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좋다. 채울 게 많기 때문이다. <도덕경>을 잠깐 빌려보자. “도는 텅 빈 그릇이다(道沖)”고 했다. 이유는 끊임없이 채울 수 있어서다. 젊음도 그렇다. 젊음은 나이듦과는 상대적 단어인데, 우리는 그 단어를 통해 긴장과 기대와 발랄함과 도전을 상기시킨다. 또 있다. 열정이다. 활활 불타오르는 기개가 젊음에 있다. 젊음을 꺼낸 이유는 제주에서 활약하는 젊은 건축사들을 만나, 그들의 입으로 건축을 말하고 싶어서다.
젊음은 어디까지일까? 이 코너에서 소개할 건축사들은 스물한 명으로 정했다. 기준을 두기는 했다. 나이 들어서도 젊음을 지닌 이들이 있을 테지만, 모든 이들을 소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상은 ‘신진건축사’로 한정했다. 국토교통부가 매년 ‘대한민국 신진건축사 대상’을 선정하는데, ‘국내외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한 만 45세 이하 건축가’로 제한을 두고 있다. <미디어제주>도 그 기준에 따라 만 45세 이하인 제주 도내 건축사들을 만난다. 마침 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가 올해부터 ‘신진건축사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 네 번째 만남은 ㈜삼현그룹 도시건축사사무소 박상욱 소장이다. [편집자 주]
[제주 신진건축사들이 말하다] <4>
박상욱 ㈜삼현그룹 도시건축사사무소 소장
박상욱 소장이 말하는 건축 : 정기용의 ‘제주시기적의도서관’
말하는 건축가가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를 주인공 삼아 만든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건축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을 향해 말하던 건축가는 정기용(1945~2011)이다. 그는 도시의 풍경을 잠식하는 건축의 잘못을 가감없이 말한다. 그 때문일까? '말하는 건축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건축가 정기용은 화려한 건축물을 내놓는 작가가 아니라, 건축에 삶을 담는 사람이다. 그는 건축가를, 전통적 의미에서 바라보는 직업군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건축가를 ‘사회적 코디네이터’로 바라보았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건축가는 의뢰인의 뜻대로 건물의 형태만 설계하는 사람이 아님을 말한다. 뭐가 더 필요한지 이야기를 해주고, 들어주고, 그걸 건축이라는 행위로 풀어내는 사람임을 말한다. 정기용의 언어로 말해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가는 세상에 대한 번역가이고, 세상을 읽어주는 사람이고, 사회를 제안하는 사람이다.”
정기용은 그가 설계한 건축물 가운데 어쩌면 가장 하찮을 수 있는 버스정류장에 삶을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건축을 다들 “살아 있다”고 말하는데, 그러려면 존재의 이유를 말해야 한다. 정기용은 땅 위에 등장하는 건축물이 존재하는 이유를 누누이 말했다. 전북 무주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지역의 대표적 풍경으로 만든 이유는 “하찮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어도 건축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그에겐 하찮은 존재가 더 이상 되지 않는다. 작은 버스정류장도 그에겐 하나의 방이었다. 버스정류장을 사시사철 써야 할 농촌 주민들에겐 집안의 방처럼 필요했기에, 그는 무주의 아주 작은 버스정류장에 방을 옮겨 놓았다. 정기용에게 인간 냄새가 가득한 이유이다.
정기용이라는 이름에서 빼놓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기적의도서관’이다. 전남 순천시에서 시작된 기적의도서관은 전국 곳곳에 뿌리내렸다. 기적의도서관은 ‘기적’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기존의 도서관 이미지를 깨끗이 물려냈다. 발소리나, 숨소리도 죽여야 하는 ‘정숙’을 강조하던 옛 도서관의 이미지는 기적의도서관이 등장하며 깨졌다. 정기용은 기적의도서관을 세우며 세상을 향해 말해왔다. 그의 말 덕분에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던 여타 도서관도 변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도서관은 기적의도서관이 불러온 ‘기적’ 때문에 특정인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도서관이 되었음을 안다. 물론 기적의도서관은 어린아이들이 주요 고객이지만, 도서관의 문화를 바꾼 배경에 그가 설계한 기적의도서관이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제주시기적의도서관은 특정 공간이 많이 보인다. 특정 공간은 아이들에겐 ‘숨은 공간’이면서 ‘숨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런 공간을 좋아한다. 미국의 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만들어낸 단어를 빌리면 ‘토포필리아(Topophilia)’가 기적의도서관 곳곳에 있다. 토포필리아는 ‘장소에 대한 사랑’ 혹은 ‘장소애’로 바꿔 부를 수 있는데,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적의도서관에서 숨은 공간에 몸을 맡기려고 한다. 정기용은 이렇듯 공간을 쓸 사람들을 생각하며 공간을 만든 사람이다. 공공도서관 운영자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 있겠으니, 정기용에겐 사용자가 더 중요했다. 공공건축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여기에 담아본다.
