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3 23:17 (토)
송미아의 독서 칼럼 <19>
송미아의 독서 칼럼 <19>
  • 송미아
  • 승인 2024.04.03 11:37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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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회하는 역사에서 희망을 찾다
제주 4·3동화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

목 차

1. 아동의 시선으로 바라본 43

) 난데없는 삼일절 총소리
) 오름마다 봉홧불이
) 꽃 속에 울부짖는 제주섬

2. 답습되는 처세와 위계

3. 따뜻한 손길의 희망

들어가며

동백꽃 봉오리가 수장된 역사를 꺼내들고 있다. 70여 년간 혼돈에 빠져있던 통울음이 붉은 지평선에 울려 퍼진다. 제주 4·3 사건은 잘못된 세계 질서에서 기인한 폭력의 결과였다.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이념이 대립한 시대의 서막에서 그 희생의 첫 타깃이 제주도가 아니었을까. 우리 땅 어디를 가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해방 후 한국전쟁, 분단 등의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몸살을 앓았다. 4·3 사건 이후 무려 칠 년여의 긴 세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너나없이 억울하게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4·3 사건을 소재로 한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를 쓴 박재형 작가는 아동문학가로서 제주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2003년 이 동화를 쓸 당시만 해도 문학작품을 통해 금기의 역사를 표면 위로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묻혀있던 4·3 사건을 역사 위로 끌어올린 작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이후에, 4·3 사건 관련 시나 소설들은 더러 있었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장편 동화는 전무했다. 4·3 사건은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항쟁인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인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이 글을 쓰는 게 고민스러웠다고 작가는 서문에서 밝힌다.

1999년 12월에 4·3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3년에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가 채택되었고, 진실규명을 위한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즈음하여 제주 출신인 작가가 4·3을 동화화하여 미래세대에 알리는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행히 2021년에 4·3특별법이 전면적으로 개정되면서 제주섬에 가려졌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이 아픔의 역사를 참회하고 기억하길 바라는 움직임과 함께, 이십여 년 전 4·3 역사동화로서 세상에 첫발을 디딘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를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들에게 권장하며 이 책의 가치를 꺼내 본다.

일인칭 주인공 어린 소년의 시점으로 써 내려간 이 동화는 4·3 사건의 역사적 아픔을 아이들 눈높이로 맞춰내고 있다. 굵직한 사건 전개와 함께 주인공 경태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4·3 사건의 참혹성만이 아니라, 당시 제주 문화도 담아내고 있다. 특히 4·3 사건에 드러나는 갖가지 군상들이 어린이 교실에서 답습되며, 비로소 동심 내부에서 치유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숨은 가치가 한층 돋보인다.

이번 독서평론에서는 기성세대로부터 답습되어온 폭력이 교실에서 구현되는 실태를 살펴보고, 미래 세대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아동의 시선으로 바라본 4·3

이 동화는 마을과 학교 두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경태의 가족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 경찰인 민수 아버지, 산사람, 군인, 서청 등 사삼의 군상들이 굵직한 사건들에 투영된다. 한편, 경태를 중심으로 영수, 종국이 등과 갈등하는 인물 민수, 민수 패거리, 선생님 등의 생활이 교실에서 펼쳐진다. 친미 경찰 앞잡이의 전형인 민수 아버지는 경태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잘못된 권력을 내세우며 수시로 폭력을 휘두른다.

삼촌이 산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주인공 경태네 집은 ‘빨갱이’란 딱지가 붙고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경태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산사람에 의해, 아버지와 형은 폭도로 오해받아 군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누나는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투입된 서청(서북 청년)에 강제로 시집가야 했다. 이처럼 경태의 가족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무고하게 희생되어야 했다. 동화의 발단 부분은 주인공 경태의 집과 학교 생활상, 당시 문화와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알려주는 소소한 사건이 제시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주요 사건에서 보여주는 어른 세계가 학교 교실로 답습되는 내용 위주로 다루고자 한다.

가) 난데없는 삼일절 총소리

삼일절 기념식 행사를 재구성한 부분에서 동화의 긴장감이 시작된다. 읍내 기와집 풍경, 태극기를 든 사람들, 구경나온 사람들 등 구름떼처럼 밀려오는 사람들의 장면을 주인공 경태의 시선으로 묘사된다. 어른들은 ‘3·1 정신을 물려받아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하자’라는 플래카드를, 학생들은 ‘미군은 물러가라’의 플래카드를 통해 삼일절 행사의 취지를 보여준다.

