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5:03 (금)
“팔순 어르신들, 작가님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팔순 어르신들, 작가님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11.28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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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窓]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7기 졸업에 부쳐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교사들의 열정

2016년 이후 53명 어르신 작가 배출해

숨겨둔 제주 여성 이야기 오롯이 새겨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졸업은 기쁘면서도 슬프다. 기쁜 이유는 “해냈다”는 결과물이 존재해서이다. 슬픈 이유는 ‘졸업’이라는 단어에 있지 싶다. 생각해보라. 졸업에 든 ‘마칠 졸(卒)’은 솔직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졸업은 했으나 ‘마칠 졸’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이 있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7기 졸업식. 제주그림책연구회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7기 졸업식. ⓒ제주그림책연구회

얼마 전이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7기 졸업식을 마친 팔순의 할머니들. 그림책을 하나씩 손에 든 그들에겐 졸업식이 내내 아쉬웠다. 그나마 그런 아쉬움을 덜어준 건 그들의 손에 든 그림책이다. 어르신들은 그림책학교를 한다기에 ‘학생’으로 참여했다가, 졸업식과 동시에 그림책을 저술한 ‘작가’로 변신하는 기적에서 졸업식의 위안을 찾는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는 지난 2016년부터 발을 뗐다. 지금까지 쉰세 분의 어르신들이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글도 모르던 어르신들, 그림이라고는 그려본 적도 없는 어르신들. 그들 스스로는 책을 내리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작가라는 이름을 걸고 세상에 책을 헌사했다. 책을 내기까지 어르신들은 몸에 있던, 마음에 있던 모든 걸 꺼내놓았다. 솜씨는 기성 작가 부럽지 않다. 어쩌면 때를 타지 않았기에 작품은 더 순수한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바당 깊은 디 못 들어가게 허주게.
야픈 디, 발 ᄃᆞᆼ가지는 디.
그때 바당 앞에 살멍 수영 못허는 건 나뿐.
“아, 그 시절이 좋았지.”

- 김순자 ≪잘도 맛나≫ 중

멩질 되민
옆집이 사는 이칩 ᄄᆞᆯ덜이 놀레 와.
마당에서 놀단
“반 태왐저.” 허민
나만 내배동 다 가불어.
나도 반 받앙 먹고 싶은디

- 문순옥 ≪한라산 보당 보민 생각나주게≫ 중

아침밥 먹기 전에 물 질어와야 핸.
허벅을 물에 ᄃᆞᆼ그당 민질락허민 물에 빠졍
팡더레 심엉 올라와도 졸바로 헤져시냐.
허벅 졍 오당 푸더졍 물 다 쏟아지민 울멍 오라낫저.
어떤 날은 벗 만낭 말 ᄀᆞᆮ당 보난 늦어젼
석삼년 살앙 왓덴 욕도 하영 들언.

- 강복자 ≪웬정이 꽃밭≫ 중

어르신들의 그림책은 그들이 살아온, 아니 제주여성들이 살아온 고난의 사초(史草)다. 다듬어지길 기다리는 역사의 한자락이다. 말하고 싶어도 숨겨왔던 이야기를 그들의 그림책에 오롯이 새겼다. 나이 들면 옛이야기는 더 기억으로 남는 법이라지만, 혹시 그 이야기도 사라질까봐 어르신들은 숨겨둔 이야기를 책에 알알이 부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에서 소외되던 그들에게 ‘작가’라는 선물로 화답하니 얼마나 좋은가.

팔순 할머니들을 작가로 만든 이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선생님들의 헌신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선생님들은 어르신과 머리를 맞대고 책 만들기 작업을 했다. 그들은 글을 잘 모르는 어르신들의 입이 되고, 손이 됐다. 그렇다고 그림에 손을 댄 건 아니다. 그림은 순전히 팔순 어르신들의 머리와 가슴과 손에서 나왔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7기 졸업생들의 그림책.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7기 졸업생들의 그림책. ⓒ미디어제주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선생들의 열정을 잘 아는 할머니들은 아주 먼 곳에서 걸음을 옮겼다. 성산에서, 애월에서, 대정에서…. 팔순의 할머니들은 그림책학교가 열리는 제주시 동지역으로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수업은 일대일이 원칙이었기에, 할머니들은 정성을 다해 제주시를 오갔다. 배움을 전하는 이들의 열의와 배우려는 이들의 열정의 결과물임을 그림책은 말한다.

올해로 7번째. 매년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된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선생 한 분이 올해 졸업식의 풍경을 다음처럼 전했다.

“졸업장을 받은 할머니가 주저앉는 거예요. 펑펑 우세요.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서러움이 맺혀 있었어요.”

그림책은 할머니들에게 정신적인 위안도 준다.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은 어르신들에게 힐링을 선사하고,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끼게 만든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은 쓸모가 있음을 결과물인 그림책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장 빛났을 때를 말하는 ‘화양연화’는 언제일까. 젊음이 피어나는 20대? 아니다. ‘작가님’이 된 할머니들에게 화양연화는 ‘지금’이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졸업한 어르신 가운데 세상과 이별을 고하기도 한다. 지난해 돌아가신 어르신은 작가로 빛을 발하고 가셨다. 그 ‘작가님’의 딸은 영결식장에 어머니의 그림책을 올려놓았다. “어머니 인생의 화양연화는 그림책을 만든 때였다”고 하면서.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졸업식장은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자리이다. 할머니 작가도 눈물을 흘리고, 그림책을 완성시키는데 도움을 준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선생들도 작가의 탄생에 눈물을 훔친다. 참 고귀한 프로그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마침이 있을테지만,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는 마침이 없기를 바란다. 이유는 넘치고 넘치니까.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맺고 싶다. 졸업이라는 단어에 ‘마칠 졸’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팔순 할머니들이 펴내는 그림책이기에 ‘졸업식’ 대신 다른 단어를 써보면 어떨까 한다. 우린 예전에 서당에서 과목을 통과하면 ‘통(通)’이라고 불러줬다. 아주 잘하면 ‘대통(大通)’이라고 했다.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의 졸업식은 좀 더 특별한 ‘대통식’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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