“공공건축이란 ‘공공이 발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람, 주변, 시민)가 원하는 동시에 땅이 원하는 건축이며, 시대가 원하는 건축이고 그리고 끝으로 지구가 원하는 건축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박상욱 소장과의 이런저런 말 (대담 진행 : 김형훈)
- 기적의도서관을 제주에서 소개하고 싶은 건축물로 꼽으셨는데, 이유라도 있을까요?
누가 보더라도 ‘특정인’(여기서는 아이들이다)이 좋아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죠. 그 특정인들이 좋아하는, 애정이 담긴 공간이죠. 기적의도서관은 아이들 전용 공간으로 지어졌잖아요. 아이를 사랑하고, 그 아이에 대한 애정이 담긴 공간입니다.
- 그럼 기적의 도서관에서 ‘진짜 아이를 사랑하네’라고 느껴지는 공간을 들려면 뭐가 있을까요?
포켓형 공간들이 많아요. 방 안에도 공간이 있어요. 정기용 선생이 설계한 도서관을 보면 원통형을 지나면 사각형 공간이 나오는 등 여러 요소들이 존재하죠. 아이들의 감성을 공부하고, 그걸 건물에 넣으려고 많이 노력했음이 보이죠. 다양한 공간은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해주죠.
- 제주시기적의도서관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을 커튼으로 막아뒀던데, 그건 어떻게 보십니까. 커튼을 걷어냈더라면 눈이 오면 눈을 바라보고, 비가 올 때면 비오는 풍경도 볼 수 있을텐데요.
결국은 사용자들입니다. 사용자들이 최대한 좋아하고 편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해요. 세월이 흐르면 사용자들이 공간화를 하잖아요. 자기화를 거치는 과정인데, (애초에 설계한 공간 활용 여부는) 사용자들의 생각에 달렸고, 창을 커튼으로 가려둔 것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건축물은 사용자에 따라 바뀌는 것이죠.
- 만일 도서관의 관장이나 사서가 커튼을 치라고 했다면요.
그게 가능한 시대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서관을 실제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면, 그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자기들이 그걸 판단했다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잖아요. 관리자가 그러려면 전문가들에게 물어봐야죠.
- 제주엔 어떻게 내려오시게 되었나요. (그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활동했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오셨고, 3년 후에 제가 내려왔습니다.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제주에 계신 부모님을 모셔야겠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제주도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제주를 몇 번 왔다 갔다 했는데 살기도 괜찮았고요. (사실 그는 제주의 사위이기도 하다. 현재는 친가와 처가 모두 제주에 있어서 명절에도 제주 섬을 떠날 이유가 없다고 한다.)
- 기적의도서관을 꼽으신 걸 보니, 건축가 정기용 선생을 좋아해서 그랬나요?
맞아요. 좋아하는 건축가입니다. 학생 때는 안도 다다오를 좋아하다가 김수근도 좋아했죠. 프랭크 게리 등 특이한 작품을 하는 이들도 좋아했죠.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건축과 동아리에서 전북 무주로 MT를 가게 됩니다. 정기용이 쓴 <감응의 건축>도 읽고, 무주 프로젝트로 직접 보면서 감동을 많아 받았는데, 그때부터 정기용 선생을 좋아하게 됐죠.
- 정기용의 어떤 작품이 감동을 선사했나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면서 자신을 낮추는 분입니다. 스스로를 낮춰서 남의 시선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정기용의 설계로 탄생한 작품은) 잘났다는 건물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편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 사람이 건축가이고, 건축사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 건축 거장들의 작품은 건물 자체가 눈에 팍 들어오지만 그는 그렇지 않긴 해요.
그의 작품은 사람을 편하게 하죠. 등나무를 운동장(무주등나무운동장은 축구전용경기장으로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로 새로 태어났다. 등나무로 그늘을 만든 이색 경기장이다.)의 그늘막으로 쓴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도 충격이었어요. 무주를 찾을 때는 가을이었는데 그때 등나무는 가지만 남겨뒀지만 가지 사이로 햇볕이 비쳤어요. 다른 계절엔 그늘막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걸 보면서 이런 건축사가 돼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 그렇다면 그런 건축사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건축사가 되고 싶다는 게 제 희망입니다. 현재는 주식회사 소속으로 공동주택이나 대규모 개발사업을 많이 하죠. (정기용 선생이 추구하는 건축이랑) 정반대의 것을 하고 있으나, 사람들이 쓰기 좋은 평면을 개발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정기용 선생의) 그런 생각들이 녹아들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앞서 말씀하신 것과 연관될 수 있는 질문인데, 건축사는 어떤 직업인 것 같습니까?