“저런! 아이가 다쳤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아이가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중략)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널려 있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기 시작했다.
“탕!탕!” 총소리가 들리는 건 순간이었다. (중략)
형이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형을 따라 달아나다가 뒤를 돌아보니 경찰서 망루에서 총을 쏘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작가는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깔리는 사건, 광장을 울리는 총성을 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살아남으려는 경태의 행동을 통해, 이 동화의 주인공이 어린 소년이라는 점을 주목시켜 준다. 경태가 만난 풍경들과 참상을 ‘신나는 일’인 것처럼 친구에게 들려주는 어린 소년의 시선은, 제주 4·3의 도화선을 알리는 총성과 대비시키면서 독자들에게 비극의 전주곡을 들려준다.

나) 오름마다 봉홧불이

4월 2일 친척 형 결혼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경태와, 혼란스럽고 긴장을 놓지 못하는 어른의 상반된 모습이 묘사된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경태는 붉게 타오르는 다랑쉬오름을 넋 놓아 바라본다. 주변 오름까지 활활 타오르고 순간 총소리까지 들려오는 상황이라 불안감에 경태는 잠을 못 이룬다. 이튿날 새벽에 지서에 무장한 산사람들이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산에 올라간 삼촌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경태의 상황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눈높이로 펼쳐지는 사건 묘사는 어른 세계와 대비하며 직접적인 표현만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일면을 보이려는 작가의 시선이 담겼다.

“난 오름에 불이 붙는걸 보았어. 너희들은 못 봤지? 그런건 꼭 봐야하는데 말이야. 정말 멋지더라. 그게 바로 봉홧불 하는 거야. 봉홧불 알지? 옛날 사람들이 먼 곳에 소식을 전할 때 봉수대 올라가 피웠다는 그 봉홧불 말이야. 맞아! 산 사람들이 봉홧불을 신호로 해서 쳐들어 온 거로구나.”

- 본문 중에서 -

김상남 그림, 본문 삽화 p62.
김상남 그림, 본문 삽화 p62.

마을의 참상과는 달리, 학교로 모여든 아이들 교실의 떠들어 대는 소리는 여전했다. 봉홧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정말 멋지더라”라고 표현할 수 있는 천진난만함에 우리의 눈길을 주목시킨다. 소년 경태를 통해 걱정과 불안한 상황을 가슴 한쪽에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직관적으로 표출하며 ‘현실을 잊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봉홧불과 대비되는 아이들의 맑은 동심을 복선으로 깔며 울부짖는 제주섬을 예고하고 있다.

다) 꽃 속에 울부짖는 제주섬

벚나무에 하얀 꽃들이 구름처럼 피어났다. 복숭아나무도 새색시 얼굴 같은 연분홍 꽃을 피웠다. -중략- 한라산이 아지랑이 사이로 아른거리고 뻐꾸기 노랫소리가 마을로 찾아들었다. 봄이 온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이 동화의 강점은 동화의 비극성과 대조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작가 특유의 시적 문체로 묘사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처절한 아픔 앞에 도입부 장면묘사가 틈틈이 있어 4·3의 참혹성을 극대화 시킨다. 봄이 온 마을을 감싸고 있을 때 제주 사람들에게는 울부짖는 참상이 펼쳐진다. 경태와 형은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외가댁으로 보내지지만, 불안한 상황은 외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당시 4·3 사건의 비극이 제주섬 전체를 뒤덮고 있음을, 제주섬의 매혹적인 비경의 뒤안길에는 어디나 4·3의 아픔이 떠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가자 사람들은 총소리가 난 굴렁밭을 향해 뛰어갔다.
“사람이 죽었다! 모두 죽었어.”
한 아주머니의 외침에 주춤주춤 걷던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시신들이 나무토막처럼 굴렁밭을 굴러다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왔다.

- 본문 중에서 -

김상남 그림, 본문 삽화 p135.
김상남 그림, 본문 삽화 p135.

군인과 경찰은 국가 권력이 내려준 생사여탈권을 쥐고 사람들을 살려내고, 죽인다. 군인과 경찰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이 끌려간 굴렁밭은 총소리와 울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살아 있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죽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폭력성은 여지없이 폭로된다. 이러한 잔혹성을 알리기 위해, 이 동화에서는 사람들이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동시에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삽화(135쪽)로 그린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정서적 울림을 삽화가 도와주고 있다. 당시 제주 곳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집단 학살을 당해야 했던 불합리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산사람들과 경찰에 괴롭힘을 당하며 하나둘씩 집을 비우고 떠나야 했다. 경태네 가족은 삼촌 때문에 민수 아버지에게 빨갱이로 찍혀서, 영수네는 아버지가 서북청년단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가 미움을 받아서, 미순이네는 산에 올라간 오빠 때문에 경찰과 서북 청년들에게 시달리다가 동굴로 가는 장면들. 한 겨울 추위와 함께 짐을 지고 떠나는 제주섬 곳곳, 암흑세계로 이동하는 처절한 행렬의 군상을 생각하게 한다.

