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마시는 자의 품격
마시는 자의 품격
  • 홍기확
  • 승인 2022.03.10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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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35>

세상은 크게 기체(氣體)와 액체(液體), 고체(固體)로 이루어져 있다. 음식에 한정하자면 기체는 냄새의 맛을, 액체는 마시는 맛을, 고체는 씹는 맛을 갖고 있다. 세 가지를 다 좋아한다면 적절한 오감을 느끼며 음식을 즐기는 것이지만, 지조가 없어 보인다.

나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세 가지 물질 중 유독 액체를 좋아한다. 이유는 품격이 있어서다. 기체는 품위가 없다. 킁킁거려야 한다. 고체도 품위가 없다. 필연적으로 쩝쩝대야 한다. 그러나 유독 액체는 후루룩하지 않는 한 품위를 지킬 수 있다. 즉,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품위가 있다. 기체를 우아하게 킁킁거리거나, 고체인 족발을 씹으며 스쳐가는 인연처럼 입술을 부드럽게 닦아도 품위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액체가 좋다. 내게 액체는 물약조차 아름다운 목 넘김이 예술인 기호식품이다. 게다가 액체를 넘기려면 고개를 꺾어야 한다. 마치 봉황이 짝을 찾기 위한 사자후를 외칠 때 꺾는 우아한 목놀림. 상상만 해도 계속 꺾고 싶다.

액체 중 단연코 제일의 식품은 술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식품 역시 술이다. 다른 액체는 많이 마셔야 그 진가를 알지만, 술은 한 잔만 마셔도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우주의 기운이 한 잔의 술에 담겨 있는 듯하다. 여기에 더해 마시자마자 감탄사가 자동으로 발산된다. 세상의 음식 중 본인의 의지와 달리 섭취와 동시에 자연스러운 찬사가 목구멍에서부터 나오게 하는 음식이 과연 몇 가지나 있을까?

아이에게 살아가면서 아빠한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해 보라고 했다. 글로써 답하겠다고 했다. 이 글을 쓴 이유다. 시키는 놈이나 대답하는 놈이나 이상하긴 용호상박, 백중지세, 난형난제, 막상막하지만, 아이는 무려 진지하게 평생을 궁금해했다는 질문을 던진다.

“아빠는 왜 술을 마셔?”

아빠의 대답은 이미 나왔지 않니? 세상의 물질 중 액체는 유독 품위가 있고, 그 중 술은 적은 양으로도 그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단다. 무엇보다 아빠는 술을 마실 때, 목을 꺾으며(빨리 꺾으면 기분이 더 좋음), 감탄사를 발할 때(크, 커, 캬, 쿠, 크허헉?) 심연의 목소리들이 해방되는 느낌이 되어 좋단다.

이렇게 품격 높은 아빠를 두었다니 네가 참 부럽구나!

자화자찬, 자승자박, 자가당착.

이렇게 아빠는 술을 마시는 이유를 말하며, 무려 7개의 사자성어를 나열했단다. 본인의 글도 쓰고, 아들의 공부도 융복합해서 신경 쓰는 착한 인문학적 아빠네.

네 아빠 누구니?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경영지도사(마케팅),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일상의 조각모음』, 2018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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