요즘은 좋은 툴이 많이 나옵니다. 일반인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설계가 구현될 수 있는, AI가 더 발전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상황일 때 건축사가 할 수 있는 범위는 감성적이거나, 감각적인 부분이라고 봅니다. 인허가야 당연히 건축사가 하게 되는데, 아울러 설계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 AI가 워낙 발달하다 보니까 2층집에 어떤 게 들어가고, 구체적인 명령을 해서 몇 평을 설계해 줘,라고 한다면 구현되기도 하겠군요. 그렇지만 조금 전 말씀하신 감성이나 감각, 공간에 대한 생각은 AI가 접근하기는 어렵잖아요. 그건 인간이 하는 영역이겠죠. 감성이나 감각, 공간적인 생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건축사들 개개인이 노력이 필요하겠어요. 어떤 노력을 해야 그런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미술관을 가요. 미술관의 그림을 보면서 그림에 담긴 감성들을 몸에 집어넣는다고 생각을 하죠. (미술작품을 바라보면서) 건축 작품으로 뭔가를 표출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사람들이 아름답고 예쁘다고 보편타당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계속 주입하다 보면, 그렇게 주입된 생각들 속에서 창작을 할 때 하나씩 툭툭 튀어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지니면서 전시를 많이 찾아봅니다.
- 전시뿐만 아니고 다른 것을 통해서도 끌어올리는 것도 있나요?
전문가라면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겠죠. 결국은 캐리어입니다. 그게 일반인과 전문가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런 프로젝트 속에서 의뢰인의 요구를, 건축주가 원하는 걸 만들어내야죠. 그게 100%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게 건축사들인데, 결국은 많이 해봐야 합니다. 저는 운이 좋았어요. 2013년부터 많이 했습니다. 큰 프로젝트를 1년에 5~6개 수행했으니까요. 서울 같으면 1년에 하나 정도를 할텐데, 대규모 프로젝트를 그렇게 하는 경우는 적죠.
- 공동주택 설계를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만일 제주에서 개인주택을 설계한다면 어느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싶나요.
지금 있는 사무소에서 공동주택을 많이 해왔고, 그 전에는 단독주택이나 상가 건물도 많이 해봤어요. 다양하게 많이 했죠. 지역을 꼽는다면 절벽 위에 하고 싶어요. (경관심의가 안 될 것이라는 말에) 안 되죠. 하지만 절벽 위는 아무 것도 없잖아요. 180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곳이잖아요.
- 설계를 할 때 자신의 몸에서 어느 부분이 많이 반응하나요.
손으로 그리는 선이죠. 땅을 띄워놓고 그 위에 선을 많이 그어요. 선을 긋다 보면 뭔가 느낌이 생기더라고요. 3~4년차까지는 컴퓨터만 했어요. 이후엔 트레이싱 종이에 선을 많이 그려보죠. 손으로 그리는 작업은 그 틀에서 전체적인 것을 수정할 수 있는데, 컴퓨터는 한번 선을 그리면 잘 고쳐지지 않죠. 버리기도 힘드니까요. 그림은 또 빠르잖아요. 손으로 그리면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오곤 하죠. 물론 멍때릴 때 더 많이 나오긴 하지만요.
- 건축하시는 분들은 책도 많이 읽어야 할텐데, 개인적으로 많이 도움이 된 책으로 어떤 게 있나요.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는 선은 어떻게 그러야 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내용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해줘요. 흔히 무슨 무슨 이념을 말하는 책이 많지만, 이 책은 건축을 쉽게 풀어내고 있어요. <주거해부도감>이라는 책도 있고요.
- 그런 책처럼 건축은 쉽게 접근 가능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예전에 제가 좋아했던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어떤 학생이 “유기적으로 동선을 풀고 아르누보 형태를 만들었다”고 설명을 했는데, 교수남은 그 학생에게 “그냥 편한 길 만들고 자연적 이미지를 넣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하셨어요. 그때 감동을 받았어요. 따지고 보면 건축사들은 의뢰자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사람이기에 어려운 말보다는 편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죠.
- 우리나라나 해외에 있는 건축가 중에서 누군가가, 한번 함께해보자고 했을 때 누구랑 협업을 해보고 싶은가요.
비야케 엥겔스라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인데요, 쉬우면서도 아주 독특한 건축을 합니다. 엥겔스가 제게 함께하자고 하면 무조건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