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든 개벽신화와 창세신화는 존재
필리핀은 ‘말라카스와 마간다’ 이야기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옛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대게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제주도는 개벽신화로 ‘천지왕본풀이’가 있다. 혼돈의 세상에 별이 먼저 만들어지면서 해도 두 개가 되고, 달도 두 개가 뜬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질서를 잡는 일이 중요하다. 천지왕본풀이에서 보이는 ‘두 개’의 해와 달은 무질서를 나타낸다. 누군가는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총맹부인이 낳은 대별왕과 소별왕이 등장하면서 혼돈은 마무리된다.
필리핀도 그들의 뿌리가 되는 옛이야기를 지녔다. 지역에 따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땅도, 태양도, 달도, 별도 없던 시절엔 오직 바다와 하늘만 존재했다. 여기서도 혼돈은 등장한다. ‘천지왕본풀이’는 두 개의 해와 달을 정리했다면, 필리핀 창세신화는 바다와 하늘의 거대한 싸움이 등장한다. 바다와 하늘의 싸움으로 수많은 섬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갈래를 지닌다. 필리핀 창세신화도 그렇다. 하늘의 아들이 바람이 되고, 바다가 바람과 결혼해서 세 아들과 딸을 낳는다. 형제들은 더 큰 힘을 얻으려고 할아버지인 하늘에 도전한다. 형제 중 첫째인 리칼리부탄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다로 떨어지고, 거기에서 대나무가 자란다. 필리핀 창세신화의 다른 이야기는 카이트라는 새가 등장해서 하늘과 바다 사이를 갈라놓고, 싸움을 붙인다. 화난 바다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고, 하늘이 솟아오른 바다를 제어하려고 바다에 바위를 던졌다. 바위는 섬이 되고, 섬에서 대나무가 자란다.
갈래를 지닌 필리핀 창세신화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내용은 같다. 바다가 하늘에 대들었고, 그들의 싸움으로 수많은 섬이 생겼다. 섬의 구성 성분은 다소 차이가 있다. 리칼리부탄의 몸에서 섬이 나온 이야기, 하늘이 던진 바윗덩어리라는 차이는 있다. 이야기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섬나라 필리핀을 만들어낸 옛이야기의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필리핀은 수천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이기에,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가 넘쳐나는 건 당연하다.
여기서 주목을 해야 할 건 대나무다. 필리핀 농업과학기술위원회(PCARRD) 자료를 보면 필리핀 대나무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다. 필리핀은 세계 6번째 대나무 수출국일 정도로, 대나무가 필리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 종이를 만들 때, 식품과 관련 산업에도 대나무는 곧잘 쓰인다. 그래서일까, 필리핀 탄생 이야기에 대나무가 무척 중요하게 등장한다.
제주의 옛 이름인 탐라 건국신화는 제주도라는 땅에 살던 세 사람이 바깥에서 들어온 세 여성을 맞아들인다. 지금으로 말하면 제주도 사람은 ‘국제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후손을 만들어냈다. 필리핀 사람들은 앞서 창세신화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탄생한다.
리칼리부탄이 등장하는 이야기엔 씨앗이 등장하고, 그 씨앗이 자라나서 대나무가 된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는데, 그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온다. 남자는 시칼락(Sicalac), 여자는 시카바이(Sicabay)였다. 이들이 필리핀 사람들의 시작이다. 시칼락과 시카바이로 불리는 남녀는 필리핀 내에서도 세부섬이 중심이 된 비사야 지역에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대나무 사람의 탄생은 ‘시칼락과 시카바이’보다는 ‘말라카스(Malakas)와 마간다(Maganda)’가 더 유력하게 이야기된다. 온 세상이 아름다운 낙원이 되고, 어느 날 새의 왕이 숲으로 날아가 바람에 흔들리는 큰 대나무를 보게 된다. 대나무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새가 대나무를 쪼자, 거기서 말라카스라는 남자가 나온다. 말라카스는 새에게 그의 파트너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새는 다시 대나무를 부리로 쪼게 되는데, 대나무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 마간다가 등장한다. 이들이 필리핀인의 시작이다.
더 많은 필리핀 옛이야기가 있으나 사람이 탄생한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후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도민지원사업 공모 사업인 ‘JDC 글로벌 제주드림 국제교류 동화제작 프로젝트’에 참가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