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2-12-03 22:39 (토)
제주전투는 적은 군사로 왜구 물리친 ‘큰 승리’
제주전투는 적은 군사로 왜구 물리친 ‘큰 승리’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9.15 08: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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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따라잡기] <6> 제주대첩

70인 날랜 병사와 ‘치마돌격대’로 왜구 격퇴

제주목사를 중심으로 제주공동체가 이룬 승리

영암전투와 달리 조선 정부로부터 높은 평가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전남 영암전투에서 패한 왜구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거기엔 조선 군사들의 전략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승기를 잡았으면 끝까지 추격해서 후환을 없애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비록 왜적이 이미 패한 뒤에 쫓아가기는 했지만 또 때에 맞추어 추격하지 않아 왜적들이 무사하게 배에 오르게 했으니 통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9일 임술)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고 평가한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만들어내던 예문관의 사관이다. 사관은 왜 이처럼 평가했을까. 거기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 장수들이 있어서다. 조선 장수들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관은 “도망가며 숨기에 바빴다”며 을묘왜변에 임했던 조선 군사들의 상황을 묘사했다. 사관의 평가를 더 들어보자.

“왜구들이 감히 멋대로 돌격하게 된 것은 장사(將士)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움츠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구들이 공격하면 무너지고, 쫓아가면 도망다녔다. 군사의 위엄은 보여주지도 못하고 도망가며 숨기에 바빴다. 영암 승전은 날래고 용감한 군사 10여 명이 먼저 싸운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 영산진에 있던 조안국과 남평현에 있던 남치근이 김경석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다면 그 하찮은 도적들을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모든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김경석은 성 안에서 떨고만 있고 감히 머리를 내놓지 못했다. 남치근과 조안국은 모두 먼 지경에 군사를 주둔하고 나아가 치려고 하지 않았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9일 임술)

사관의 평가처럼 두려움에 떨던 조선 장수들의 전략적인 실패로 인해 왜구를 완전 섬멸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제대로 섬멸하지 못하자, 조선 조정은 물러선 왜구들이 다른 지역에 피해를 줄 것을 우려했다. 《조선왕조실록》 6월 1일자 기록을 보면 “다른 도로 옮겨가 난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다”며 왜구의 또다른 침입에 바짝 경계하고 있다.

조선 조정의 걱정은 기우가 아닌, 현실이 된다. 왜구들은 영암전투에서 패했지만 완도와 장흥을 공격한다. 완도 가리포가 함락되고, 장흥의 회령포도 함락된다. 왜구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남쪽 바다에 커다랗게 보이는 섬, 바로 제주도를 향하고 있었다.

왜구는 제주에 바짝 다가왔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6월 21일 제주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제주도 상륙을 준비했다. 이때 왜선 40여 척이 제주 앞바다에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전남을 공격할 때 70여 척(60여 척이라는 기록도 있음)에 비하면 줄긴 했으나, 적지 않은 병력이 제주도를 노리고 있었던 셈이다.

별도봉에서 바라본 화북 바닷가. 미디어제주
별도봉에서 바라본 화북 바닷가. 을묘왜변 때 왜구들이 화북을 통해 제주 땅을 밟는다. ⓒ미디어제주

제주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던 왜구는 며칠도 되지 않아 제주 본섬을 밟는다. 왜구는 화북포구를 거쳐 제주성을 포위한다. 그날은 6월 27일이다. 본섬에 상륙한 왜구는 1000명을 넘었다. 제주성은 사흘간 왜구들에게 에워싸였다. 1000명에 달하는 왜구들이 어느 지점에 진을 쳤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 제주성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지녔다. 제주성 서쪽은 병문천이 흐르고, 동쪽은 산지천이 흐르고 있었다. 자연스레 병문천과 산지천은 제주성을 보호하는 해자 역할을 했다. 때문에 동쪽의 화북을 거쳐 제주성에 다다른 왜구들이 병문천을 넘어서 서쪽에 주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제주성 동쪽과 남쪽 일대에 진을 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주성 동쪽과 남쪽은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아서 제주성을 관측하기에도 쉬운 지점이었다.

1000명에 달하는 왜구. 더구나 지대가 높은 동쪽과 남쪽에 주둔하며 공격할 기회만 엿보는 왜구. 대치가 길어지면 불리한 쪽은 왜구보다는 우리였다. 산지천은 적이 침입하면 방어선인 해자 역할을 하지만, 평상시엔 마실 물을 공급하는 수원이기도 했다. 제주성에 있는 이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가락쿳물’이 바로 산지천에 있었다. 제주성 포위가 길어지면 ‘가락쿳물’의 마실 물을 공급받지 못하는 위기상황을 맞게 된다.

