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3:02 (금)
“제주4.3 ‘완전한 해결’ 이루려면, 미국에 책임 물어야지요”
“제주4.3 ‘완전한 해결’ 이루려면, 미국에 책임 물어야지요”
  • 김은애 기자
  • 승인 2022.04.03 08: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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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주4.3 희생자 유족, 김성식 어르신
"4.3 진실 규명, 미국 책임 묻고 사과 받아야"
제주4.3 때 할아버지와 숙부, 숙항 등 가족 여럿을 잃은 김성식 씨.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지금 4.3은 반절 밖에 해결을 못 했습니다. 미국에 책임을 물어야지요. 4.3 당시에는 내가 어려서 몰랐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알겠어요. 4.3 때 우리나라가 미군정 하에 있었잖아요. 미국 판사에 의해 ‘죄인’으로 몰려 형무소에 갇힌 사람도 많은데... 그런데 왜 미국은 여태까지 사과 한 마디 안 하는 건가요? 미국에 책임을 묻고, 진실규명을 해야 합니다.”

4월 2일 오전 10시 30분, 제주4.3평화공원, 봉개동 일대 희생자 각명비 앞에서 만난 김성식 씨(80대)가 기자에게 전한 말이다.

김 씨는 제주4.3 때 할아버지와 숙부, 숙항 등 여러 가족을 잃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친척들이에요. 원래는 가족 다같이 오려고 했는데, 어린 아이가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가족 대표로 제가 왔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존함은 김병호. 여기 있네요. 그리고 여기, 승균이도 숙항 되시고, 승재, 승출도 숙항되고… 거의 친척들이 많습니다. 여기는.”

김성식 씨의 할아버지 김병호 씨 등 4.3희생자 이름이 적혀있는 각명비.
김성식 씨의 할아버지 김병호 씨 등 4.3희생자 이름이 적혀있는 각명비.

희생자 각명비에 새겨진 이름들을 어루만지던 김 씨. 그는 8살 되던 해, 할아버지를 잃었다. 제주 전역에서 일어난 여러 참상을, 그는 또렷이 기억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향이 바로 이(4.3평화공원) 밑에 명도암입니다. 그런데 4.3때 경찰이 밑으로 내려가라고 해가지고, 도련동 딸(김성식 씨의 고모) 집에 갔다고 해요. 거기서 하룻밤을 자려고요.”

김 씨의 할아버지는 “밑으로(해안가로) 내려가라”는 경찰의 말에 순응했다. 제주 중산간(명도암)에 위치한 집을 두고 내려가, 해안과 멀지 않은 도련동, 그의 딸 집으로 피신한 것이다.

경찰의 말을 들었건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날 할아버지는 총을 맞아 고인이 됐다.

“할아버지가 고모네로 피신한 그날 밤, 경찰이 고모네 집에 불을 질렀답니다. 할아버지는 불을 피해 집에서 뛰쳐나왔는데, 나오자 마자 총에 맞아 희생되셨고. 고모는 옆구리 쪽에 총을 맞았지만 총알이 관통해서 겨우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김 씨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희생되던 날, 도련동 일대는 "시퍼렇게 불에 탔다". 그리고 그곳에는 경찰들이 있었다.

“누가 불을 질렀는 지 몰라요. 어쨌거나 마을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는 다 초가집이었으니 금방 불에 타죠. 전체가 시퍼렇게 탔지. 그런데 경찰들이 딱 지키고 섰다가 불을 피하려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인 거예요. 무작정 사살한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비극은 계속됐다. 이번엔 그의 숙부가 행방불명이 됐다. 숙부는 형(김 씨의 아버지)을 만나러 모슬포로 떠난 후로 영영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우리 가족은 숙부가 행방불명 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4.3 때 죽임 당해 바다에 수장됐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죠. 그런데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 숙부는 그의 형,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모슬포로 가던 중 경찰 예비검속에 붙잡혀서 총살당했다 합니다. 시신은 못 찾았습니다. 무슨 산에 있는 굴에다가 묻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돼서요.”

김 씨의 숙부 김승국 씨(희생 당시 26세)는 ‘백조일손 희생자’로 추정된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 시절, 제주가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혔던 때의 일이다.

1950년 6월, 북한 공산군의 남침 소식에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무고한 제주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잡아들이게 된다. 이때 모슬포 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서만 347명이 붙잡혔는데, 이들 중 25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다.

“백조일손(百祖一孫). ‘조상이 다른 백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며 하나가 되었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모슬포 관내에서 예비검속으로 학살당한 후 암매장당한 희생자를 일컫는 말이죠. 유족들은 수 년 동안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는데요. 그러던 중 1956년 섯알오름에 묻힌 시신들이 발굴되었는데, 시신들이 흙탕물 속에 묻혀 뒤엉킨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숙부의 시신도 그곳에 있었을 겁니다.”

