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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속 74년 숨겨온 억울함, 마침내 '무죄'로 풀어내다
제주4.3 속 74년 숨겨온 억울함, 마침내 '무죄'로 풀어내다
  • 고원상 기자
  • 승인 2022.12.06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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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생존수형인 박화춘 할머니, 6일 재심서 '무죄'
4.3희생자가 아닌 수형인에 대한 첫 직권재심

[미디어제주 고원상 기자] 74년을 숨긴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가슴 속에만 품어두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한이 맺히고 억울하기만 한 이야기.

박화춘 할머니(95)는 74년 전인 1948년, 제주를 휩쓴 4.3의 광풍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잡혀가자 자신도 몸을 숨겼다. 잘못은 없었지만, 서귀포시 강정리의 한 밭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숨어 지내던 중 12월의 추운 겨울이 찾아왔고, 큰아버지의 제사날이 찾아왔다. 박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제사를 챙기기 위해, 숨어지내던 곳에서 나와 마을에 있던 어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박 할머니는 그 후 오랜 기간 어머니의 집에 닿지 못했다.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던 박 할머니는 길 가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밥을 준다는 말에 그 사람을 따라 산 속의 굴로 들어갔다. 박 할머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얼굴을 돌린 채 뒷짐만 지고 있었다고, 박 할머니는 그 사람을 그렇게 기억했다.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린 직권재심에 출석한 제주4.3생존수형인 박화춘 할머니(95). /사진=미디어제주.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린 직권재심에 출석한 제주4.3생존수형인 박화춘 할머니(95). /사진=미디어제주.

그 사람을 따라 들어간 굴 속에는 처음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박 할머니가 그 굴 속에서 하루를 지냈을까, 날이 밝자 굴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박 할머니가 나가서 나가서 보니 어깨에 총을 맨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굴 속에서 나온 사람들을 체포했다. 체포영장도, 구속영장도 없었다. 어떤 죄목으로 체포되는지 고지도 없었다.

박 할머니 역시 그렇게 그들에게 잡혀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갔다가, 다시 제주경찰서로 이송됐다. 박 할머니는  제주경찰서까지 끌려가서야, 그 자리에서 날조된 자신의 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 날조된 자신의 죄명을 스스로 뱉어내야 했다.

제주경찰서로 끌려간 박 할머니는 거기서 거꾸로 매달린 채 고문을 당하다, 그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말을 뱉어냈다. 남로당 무장대에게 보리쌀 2되를 건내주었다고.

군경은 그 보리쌀 2되로 박 할머니가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들과 공모해, 군인 및 경찰 등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하는 등 폭동을 했다”는 죄명을 만들어냈다.  그 거짓 이후에나 박 할머니는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박 할머니는 그 해 12월26일 재판도 없이 징역 1년이라는 형량을 받고,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3살이었던 딸과 함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에는 그 딸마저 전주형무소에 떼어놓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될 수 밖에 없었다.

제주4.3생존수형인인 박화춘 할머니(95)가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201호에서 열린 직권재심에서 검찰 측의 최후변론을 듣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제주4.3생존수형인인 박화춘 할머니(95)가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 201호에서 열린 직권재심에서 검찰 측의 최후변론을 듣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쳤을 때, 할머니는 전주형무소로 돌아가 딸을 찾았고, 다시 목포에서 배를 탔다. 그리고 나서야 제주시를 거쳐 서귀포시의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큰아버지의 제사를 챙기기 위해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지 1년이 넘어서야, 박 할머니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할머니의 자식들도 이 이야기를 몰랐다. 할머니는 차마 자신의 자식들에게 자신이 4.3 당시 군경에 붙잡혀 징역살이를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박 할머니는 그렇게 74년을 자신의 이야기를 숨겼고, 가슴 속에 묻어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74년 동안 자신만의 여정을 이어왔다.

그 74년 중 박 할머니는 형무소까지 데려갔던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고, 그 외 두 명의 아들도 자신보다 앞서 보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나서야 올해 4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과거를 털어놨다.

자신과 같이 억울한 삶을 살았던 4.3수형인들의 재심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용기를 얻었고, 무엇보다 박 할머니도 74년을 자신을 옥죄인 사슬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박 할머니는 재판정 앞에 서게 됐다. 자신은 죄가 없었다고 말하기 위해.

제주4.3생존수형인인 박화춘 할머니(95)에 대한 직권재심이 6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제주4.3생존수형인인 박화춘 할머니(95)에 대한 직권재심이 6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6일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박 할머니의 재심이 진행됐다. 박 할머니는 74년 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숨겨왔기에, 4.3희생자로 등록되지도 않아 검찰의 직권재심 대상자도 아니었지만, 검찰은 박 할머니를 위해 지난 10월27일 직권재심을 청구했다. 희생자가 아닌 생존수형인에 대한 첫 직권재심 청구였다. 

검찰은 그리고 이날 최후 진술을 통해 74년 전 이뤄진 박 할머니에 대한 체포와 고문, 거짓자백을 받아냈던 일이 모두 잘못된 일이었음을 강조했다.

검찰은 “4.3사건 진상조사 당시 장기간에 걸쳐 4.3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했지만, 피고인(박 할머니)를 포함해 군법회의 재판을 받은 수형인들에 대한 구속영장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아울러 피고인의 구체적 진술 등에 비춰 진술의 신빙성이 높아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경찰에서 고문과 불법 구금 등의 불법적인 수사로 보리쌀 2되를 남로당 무장대에 주었다고 허위 진술을 한 것이므로, 피고인의 진술은 불법수사에 의한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며 “이번 직권재심으로 국가 공권력의 위법하고 부당한 잘못을 바로잡고, 앞으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어 박 할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검찰은 “할머니는 잘못한 게 없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잡혀가서 거꾸로 메달려 고생이 많았다. 할머니는 잘못한 게 없으니, 그저 마음 편안하게 갖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러면서 재판부를 향해 박 할머니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변호인도 재판부를 향해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변호인은 “피고인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받고, 이후에도 가족들이 피해를 받고 손가락질을 당할까봐 70여년 동안 형무소 생활을 숨겨왔다. 이와 같은 평생의 한을 풀 수 있도록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말했다.

이날 박 할머니에 대한 재심을 담당한 제주지방법원 형사 4-1부 박 할머니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박 할머니를 향해 “오늘의 판결로 억울한 것들이 다 풀어졌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재판 과정에서 눈물을 훔치면서도 “자신이 옥살이를 했던 것을 털어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 모여 고생하게 만들었다”며 연신 자신의 둘러싼 이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고맙다. 할 말이 많아도 그 말을 다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74년을 이어온 고된 여정 끝에, 마침내 박 할머니는 이렇게 마음의 무거움을 덜 수 있었다.

재판부는 주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는 박 할머니를 향해 “정이 많으신 거 같다”고 말했다. 법정에 함께 있던 박 할머니의 아들은 그 때 “어머니가 고집만 있다. 이제까지 이걸 말하지 않은 걸 보면”이라며 재판부의 말에 농담을 던졌다. 재판부도, 박 할머니도, 법정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아들의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날의 재판은 그렇게 웃음 속에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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