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검속된 이들에겐 죽음으로 향하던 정거장”
“예비검속된 이들에겐 죽음으로 향하던 정거장”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9.20 0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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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해를 걷다] <6> 옛 제주주정공장

일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연료 만들어

주정공장 역사 잘못 표기된 비문도 있어

문 잠긴 ‘역사기념관’ 제 역할 하지 못해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은 제주로서는 커다란 변화의 시점이다. 그 변화는 다름 아닌 본격적인 ‘제주개발’의 신호탄이었다. 문제는 제주도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로 만든 개발이 아닌,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행위에 따른 개발이라는 점이다. 일제로서는 식민지를 수탈하는 방법의 하나로, 제주도를 개발해서 군수물자를 조달하겠다는 의지도 들어 있다.

<동아일보>(1937년 6월 22일자)를 보면 제주도 개발을 위해 ‘제주도개발회사’를 두고, 사업을 한다고 돼 있다. 사업으로는 목축, 발전(發電), 어업, 농장, 무수(無水) 알코올 제조 등이다. 아울러 조선총독부는 도로와 항만 등의 시설 확충도 진행한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옛 주정공장 터에 있는 조각상. 뒤로는 '코텐스틸'을 외장재로 쓴 역사기념관이 보이는데,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미디어제주
옛 주정공장 터에 있는 조각상. 뒤로는 '코텐스틸'을 외장재로 쓴 역사기념관이 보이는데,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미디어제주

여기서 관심이 가는 건 4·3과 관련이 있는 ‘무수 알코올(주정) 제조’이다. ‘무수 알코올’ 제조를 위한 공장이 주정공장이었고, 4·3 당시 도민들은 주정공장에 갇혀 있다가 끌려가서 처형되는 비극을 맞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정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알코올이다. 제주도개발회사가 추진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수주정 20만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알코올을 만들어내는 원료는 바로 고구마였다. 고구마는 당시엔 ‘감저(甘藷)’로도 부르곤 했는데, 1930년대에 재배량이 급속도로 늘어난다. 1913년 제주도내 고구마 생산량은 185만관에서 1938년엔 2343만관으로 대폭 는다.

무수주정이 왜 필요했는지는 당시 일본어로 발간되던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목포신보>는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경성발=전시체제 하에서 연료 정책의 확립은 점점 중요성을 더해 액체연료로서 무수주정은 휘발유의 혼용품으로서 이것의 국내 증산은 매우 급하다. 총독부에서는 (중략) 제주도의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무수주정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방침을 결정했다.” (목포신보 1938년 1월 24일자)

고구마는 알코올을 만들어낼 원료였기에 제주에서 재배면적을 늘려야 했고, 그 알코올은 전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연료였음을 <목포신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공들였던 무수주정공장은 언제 완공됐을까. <동아일보>를 참고하면 1940년임을 알 수 있다.

“동척의 제주도에 있어서 무수주정제조공장은 올해 봄 실측을 마치고 건설에 착수했는데, 완성은 명년(明年) 하반기가 될 터이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15일자)

위 기사의 동척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봄부터 무수주정제조공장을 제주에 만들기 위해 공사를 진행했는데, 자재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음해(명년)로 완공이 미뤄졌다는 사실을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 가능하다.

식민수탈의 상징이던 주정공장은 아이러니하게도 1946년 8월 1일 도제 실시 이후 잠시나마 제주도민들을 도와주는 역할도 맡았다. ‘도제’는 전라남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있지만, 재정이 허약한 제주도는 당장 곤란한 문제를 당하게 된다. 바로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 송전 문제 등이었다.

옛 주정공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라신문 학생기자와 마을기자. ⓒ미디어제주
옛 주정공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라신문 학생기자와 마을기자. ⓒ미디어제주

도제 실시 이후 식량 사정이 좋지 않자 제주도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신한공사로 소유가 이전된 주정공장측과 교섭하면서 이 공장에 비축돼 있던 절간고구마를 식량대용으로 배급하는 궁여지책을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식량사정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아울러 주정공장의 450㎾ 자가발전기를 이용해 1947년 1월 17일부터 주간 송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의 시계는 제주도민들을 죽음으로 부르고 있었다. 4·3이 발발한 다음해부터 주정공장은 다른 운명을 지니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의 선무공작에 따라 입산자들이 하나 둘 귀순한다.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한라산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내려온 주민들은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남편은 오랜 피신 생활 끝에 잡혔어요. 그러나 남편에겐 잘못이 없고 또 사태가 어느 정도 완화된 때라 약간의 조사만 받고 석방됐습니다. 남편은 모슬포에서 보초까지 서며 무사히 살았지요. 그런데 6․25가 나자 예비검속돼 제주읍 주정공장까지 끌려갔다가 죽었습니다. 후에 누군가 사망일과 장소를 알려줬습니다. 1950년 7월 27일입니다. 진작에 잡혀 죽었으면 무덤이라도 있을텐데 토벌대가 바다에 빠뜨려 죽이니 그조차 없습니다.” (남편을 잃은 김중렬 할머니의 증언)

“고문 때문인지 뱃속에 있던 아기는 태어난지 1년만에 죽었어요. 그 사이 남편도 붙잡혀 읍내 주정공장에 갇혔습니다.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날 것이라고 했는데 6․25가 터지자 1950년 9월 22일 도두리로 끌려가 총살됐습니다. 그날은 수백 명이 집단학살됐다고 합니다.” (남편과 뱃속의 아이를 잃은 강도화 할머니의 증언)

살려준다고 했으나 기다린 건 죽음이었다. 주정공장에 갇힌 이들 가운데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 바다에 빠져 죽임을 당한 사람, 숱한 죽음의 이야기는 여전히 주정공장을 맴돈다.

주정공장 터. 여기엔 ‘제주 주정공장 옛터 역사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나,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역사기념관에 사용된 외장재료는 닫힌 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엔 역부족이다. 철을 부식시켜 강렬한 붉은색을 띠는 ‘코텐스틸’은 주정공장의 처참함만 더 상기된다.

주정공장이 1940년부터 가동되는데, 이를 정확하게 알리는 비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비문도 옛 주정공장 터를 지키고 있다. ⓒ미디어제주
주정공장이 1940년부터 가동되는데, 이를 정확하게 알리는 비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비문도 옛 주정공장 터를 지키고 있다. ⓒ미디어제주

주정공장 터에 가면 여러 형태의 비석을 만나게 된다. 잘 들여다보면 주정공장의 역사와 배치되는 문구도 있다. 어떤 비문은 1940년에 주정공장이 가동됐다고 나오지만, 어떤 비문은 1934년에 주정공장이 설립됐다고 기록돼 있다. 주정공장이 4·3을 기억하는 매우 중요한 시설임을 감안한다면, 좀 더 철저하게 고증을 한 상태에서 비문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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