시신이 발굴되었지만, 끝내 가족들은 숙부의 유해를 품에 안지 못했다. 마구잡이로 암매장당한 백골들이 한데 뒤엉켜 있어 신원 식별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숙부가 모슬포에서 예비검속으로 붙잡힌 후, 돌아오지 못한 점을 보아 ‘백조일손 희생자에 포함되었겠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4월 2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가족을 찾은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어 김 씨는 박정희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1960년대, “백조일손에 대해선 입도 뻥긋 못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박정희 시대 때, 우리 가족은 아예 거기(시신이 발견된 섯알오름)에 접근을 못 했어요. ‘빨갱이 가족’이라고 불리면서 해코지 당할까 무서워서.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한 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부터예요.”

할아버지와 숙부의 사연을 털어놓던 김 씨. 조금 후, 그는 “내가 4.3에 대해 조금 아는 것이 있다”면서 1947년 3월 1일, ‘4.3의 발발’이라 불리는 3.1절 기념식 때 기억을 꺼냈다.

“내가 그때 할아버지 따라 시내 나갔다가, 관덕정 앞에 있었는데요. 3.1절 행사를 하고 군중들이 막 밀려나오는 걸 봤어요. 그리고 경찰들이 말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서, 막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기억이 납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그런 상황이 무서워서 한쪽으로 비켜 피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서 발포 사건이 있었고, 4.3의 발발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3년여 기간, 김 씨는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의 부모가 가파도로 일을 하러 잠시 떠난 상태에서 4.3이 발발하며, 부모님이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 기간동안 그는 성산 지역에서 지냈는데, 이때 성산 주민들이 죽임당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어느 날 성산 주민들을 전부 공설운동장(당시 성산리 운동장)에 나오라고 해서 저도 나갔는데. 조금 있으니까 트럭 세 대가 들어왔어요. 트럭에는 눈을 가린 젊은 사람들 30여명이 타고 있었는데요. 대부분 성산 주민이었습니다. 트럭에 실려온 사람들은 거기 동산 같은 데 일렬로 서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뭐가 뭔지 몰랐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중에 산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거기에 아방(아버지), 어멍(어머니), 아들 세 가족이 붙잡혀 나왔는데요. 성산 주민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섰는데, 아들이 먼저 총에 맞았어요. 그러면서 그의 어머니를 안고 쓰러졌죠. 그런데 그 앞에 총을 든 사람이 그 어머니를 더는 쏘지 않더군요. 아들이 어멍을 안고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눈앞에서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홀로 살아남은 이름 모를 그 여성. 김 씨에 따르면, 그 여성은 결국 정신에 이상이 생겨 평생을 아프게 살았다.

“참 희한한 세상 살았지. 나 뿐만이 아니고 그때는 전부, 전부 제주도는 완전히 그냥 영문도 모르고…”

4월 2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가족을 찾은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씨는 “이제라도 4.3을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 말하면서도, “미국에게 책임을 물어 진실 규명을 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또 강조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보다 대학 교수들, 이런 사람들이 좀 들고 일어서서 해야죠. 이제야 미군에서 (4.3 관련해) 관여했다는 근거·기록들이 좀 나온다고 하는데. 완전히 밝혀져야 해요. 왜 자기네(미군)가 한국에 주둔하면서, 한국에 참상을 만들었을까. 이 진실 규명을 해야 합니다. 이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반미’라고 매도를 해버리는데. 어떻게 보면, 참 우리나라 국민들이 말도 못 하고 있는 억울한 역사가 많습니다.”

그는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지금도 친일파 자손들이 많아요. 그냥 완전히, 일명 '보수'로 돌아서서 있는데. 이 문제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4.3에 대해 미국에 책임을 묻고 진상 규명을 하는 일,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친일파’ 청산 문제. 모두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목소리 내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김성식 어르신이 기자에게 말했다.

“4.3의 완전한 해결까지 갈 길이 멉니다. 젊은 사람들, 제주4.3의 진실 규명을 위해서 많이 힘써주세요.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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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2022-04-03 14:08:42
1905년 미국 테프트와 일본 가쓰라장관이 필리핀과 조선을 식민지 만들기에 적극협조한다는 약정을맺어
덕분에 일본식민지가된 조선
2차대전때 강건너 불구경하던 미국을 일본이 침략하자 마지못해 참전 원폭투하로 일본항복과 연합군에 독일도 항복한뒤
원폭투하로 유엔을 장악한 미국이 일본이 약탈한 엄청난 금괴를 받는대신
일본왕도 전범처리않고 독일처럼 갈라야할 일본대신 조선을 가르기로 일본과 비밀약정을 맺은뒤
조선을 강제분단시키자 김구선생님등 애국자와 독립군과 애국국민들이
미쏘군 철수주장하며 조국분단 반대하자 미국과 앞잡이 이승만이 처벌하려던 친일파를 구출후
군경 요직에 배치후 북한서 친일파를 처벌하자 남으로 도망온 서북청년단과 합세하여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것으로 6.25도 강제분단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