동백나무 아래에는 빨간 동백꽃이 무더기로 떨어져 누워 있었다. 동백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시신 주위를 물들였던 빨간 피처럼 보였다. 그때 동백나무 사이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초록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잔혹했던 날들, 제주는 해마다 동백꽃이 피었다 지고 다시 피었다 진다. 붉은꽃, 아니 ‘빨간꽃’이라고 하자. 동백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4·3의 슬픈 기억을 꺼내게 한다. 통째로 떨어져 누운 동백꽃송이처럼 땅바닥에 뒹굴던 목숨들…, 천진난만한 시선을 보여줬던 경태마저도 동백꽃 송이송이를 보는 순간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을 떠 올리듯, 동백은 제주섬을 뒤덮은 붉은 역사의 아픔을 상징한다.

“아버지, 형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에요? 총소리가 났어요!”
“쉿” 아버지가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폭도를 잡았다! 폭도를 잡았어!” 누군가 소리쳤다.
“폭도 굴이다!”

- 본문 중에서 -

동굴도 안전하지 못했다. 폭도들을 잡았다며 군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던 동굴 안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다. 그때 밖에서 연기가 새어 들어왔고, 마을 사람들은 동굴에 숨었다는 것만으로 폭도로 낙인찍혀 죽임을 당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경태 형은 총에 맞아 눈밭에 붉게 쓰러져 있었다. 어린아이 목숨마저 빼앗아 가는 장면은 가슴에 남았던 일말의 희망마저도 지워버리게 한다. 마을이 송두리째 소멸하여 가는 이 상황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들 시선이 비극의 농도를 극대화한다.

 

2. 답습되는 처세와 위계

작품의 중심인물인 경태와 민수 두 소년의 학교생활을 보려고 한다. 주인공 경태는 친구의 아픔을 읽어주는 따뜻함을 지녔으며,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이 뚜렷하여 위기에 처한 친구들의 아픔을 해결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한편, 경태와 갈등 관계에 놓인 인물은 민수다. 민수는 타인의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을 따르는 패거리들과 함께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기회적 행동을 주저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인물로 그려진다.

“난 그런 것까지 책임 못져. 삐라를 주워 온 종국이도 잘못이 커.”
“뭐라고 종국이 잘못이 크다고?” 나는 정말 어이없었다.
아무리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지만, 민수 입에서 종국이 잘못이 크다는 말이 튀어나올 줄 몰랐다.
“너 정말 이럴래?”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본문 중에서 -

산사람들이 뿌린 삐라를 주워 왔다는 것만으로 미군 앞잡이인 민수 아버지에게 끌려가 고문당했던 종국이와 종국이 아버지. 8·15해방 이후 삐라는 '소리 없는 총성'이라 할 정도로 좌·우익의 심리전의 주요 무기였다. 두 진영은 흑백논리를 내세워 삐라를 퍼뜨리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일반 도민을 비롯한 어린 소년에게는 하늘에서 뿌려진 그저 신기한 종이였을 뿐이었다.

경태는 그 삐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상을 의심받고, 진영을 나누어 끌려가고 고문을 받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온당치 못한 상황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선생님만은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리라는 믿음에서 말씀드렸으나 외면당한다. 담임 선생님은 민수가 종국이를 괴롭히고, 반 친구들에게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묵인한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과 말로, ‘빨갱이’로 찍히거나 ‘폭도’로 몰리는 등 예기치 않는 상황들에 개인의 양심이나 가치관 따위를 운운할 여유마저 잃어버렸다. 선생님의 침묵은 4·3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어른 세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 하지 마. 동네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모두 억울한 사람들이야.” 내가 마을 사람들 편을 들자 민수는 나를 사납게 쏘아보며 말했다.
“너도 조심해. 너희 식구가 산사람들 편이라는 거 다 알아. 내가 마음만 모질게 먹으면 너희 집도 쑥밭을 만들 수 있으니까 알아서 해.”

