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02:42 (토)
“어느 밭은 조 갈고, 감자 심엄시믄 온다던 아버지…”
“어느 밭은 조 갈고, 감자 심엄시믄 온다던 아버지…”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5.16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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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1년 만기 출소 후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숨진 아버지 사연에 ‘눈물바다’
제주지법 제4-1형사부, 제주4.3 수형인 제28‧29차 직권재심 60명 무죄 선고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묘역에 있는 조형물. 한 수형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 쳐다보는 표정이 애처롭다.  ⓒ미디어제주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묘역에 있는 조형물. 한 수형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 쳐다보는 표정이 애처롭다.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 당시 군사재판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됐던 희생자들에 대한 28차, 29차 직권재심이 1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잇따라 열렸다.

제주지방법원 제4-1형사부(재판장 강건)의 심리로 오전과 오후로 나눠 진행된 이날 재심에서는 60명의 희생자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군사재판을 받고 형무소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됐거나 수감 도중, 혹은 만기 출소 후에 예비검속으로 다시 끌려가 희생된 이들이었다.

죽어서도 억울한 누명을 떨쳐내지 못했던 이들을 대신해 희생자들의 조카, 혹은 손주들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지자 유족들의 한 맺힌 사연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던 故 양제추씨. 양씨는 만기 출소 후에 제주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서귀포경찰서로 이송된 후에 행방불명이 됐다.

고인이 된 양씨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간 양민철씨는 “오늘 법정에 오면서 제일 궁금했던 게 아버님이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는 거였다”면서 “어머님께서 살아계셨을 때도 형무소 얘기를 안해주셨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집안에서도 금기시됐던 게 사실이 왜곡돼 의심을 사지 않을까 해서 쉬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오늘 공소요지에 ‘내란죄’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 가서 소리치면서 외치고 싶은 심정”이라며 울분을 토로한 뒤 “어머님께서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70년 동안 가슴에 묻고 사셨다. 형무소에 다녀온 사실까지도 저희에게 제대로 말씀해주지도 않고 가슴에 묻고 가셨는데, 오늘 이 법정에서 이 문제를 판결해주시고 진상 규명을 위해 합심해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오늘 법정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고인이 된 양씨의 딸 양정자씨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가신 말씀을 전해드리겠다”면서 “‘난 금방 온다. 어느 밭은 조를 갈고 감자 심엄시믄 온다’ 이렇게 하면서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됐다”고 애타는 사연을 소개했다.

양씨는 “아버지가 서른다섯 살 때 4.3사건이 났고, 어머니는 29세에 혼자 딸 다섯을 낳아 기르셨다”면서 “당시 큰언니가 열세 살, 작은언니가 아홉 살이었고 저는 여섯 살이어서 아버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100살까지 살면서 한평생 한눈팔지 않고 우리 딸 다섯 자매를 잘 키우셨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태어난 남동생은 작은아버지의 아들”이라며 “어머니께서 학교도 보내주고 당신이 낳은 아들 이상으로 잘 키워준 덕분에 오늘까지도 자랑스러운 동생을 만나서 함께 살아왔다”고 얘기해 돌아가신 어머니와 형제들이 가장 큰 버팀목이었음을 반추하기도 했다.

행방불명됐던 아버지의 시신을 제주공항 집단학살터에서 찾아 수습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털어놨다.

그는 “아버지는 목포형무소에 있다가 나오셨는데 6.25 때 토벌대에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공항에서 총살을 당하셨는데 시신을 찾아서 4.3평화공원에 모셨다”며 “애석하지만 어느 정도 명예 회복이 된 것 같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4.3유족회장과 서귀포시장을 역임한 바 있는 앙윤경 전 서귀포시장도 희생자 유족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양 전 시장은 “작은아버지께서 예비검속을 통해 희생되셨는데, 제주공항 유해 발굴을 통해 1년 전에 가족 품으로 돌아오셨다”면서 “여기 있는 유족들의 마음을 과연 국가가 얼마나 헤아리고 있을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본다면 그렇게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오늘 재판장님과 변호사님, 검사님 모두 좋은 말씀으로 저희들을 위로해주시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 안도하는 마음이 있지만, 3만여 명의 희생자들과 10만여 명의 유족들에게국가에서 더 많은 피해자 입장을 헤아려 좀 더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주셨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재판장인 강건 부장판사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데 이어 “뒤늦게나마 군법회의 재판의 유죄 판단을 뒤집고 무죄를 밝혔다”면서 “만시지탄이 될지 모르나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가족과 단절돼야 했던 피고인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긴 세월 동안 유족들과 그 아픔을 함께 해온 일가친지들이 ‘망인은 무죄’라고 망인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면서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회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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