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을 지나 어디쯤
갈림길을 지나 어디쯤
  • 홍기확
  • 승인 2022.02.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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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34>

책을 에세이로만 3권을 썼다. 4권째 책을 출간할 만큼 분량의 글까지 쓰고 모아 두었다. 수필로만 4권의 책을 쓴다는 건 참 힘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보통 10~20권의 책을 읽고 몇 시간을 생각하고 정리한다. 물론 이런 좋은 순환도 운이 있어야 하는 법. 50권을 읽어도 통찰이 생기지 않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글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속상하지 않다. 투입(input)한 만큼 산출(output)이 적지 않아도, 과정(throughput)도 중요하다는 세상의 말처럼 투입, 과정, 산출의 모든 것이 글쓰기의 부분(part)이 되어 적어도 언젠가는 전체(system)를 이루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은 지 무려 1년 2개월 만에 글을 다시 쓴다. 글을 쓰지 않은, 아니 못 쓴 이유를 가족을 비롯한 몇몇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세 가지 적어보려 한다. 그리고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다시금 글을 쓰려 한다. 스스로의 출사표(出師表)이기도 하고, 변명이기도 하다.

글을 못 쓴 이유의 첫째, 가진 짐들이 늘어났다.

아담 그랜트의 책, 《오리지널스》에 이런 글귀가 있다.

“독창적인 사람이 되려면 작업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말이다.”

양과 질은 서로 상충관계(trade-off)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어떤 일을 더 잘하기를 원한다면, 즉 결과물의 질을 높이려면, 다른 일을 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아이디어 창출에서는 양(量)이 질(質)을 예측하는 가장 정확한 지표다.

글을 쓰지 못 했던 첫 번째 이유는 쓸 글이 너무 많아서다. 양(量)이 넘쳤다. 수많은 글감들에 대한 메모들, 읽었던 책들에서 얻은 영감, 사유의 고도화에 따른 생각의 나부낌, 새로운 학문을 접함에 얻은 통찰들. 이 많은 투입을 산출로 옮길 자신이 없었다. 글을 쓰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글을 쓰러 가기에는 짊어진 짐이 너무 많았다.

둘째, 내 글로써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정신적인 투쟁을 해야 하는지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다.

내가 쓴 첫 번째 책인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은 내가 죽고 나서 아이에게 줄 유언(遺言)들이었다면, 두 번째 책인 《느리게 걷는 사람》은 세상과 더불어 살며 느낀 점 오 할과 내 가치관을 아이를 비롯한 다른 이에게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오 할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책인 《일상의 조각모음》은 내 나이 40살을 맞이해서 인생의 파편들을 정리한 글들이었다.

하지만 네 번째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데서부터 일이 꼬였다. 글들은 쓰여 있는데 그 녀석들을 관통할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내 글의 가치와 방향에 대한 혼란으로, 글이 쓰이지 않기 시작했다.

셋째, 세상과 타협했다.

우만란쟝의 책, 《그럼에도 사는 게 쉽지 않을때》에 나처럼 두 번째 이유로 나약해진 인간은 위로하는 부분이 있다.

“의미 있는 언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누구를 이기고 싶어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졌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일은 정말 많지 않다. 승패에 대한 집착은 정서적 결여요, 성숙하지 못한 지성을 증명할 뿐이다.”

최근 몇 년간 가족을 비롯한 직장에서 논쟁, 언쟁, 다툼 등 어떤 의미의 대결을 최대한 피해 왔다. 그만큼 말수가 줄고, 공자(孔子)가 말하던 40살의 불혹(不惑, 미혹됨이 없다)의 경지를 벗어나 50세의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알다)처럼 세상에 안주(安住)하는 놀이를 해 왔다.

하지만 이제 글을 다시 써야 할 이유 세 가지가 생겼다. 앞의 이유에 대한 반론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첫째, 글을 쓸 것이 많아서 글을 못 썼다는 이유에 대한 반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가진 재산이 많아도 걱정이다’라는 것에 대한 반론과 같다. 성적이 좋고, 가진 재산이 많아서 하는 걱정은 10가지 정도겠지만, 성적이 안 좋고, 가진 재산이 없어 하는 걱정은 아마 훨씬 많아 100가지 정도 될 것이다.

없어서 하는 걱정보다, 있어서 하는 걱정이 적어도 조금은 더 여유롭거나, 나아가 행복한 걱정이자 불필요한 걱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 돈 있는 놈이 어떻게 돈을 쓸까, 글을 쓸 재주가 있는 놈이 뭘 쓸까 걱정을 하는 것 만큼 재수 없는 일이 없다. 재수 없는 것도 병이라면, 나는 이 병을 고치고 글을 쓰면 된다.

둘째, 글을 쓰는 이유와 독자에 대한 대상에 대한 고민에 대한 반론.

눈치를 봐서다. 세상이나 독자의 눈치를 봐서다. 내 글과 책의 가치를 ‘시장(市場)’의 평가에 맡기는 아주 지독한 인류의 집단 망상에 동참해서다. 그래서 나는 시장을 떠나기로 했다. 시장은 장을 보러 가는 곳이지, 물건을 팔러 가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기로 했다.

셋째, 세상과 타협했다는 말랑함에 대한 반론.

사실 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컸다. 사유의 놀이터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니 원래부터 논리적인 성격의 빈틈이 더욱더 줄어들었다. 자연스레 표현이 날카로워지고 문체가 바뀌었다. 예쁜 글을 쓰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변화를 인정하고, 세상과 헤어져야 할 때다. 과거의 나와 안녕하고, 새로운 나와 안녕해야 할 때다. 이제 껍질을 깨고, 예쁜 세상도 세상이고 어두운 세상도 세상이라 외칠 때다.

결국 네 번째 책의 제목은 《갈림길을 지나 어디쯤》으로 정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원체 힘든 일이다. 이 힘든 일을 하려면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를 1년 넘게 찾고, 이제 네 번째 책의 서문으로 이 글을 남기며, 다섯 번째 책에 담길 글을 시작한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경영지도사(마케팅),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일상의 조각모음』, 2018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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