- 본문 중에서 -

어느 날 민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산사람에 의해 돌아가시는 일이 벌어졌고, 산사람과 관련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민수 아버지에 의해 모래밭에서 한꺼번에 총살당해야 했다. 민수 아버지의 무자비한 권력 남용은 민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마음만 모질게 먹으면 너희 집도 쑥대밭을 만들 수 있으니까 알아서 해.’라며 어른의 행동을 답습한다. 어른 세계를 답습하는 민수의 행동은 도덕과 정의를 배제한 맹목적 동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민수를 통해서 주체성을 망각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어른 세계의 일면을 만난다.

어린이들이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동화의 스토리 전개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일차적 해석에서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지침이 필요하다. 민수를 단지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개인적 잘못으로만 치부할 것인가. ‘4·3 사건의 참상에서 왔던 또 다른 피해자의 군상은 아닌가?’라는 관점에서도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교문에 민수네 패거리가 서 있었다. (중략)
내가 다가가자 민수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뒤이어 철민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야, 임마!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어? 폭도 새끼가 겁도 없이.” (중략)
경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철민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철민이 코피가 쏟아지자 민수가 큰소리로 “자, 모두 덤벼!”라고
명령을 내리자 한꺼번에 경태 주위로 몰려들어 주먹과 발길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 본문 중에서 -

작가는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광기 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 세계에 답습되는 이 역사적 비극을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민수의 잘못된 권력에 모여드는 패거리, 그것이 잘못인 줄 알지만 동조하는 아이들. 그러나 경태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그들에게 저항했다.

경태에게 붙여진 ‘빨갱이’란 딱지는, 경태의 입을 닫게 하고 때론 숨을 죽여야 하는 두려운 존재로 작용한다. 빨갱이란 딱지와 함께 이제 ‘폭도’라는 이름까지 추가되었다. 낮에는 군인 경찰을 피해, 밤에는 산 사람을 피해 바위틈이나 동굴 속에 숨어들어 가는 우리들이 폭도라니. 경태 안에 움터있던 저항정신이 무조건 함구하고 있던 어른 세계의 질서를 깨부순다. 그렇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른들을 대변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침묵이었다면, 권력의 틈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용기이다. 작가는 경태의 모습을 통해 부끄러운 어른들의 행동에 일침을 가한다. 경태처럼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주체의식을 가진 어린이들이 많아졌을 때 세상은 좀 더 정의로운 방향으로 변화되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정사(正史)에서 느낄 수 없는 진실의 통로. 그 안에서 인간의 진면목을, 숨어있던 사회의 진실을 꺼내는 것이 문학이다. 경태의 행동은 숨죽여 살아야 했던 제주도민들을 대리 만족시켜 준다. 오랜 역사를 거슬러보면 변방의 섬 제주는 늘 외세의 침탈에 맞서야 했고,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입지 조건에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에게는 항상 맞서 싸우며, 우리 것을 지켜내려는 저항정신이 뿌리내려 있었다. 그 정신을 기저로 분단을 막으려 했던 것이 도화선이 되어 4·3 사건에 이른 것이 아닌가. 경태의 주체적 행동은 어른 세계에 가려진 진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3. 따뜻한 손길의 희망

경태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불의에 저항하다 보니, 민수 패거리들에게 주먹과 발길질 세례를 받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내가 참자. 언젠가는 너도 눈물 흘릴 날이 올 거다.’ 그런데 경태의 소원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민수 아버지가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것이다. 천년만년 누릴 것 같은 민수 아버지의 권력이 무너지자, 민수의 권력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동안 민수의 그늘에서 충성함으로써 안락함을 누렸던 친구들이 모두 민수를 떠난다. 민수 잘못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덤벼들지 못했던 친구들은 용기를 내어 민수에게 분풀이하는 등 교실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된다.

결국 부조리한 질서의 중심축을 이루던 민수 아버지가 죽게 되면서, 교실에서 민수에 의해 편승하였던 모든 부조리한 질서는 맥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민수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반 아이들과 달리 경태는 어떤 상황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민수가 밉지만, 민수에게 무조건 분풀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좋은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도 가르쳐야 다시는 그런 역사를 만들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경태의 역할을 그려 넣은 것 같다. 하여, 4·3의 어른 세계에서 답습되었던 교실을 반면교사 삼아 세상을 바르게 보고, 경태처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슬기를 지녀야만 다시는4·3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동네 사람들에게 못 할 짓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요. 경태 어머니도 우리 집 양반이 많이 미웠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신 용서를 빌러 왔어요.” 민수 어머니는 울면서 말씀하셨다.
“전에는 많이 미웠는데, 이젠 다 지나간 일인걸요.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 본문 중에서 -

