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5 17:37 (목)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바로 협재 해녀들이죠”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바로 협재 해녀들이죠”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11.08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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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진 어촌계장이 전하는 협재 해녀 역사

 

“1950년대부터 독도를 오가면서 물질을 해와

협재리는 모래밭 많아 바깥물질에 보다 적극

기록화 작업으로 최근 협재리 트위스트공연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제주해녀들은 넓은 바다를 지닌 이들이다. 제주도의 바다만 그들의 영역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중국 등지의 바다도 개척했다. 바깥물질에 나서는 그들은 제주경제의 버팀목이었다.

한림읍 협재리. 옥빛 바다 풍경이 매력적인 협재 바닷가에도 물질하는 해녀들이 있다. 얼마전 마을 공연축제로 올렸던 ‘협재리 트위스트’는 먼바다를 개척했던 해녀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들의 바다는 다름 아닌 독도였다.

협재리 장무진 어촌계장이 얼마전 막을 내린 '협재리 트위스트' 공연을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협재리 장무진 어촌계장이 얼마전 막을 내린 '협재리 트위스트' 공연을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협재리의 장무진 어촌계장은 독도 물질의 시작은 협재리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협재리 트위스트’ 때 올린 장면이 독도 물질에 나섰던 이들의 목소리였다. 장무진 어촌계장은 공연사업을 받아와서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을 해왔다고 했다. 독도 물질에 나섰던 이들은 영상으로 ‘협재리 트위스트’를 빛냈다. 협재리어촌계는 제주문화예술재단으로부터 ‘2022년 제주해녀 문화예술 지역특성화 지원사업’을 받아왔고, 올해 1차년 사업을 무사히 끝냈다.

기자와 한창 얘기를 나누던 장무진 어촌계장이 잠깐 자리를 떴다. 그러더니 귀한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독도 화포채취 작업 시상식 기념’이라는 글이 새긴 흑백 사진이다. 단기 4292년 7월 19일. 사진 속 인물들은 1959년 울릉도와 독도 인근에서 물질을 하던 제주해녀와 사공들이다. 대부분은 협재 출신이다. 해녀들은 물질을 하면서 소라와 전복 등 어패류만 건져 올린 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 혹은 그 이전인 러일전쟁 때 쓰던 화포를 건지곤 했음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장무진 어촌계장은 이렇게 말한다.

“독도에서 생활을 유지했던 분들이 우리 마을에 네 분 살아 계십니다. 여기 사진에 있는 분들 중에는 아흔이 된 김공자 어르신만 생존해 있고요.”

그는 독도 물질의 근거는 협재 해녀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진보다 이른 시기에 협재리 해녀들은 물질에 나섰다. 협재리마을회관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가 독도 물질을 말해 준다.

울릉도와 독도 물질에 나섰던 협재리 해녀들의 기록 사진. 미디어제주
울릉도와 독도 물질에 나섰던 협재리 해녀들의 기록 사진. ⓒ미디어제주

“협재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벌어온 수익금으로 마을에 공헌을 했어요. 그걸 기념해서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를 세워줬던 겁니다.”

기념비는 단기 4289년 7월에 협재리대한부인회가 세웠다고 새겨 있다. 사진보다 3년 빠른 1956년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협재리 해녀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바깥물질을 하며 독도를 경영했음을 알게 된다.

바깥물질은 대규모 군단을 동원하는 작업이다. 30~40명이 한꺼번에 떠난다.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있고, 해녀들을 보조해주는 인력이 있고, 해녀들을 먼바다로 데려다줘야 하는 사공이 있었다. 제주도를 벗어난 바깥물질은 수일, 수개월을 지속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제주해녀들은 우리나라 해안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동해안에서 남해안, 서해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바다는 제주해녀들의 숨이 담겼다. 곳곳의 섬에도 제주해녀들의 보이지 않는 숨결이 있다. 그 많은 바다 중에 왜 협재리 해녀들은 독도를 택했을까? 장무진 어촌계장은 협재리 바닷가의 조건이 바깥물질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어장이 상당히 적습니다. 협재리 어장은 153ha로 제주도에서 가장 크지만 120ha가 모래밭이죠. 나머지 30ha만 물질할 수 있는 어장인 셈입니다.”

협재리와 가까운 곳에 비양도 어장이 있다. 그러나 비양도는 9개 마을이 바다를 나눠서 물질을 한다. 때문에 협재리 해녀들에겐 새로운 바다가 필요했다. 그 바다는 바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독도였다.

1956년에 세운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협재리 해녀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 독도를 오가며 물질을 했다. 이들의 독도 물질은 우리나라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이 되고 있다. 미디어제주
1956년에 세운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협재리 해녀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 독도를 오가며 물질을 했다. 이들의 독도 물질은 우리나라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이 되고 있다. ⓒ미디어제주

“제주 물질은 한계가 있었고, 협재 해녀들이 울릉도로 출항을 많이 가게 됐어요. 거기 살면서 물질을 하는데 울릉도의 어느 선주가 독도에 가면 미역이 어마어마하다고 했던가봐요. 그러면서 독도 물질을 하게 됐고, 독도가 조업금지구역으로 지정된 1970년대 초반까지 협재 해녀들이 독도 물질을 계속한 것이죠.”

독도는 일본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협재리 해녀들의 독도 물질에 관심을 둔 곳이 있다. 경상북도와 독도재단이었다. 그들이 협재 해녀들을 바라본 이유는 ‘독도 거주’라는데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독도에 집단 거주했다는 근거를 찾을 길이 없었는데, 경상북도가 독도 해녀를 찾은 겁니다. 독도 해녀는 한번 들어가면 짧게는 15일, 길게는 4개월을 살았어요. 독도에 2개의 섬이 있는데 서도에 가면 동굴 아닌 동굴 같은 곳이 있어요. 그 밑에 용천수가 흘러서 그걸 기반으로 움막을 짓고 집단 거주를 했던 겁니다. 경상북도가 지난해부터 체계적으로 이와 관련된 작업을 하더라고요.”

이제 보니 협재리 해녀들의 바깥물질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독도를 지키는 근거가 되는 귀중한 행위를 한 이들이다. ‘협재리 트위스트’는 그런 노력을 잊지 말자는 기록화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해녀들이 마을을 위해 기여한 기록은 마을회관 옆에 있는 비석이 말해주거든요. 그걸 그냥 사장시키기엔 너무 안타까워서 소규모 공연 사업이라도 가져온 겁니다. 경상북도와 제주도와도 얘기가 되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마련됐고, 경북 초청으로 우리 마을의 모든 해녀들이 올해 독도를 갔다오기도 했어요.”

독도 물질은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이다. 장무진 어촌계장은 협재 해녀들이 독도를 지킨 산증인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갈 계획이다. ‘협재리 트위스트’를 하면서 만들어둔 영상을 독도재단, 경상북도, 서경덕 교수 등을 통해 알려간다는 구상을 잡아두었다. 장무진 어촌계장은 제주해녀의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가치를 따질 수 없죠. 해녀의 시발점은 제주잖아요. 해녀문화를 다른 곳으로도 전파시킨 사람들이잖아요. 경북이나 다른 지역 해녀들을 만나보면 제주해녀들이 기술을 전파해주지 않았으면 자신들의 지역에 해녀 문화는 없을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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