다 밖으로 놀러가 구경을 하는 것은, 최고의 빼어난 경치라고 하겠다.
<출처: 李益泰(金益洙 譯),「譯註 知事録」濟州文化院 자료>
이번 전시회는, 우리에게 유배 문화와 제주의 사랑을 전하는가 하면, 그 외 다양한 글귀와 서체로 관람객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전시 작품 중 한글 서체로 쓴 법정 스님의 글귀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세상에 전하고 싶은 화동 부윤자 선생의 의지로 다가온다.
마음을 기울여 말하고/ 혼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사랑이 담긴 손을 건네는 순간/세상은 빛이 나고/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 다시 태어납니다.
-법정스님 어록-
경제난 등 사회적 분위기마저 난세를 겪고 있는 요즘에, 화동 부윤자 선생의 예술혼은 무언의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마음을 열고 더 밝고 더 아름다운 제주의 사랑을 묵향으로 슬며시 건네준다.
물에 발을 담그고, 책속에 눈길을 담그는 것으로 더위를 이겨내듯이, 이번 부윤자 서예전시회 관람이 대서 무렵의 폭염을 이겨내는 데 한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