경태는 민수 어머니의 용서를 받아주는 자기 어머니를 보면서 울분을 터트린다. 민수 아버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독자들 역시 경태의 반감을 동일시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야 했고, 누군가는 손을 잡아줘야 했다. 4·3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생명에 위협을 받았던 불가피한 상황이라, 관계성 상실로 공동체 붕괴의 위기 마저 겪고 있었다. 작가는 경태 어머니가 민수어머니를 받아주는 태도를 통해 ‘관계성 회복’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아이들이 답습할 수 있도록 따뜻한 어른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 공부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민수가 따라왔다. (중략) 혹시 몽둥이로 내리치려는 거 아냐?’ 나는 민수 눈치를 보며 걸어갔다. 여차하면 민수와 맞서 싸울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중략)
“경태야. 미안하다. 내가 철없이 굴었지?”
“아니”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 본문 중에서 -

경태는 얼떨결에 아니라고 대답한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둔 응어리는 무언가? 민수가 못된 짓을 할 때마다 화가 났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라는 민수의 말에, 몇 번 뺨을 날리던 경태는 다시 주먹을 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울고 있는 민수를 보니 밉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민수도 자신처럼 아버지 없는 슬픔을 평생 안고 살아갈 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민수 어머니가 찾아와서 용서를 빌고, 경태 어머니가 용서해 주는 과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특히 경태는 학교생활 내내 민수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당사자라 용서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수 어머니를 받아주는 어머니의 따스함에서 저도 모르는 마음이 깃들었지 않았을까. 경태는 과거 학교생활에 연연하지 않고, 민수의 용서를 받아준다. 독자는 여기에서 경태와 민수, 두 손이 나누는 따스한 희망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나오며

박재형 작가의 창작 의도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재인식시키는 중요한 시도였다고 본다. 아픈 역사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통해 진일보하는 역사의식이야말로, 상처에서 성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어느 한 세대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집단의식이 희망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어른들의 역할 재설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는 4·3 동화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역사동화로서의 가치를 발한다.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는 도덕과 윤리를 무너뜨리는 부당한 세계와 4·3의 잔혹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인명 피해 외에도 공동체의 붕괴를 불러온 배신과 불신의 역사다. 이 동화에서 기성세대들의 ‘행동의 동기’를 아이들 교실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이들의 순수성은 어른 세계의 답습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내면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며 상생의 손길을 내밀었다.

다만 이 책과 같은 역사 동화를 만났을 때, 이분법적인 사고로 접근하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인 것 같다. 교실 안의 풍경을 단지 개인적인 갈등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역사의 뒤안길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진실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계기로 이 책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 동화는 암울했던 4·3 당시의 제주민들의 힘든 고비를 꿋꿋이 이겨내고 언젠가는 모두 마음의 손을 잡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그렇다. 4·3은 칠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당시 사람들의 역할과 상황에서 빚은 불신의 잔재가 남아있다. 그 간격을 좁혀보겠다는 희망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민수가 내미는 손을 경태가 꼭 잡아주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의 봉홧불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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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녀 2024-04-10 13:30:38
아주 오래전에 아이 키우면서 같이 읽었던 동화책이네요~~작가님의 분석을 읽으니 이 동화가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장치를 연결했다는 것. 아마도 평론가님의 글이 없었다면 절대 생각하지 못했늘 겁니다. 한권의 책을 그냥 넙죽 읽고 말 일이 아님을 반성하게 하는 평론입니다.

김미진 2024-04-03 22:01:03
정말 날카롭게 분석하셨네요. 책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사삼에 대한 생각에 숙연해집니다.

신윤덕 2024-04-03 20:52:36
어린이에게 가슴아픈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아름다워서 더욱 가슴 아픈 제주....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주마미 2024-04-03 20:30:27
아픈 역사를 충분히 알고, 제대로 인식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남기는 절차는 어른들이 해야 할 숙제인 것 같습니다. 역사동화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이 아이들에게 올바르게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강정희 2024-04-03 18:02:58
제주도민인 제가 자라면서 4ㆍ3 이야기만 나오면 부모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봐왔습니다. 너무도 쓰리고 아픈 고통이었던거지요. 그렇게 제대로 설명을 듣지도, 묻지도 못한 채 저는 역사책으로 배웠어요. 이렇게 4ㆍ3에 대한 좋은 책들이 나오고 자꾸 이야기가 되면서 제대로 규명되고 명명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박재형 작가님도, 송미아 평론가님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