제주성을 지키며 진두지휘한 인물은 무신 출신인 제주목사 김수문(? ~ 1568)이다. 김수문은 을묘왜변이 일어난 1555년 2월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김수문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비변사로부터 제주 상황을 전해 듣고,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왜구들의 잦은 침입으로, 제주도민들과 군사들은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을묘왜변이 일어나기 전해인 1554년, 1552년, 1550년 등 명종 대에 유독 제주를 탐하는 왜구들이 많았다. 1552년(명종 7)은 수백 명에 달하는 왜구들이 정의현 천미포로 상륙해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김수문은 3일간의 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준비한 건 날랜 군사와 ‘특공돌격대’였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물러서지 않자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투구를 쓴 왜장이 자신의 활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자 김몽근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우리 아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했고, 참획이 매우 많았습니다.”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7월 6일 무술)

김수문의 위와 같은 보고는 왜구들이 전라도를 침탈했을 때의 상황과 전혀 달랐다. 왜구는 전라도를 휘젓고 다녔지만, 제주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김수문의 보고에서 알게 된다. 김수문은 사흘을 기다리며 날랜 군사 70명을 모은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영암전투에서 ‘효용군(驍勇軍)’으로 불리던 날랜 군사를 10여 명 모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제주전투에서 부각되는 인물이 나온다. 모두 다섯이다.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김몽근 등이다. 이들 가운데 4명(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은 말 위에 올라서 전투를 벌였다. ‘특공돌격대’나 다름없던 그들을 향해 《조선왕조실록》은 ‘치마돌격(馳馬突擊)’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록이 말하듯 그들은 꿈적도 하지 않던 왜구들의 전선을 부순 공을 세웠다.

조선 조정에서 영암전투와 제주전투를 바라보는 시각은 확연히 달랐다. 명종은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글을 내려보내는데, “적은 숫자로 이렇게 대첩(大捷) 거둘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제주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닌, ‘대첩’임을 명종이 확인시키고 있다. 명종은 가슴에 쌓인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간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마음에 있던 근심 ‘10개 중 7~8개가 줄었다’(十減七八)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을묘왜변 때 제주에서 왜구를 물리친 전투를 임금이던 명종은 '큰 승리'라는 의미의 '대첩'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을묘왜변 때 제주에서 왜구를 물리친 전투를 임금이던 명종은 '큰 승리'라는 의미의 '대첩'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외로운 섬에 병력이 미약하고 원병도 때맞춰 이르지 못해 어떻게 방어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잠자리조차 편하지 못한 날이 여러 날이다. 그런데 승전 보고를 들으니 근심이 줄었다. 평소 경(卿)의 충의와 목숨을 나라에 바쳐 북채를 쥐고 죽으려는 정신이 아니었다면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하여 이와 같은 대첩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7월 7일 기해)

명종은 그해 8월, 왜구와 맞서 제주대첩을 이룬 제주도민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선로사(宣勞使)를 파견하면서 영암전투와 제주전투를 다시 비교한다. 명종에 눈에 비친 영암전투는 작은 승리인 ‘소첩(小捷)’에 지나지 않았다. 명종이 보기엔 전라도에서 일대의 전투는 승리가 아닌 ‘치욕’으로 비쳤다.

“영암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니, 어찌 설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가의 치욕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한심스럽다. 오직 경(김수문을 말함)은 사졸들과 한마음이 되어 방비에 힘썼음은 물론, 힘을 다하여 조치함으로써 적병을 물리쳤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8월 10일 임신)

기록을 하는 사관도 영암전투와 제주전투를 다르게 보고 있다. 사관은 영암전투는 잘 지켜낸 ‘수성(守城)’으로 기록하고 있고, 제주전투는 적을 물리쳤다는 뜻의 ‘파적(破敵)’이라고 쓰고 있다. 사관은 덧붙여 제주대첩의 요인으로 김수문의 지략은 물론, 적의 침입에도 흔들리지 않게 만든 ‘마음’을 꼽았다. 바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표현이다. 명종이 ‘사졸과 한마음’이라며 김수문을 격려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주대첩은 단순한 승리는 아니다. 제주공동체가 한마음으로 만든 ‘역사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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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 2022-09-20 08:31:20
재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