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02:42 (토)
“법원 서기였던 아버지, 갓 태어난 저를 보러 가려다…”
“법원 서기였던 아버지, 갓 태어난 저를 보러 가려다…”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1.31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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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지서로 끌려가 석 달간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아버지 사연
4.3 당시 일반재판에서 유죄 선고받은 9명, 재심 결과 모두 무죄
지난해 4월 2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가족을 찾은 유족들이 각명비 앞에 두고 간 국화꽃이 놓여있다.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지난해 4월 2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가족을 찾은 유족들이 각명비 앞에 두고 간 국화꽃이 놓여있다.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31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

이날 법정에서는 4.3 당시 군사재판이 아닌 일반재판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방조 및 음모, 포고령 2호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이 내려진 4.3 희생자 9명에 대한 재심이 진행됐다.

여느 직권재심과 마찬가지로 검사 측이 “70여 년 전의 일로 겪어온 희생자와 유족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다”면서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 재판부는 검찰 측과 변호인의 요구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어떤 죄든 유죄가 입증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는 범죄 증명은커녕 증명을 시도했다는 근거조차 제출된 적이 없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재판장인 장찬수 부장판사는 무죄 선고를 내리기 전, 유족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하시라며 발언 기회를 줬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한 유족은 포고령 2호 위반으로 제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 후에 풀려나 2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연을 담담히 소개했다.

그는 “생전의 아버지한테서는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던 얘기를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면서 “저희 마을이 중산간 200고지인데, 당시 ‘폭도’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다 돌아가셨다”고 항변했다.

마을이 불에 타 없어지고 해변 마을인 곽지로 소개되면서 겨우 살아남았는데, 집회를 선동할 상황이었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는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모두 그런 분들일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재판부에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이어 발언 기회를 갖게 된 임성주 씨(75)는 지서에 끌려갈 당시 법원 서기였던 아버지가 갓 태어난 자신 때문에 돌아가셨다면서 회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임씨는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저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텐데…. 법원에서 호적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던 사람이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런 일을 저질렀겠습니까”라며 70여 년 전 지서에 끌려가 석 달간 고문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연을 소개했다.

임씨의 할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죽은 후에도 “4.3에 대해서는 말을 안하는 게 좋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군사재판도 아닌 일반재판을 받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된 사실을 지난해 2월에야 국가기록원에 있는 재판 기록을 찾아 처음 알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제가 태어난 후 돌이 갓 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어 외로웠고, 아버지가 없으니까 동네에서도 저를 천하게 보곤 했다”면서 “어른이 되면 재심을 받아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재판 상황을 알 길이 없었는데, 4.3도민연대 양동윤 대표 덕분에 당시 재판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양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재판장인 장찬수 부장판사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갖고 있느냐”고 물은 뒤 당시 양민증에 붙어있던 사진을 제사 때 쓰고 있다는 그의 답변을 듣고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부모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는 게 다행인 희한한 세상”이라는 말로 그를 위로했다.

재판부의 무죄 선고가 내려진 후 법정 밖으로 나와 <미디어제주>와 만나 얘기를 나눈 임씨는 “재판 기록의 기소 내용을 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200원을 건넸다는 얘기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한테 줬는지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면서 “오늘 바로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서 말씀드려야겠다”고 말하면서 74년 만에 아버지에게 무죄가 선고된 데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이날 제주지법 201호 법정에서는 이들 9명의 일반재판 희생자에 대한 재심 외에도 60명의 수형인에 대한 직권재심이 진행돼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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