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6 17:57 (화)
“오빠는 나를 알지만 나는 모르니… 서럽게 울었다”
“오빠는 나를 알지만 나는 모르니… 서럽게 울었다”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2.03.31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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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 주최 21번째 증언본풀이 “공권력은 왜 지우려 했을까”
증언 나선 유족들 “오빠, 아버지 유해 찾고도 제대로 모시지 했다” 회한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이 31일 오후 2시부터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미디어제주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이 31일 오후 2시부터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시체는 바당에 뿌려부난 아무것도 어수다. 비석만 세완에 이신디 이제 쯤은 위령비라라도 세워지컬… 나, 이번 돈 나오는거 반갑지 안헙니다. 반갑지 안헌디 돈 나오민 우리 오빠 비석이라도 잘 행 허주 햄수다.” (함복순, 여, 80세)

“지금 제일 후회 해지는 게 화장을… 지금 같으면 우리가 화장을 안하지요. 어림없지요. 지금은 혼자라도 도청에 가서 데모하겠어요. 드러눕기라도 하고. 시대가 시대만큼이니까. 우리도 마을에 합동으로 해놔야 하는데 그때는 많이 망설였어요. 단합도 안됐고 해놓으면 누가 또 똥이나 뿌리지 않을까, 또 산폭도 새끼들이라고 하지 않을까 별 생각 다 나더라고요. 그때까지도 우리 유가족이 힘이 없었어요. 좋은 게 좋은 거다 해서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버렸지요.” (고관선, 남, 76세)

“가족묘가 전부 양지공원에 가는데, 다랑쉬굴에서 죽은 어른은 시체가 없으니 양지공원에 갈 것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버리니까…. 이제라도 다랑쉬굴 부근에 비석이라도 세워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공수, 남, 86세)

지난 1992년, 제주4.3 당시 희생된 유해 11구가 다랑쉬굴에서 발견돼 처음 세상에 알려진 후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희생자의 유족들은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된 가족들의 유해를 찾고도 끝내 유골조차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당시 공안기관의 주도로 유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둘러 장례 절차를 진행, 유골을 화장하고 바다에 뿌려버렸기 때문이다.

4.3 74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에서 증언에 나선 희생자 유족들은 하나같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회한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증언본풀이에서는 구좌읍 종달리 함복순씨가 4.3 당시 지붕에 숨어 지내던 오빠가 사라진 후 아버지가 세화지서에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한 채 돌아온 아버지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상도리 연두망에서 대살을 당한 어머니의 사연을 담담히 전했다.

구좌읍 한복순씨가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오빠의 화장된 유골을 바다에 흩뿌리던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눈물을 삼키고 있다. ⓒ미디어제주
구좌읍 한복순씨가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오빠의 화장된 유골을 바다에 흩뿌리던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눈물을 삼키고 있다. ⓒ미디어제주

30년 전 발견된 다랑쉬굴 유해 중에 오빠가 있다는 소식에 상복을 차려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 함씨는 다랑쉬굴 앞 칠성판에 놓인 유해들을 보면서 “오빠는 나를 알아볼텐데… 나는 누가 오빠인지 몰라”라고 되뇌이면서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함씨는 “화장장에 가서도 차례대로 (유해를) 하나씩 화장을 하는데 오래 걸리더라. 다 소각하고 나니 김녕 바닷가에 가서 아무 거라도 가져가서 뿌리면 같이 다 뿌려지는 거라고 해서 배를 타고 나가 뿌렸다. 오빠는 나를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르니 뿌리면서도 내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것 같다”고 30년 전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두 번째로 증언에 나선 고관선씨 사연도 비슷했다.

고씨는 다랑쉬굴 유해에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땅에 묻을 뼛가루 한 줌 남기지 못하고 뿌렸다고 한다. 뼛가루를 담았던 항아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구좌읍 공동묘지에 어머니와 같이 안장할 수 있었다.

고씨는 “아버지는 바다에 뿌렸지만 항아리는 어머니와 같이 있다”면서도 “아버지를 바다에 뿌릴 때도 유족들은 뼛가루 한 줌이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기관에서 통하지 않았다. 빨리빨리 처리하기만 했다. 아버지한테는 ‘우리가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이제는 ‘4.3’이라고 하면 육지에서도 알 만큼은 다 안다”면서 “이걸로 해서 다른 마을에서도 우리도 말해봐야겠다 하는 분위기가 나온 거다. 진짜 고맙다. 너무 고맙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족들의 증언에 앞서 4.3유족회 오임종 회장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의 비참한 죽음이 고스란히 남은 채 지금까지도 햇볕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4.3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면서 “당시 4.3을 지우려고 공권력이 했던 일들, 제주의 역사가 여기에 다 담겨 있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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