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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시이면서도 차분하고 안정감을 준다
큰 도시이면서도 차분하고 안정감을 준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1.12.08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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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지역을 말하다] <9> 대전과 건축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은 건축이라는 틀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건축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시대를 만들어낸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은 그 시대의 결정(結晶)이다고 외친 건 건축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 시대의 결정을 탐구하려고 그동안 숱한 건축 기획을 하며, 건축가들을 만나곤 했다. 기억 나는 건축가들과의 만남을 들라면 <나는 제주건축가다>를 꼽겠다. <나는 제주건축가다>는 제주의 젊은 건축인들이 이야기하는 제주를 담았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제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의 목소리를 담았으나, 다른 지역 건축가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침 기회가 왔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주최하고, 한국예총 제주도연합회(회장 김선영)와 한국건축가협회 제주건축가회(회장 문석준)가 공동 주관하는 ‘2021 6대 광역시+제주 건축교류전1211일부터 16까지 제주에서 열린다. 제주도가 아닌, 6대 광역시의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 지역의 특성을 살펴보고, 각 지역의 건축가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편집자 주]

 

대전 성장은 내부보다 외부 요인 영향이 커

옛 엑스포 남문광장은 시민들의 ‘진짜 공간’

원도심과 새로운 도심은 나름대로 색깔 지녀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잘 있거라 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대전발 영시 오십 분/세상은 잠이 들어/고요한 이 밤/나만이 소리치며/울 줄이야 아 아/붙잡아도 뿌리치는/목포행 완행열차”

<1980년에 발매된 조용필 1집 ‘대전블루스’ 가사>

이 노래 첫 소절인 “잘~ 있거라”를 고음으로 처리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이는 아직 보지 못했다. 1980년대는 노래방도 없었고, ‘생’으로 노래를 불렀기에 진정한 챔피언이 누구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대전은 가보지 못한 도시였고, 단지 가사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도시였다. 대전과의 첫 만남은 그랬고, 직접 밟은 건 1993년 대전 엑스포 때였다.

대전역. 이동의 공간이다. 미디어제주
대전역. 이동의 공간이다. ⓒ미디어제주

대전은 다른 도시와 달리 읍성을 둔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다른 도시처럼 읍성 시절의 화려함 뒤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도심’이라는 기억을 만드는 패턴과는 달랐다. 대전은 아주 작은 외진 마을이었고, 어쩌면 일제강점기로 태어난 도시일 수 있다. 대전은 경부선 철도를 맞아들이고, 호남선을 통과시켜주면서 교통의 요지가 된다. 경부선은 1905년, 호남선은 1910년 대전을 관통한다. 도시는 커졌고, 1932년에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긴다. 조선인 토착세력이 많지 않던 대전은 일본인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대전의 성장은 내부의 자발적인 의지보다는 외부 요인이 컸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고, 현대에 와서도 그런 경향을 드러낸다. 1972년부터 진행된 대덕연구단지 조성, 1980년대 3군본부의 계룡대 이전, 1989년 직할시 승격, 1990년대 대전 엑스포 개최와 정부청사 이전 등이 있다.

대전의 토착 인구는 지금도 많지 않다. 30% 정도라고 한다. 다른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와는 다른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뤄진 이런 모습은 도시를 질적으로 변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자신들의 텃밭을 내준 면도 없지 않다.

대전을 흐르는 내는 모두 3개이다. 금강에서 갈라진 갑천이 대전의 남서 방향으로 흐르고, 갑천에서 갈라진 유등천이 도심을 관통한다. 다시 유등천에서 대전천이 갈라져 나와 원도심 일대를 흐른다. 현재 대전광역시의 중심을 흐르는 유등천은 서울을 동서로 가르는 한강을 닮았다. 한강이 강남과 강북을 가르듯, 유등천도 동서의 모습을 달리 보여준다. 유등천의 동쪽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도심의 풍경이 있고, 유등천 서쪽은 정부대전청사를 비롯, 전혀 다른 색깔을 지녔다. 기자를 태운 택시 기사는 “이 내(유등천)를 건너면 저쪽(서쪽)은 서울의 강남이다”고 말했다.

도시는 살아 움직이며 만들어간다. 도시는 기억을 품고, 새로운 기억을 창조한다. 대전 원도심에 있던 충남도청은 홍성으로 이전을 하면서 대전근현대사 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나서 사람들을 만난다. 새로운 기억도 물론 있다. 1993년 엑스포 개최 이후 이들 부지 활용에 대한 논의가 급부상했다. 엑스포 옛 남문광장의 변화는 눈여겨볼 키워드를 안겨준다.

남문광장은 엑스포시민광장이라는 이름을 달았고, 주변은 한밭수목원으로 조성돼 사람들의 즐거운 쉼터로 활용된다. 시민광장 서쪽에 대전예술의전당, 대전시립미술관, 이응노미술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천연기념물센터, 곤충생태관,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열대식물원, 평송청소년문화센터 등이 있다. 걸어서 오는 시민들도 있고, 차를 타고 오는 시민들은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수목원에서 쉬거나 여러 문화를 골라서 즐기면 그만이다.

나무 뒤로 엑스포시민광장 큐브동이 보인다. 미디어제주
나무 뒤로 엑스포시민광장 큐브동이 보인다. ⓒ미디어제주
거대한 움직이는 그늘막인 무빙쉘터이다. 시민들엑 나눠줄 여러 공간을 만들어낸다. 미디어제주
거대한 움직이는 그늘막인 무빙쉘터이다.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여러 공간을 만들어낸다. ⓒ미디어제주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공간으로 ‘엑스포시민광장 큐브동’(설계 김억중)이 있다. 큐브동은 옛 남문광장 공간 재창조사업을 통해 지난 2011년 태어났다. 미디어큐브동 1개동과 움직이는 그늘막인 ‘무빙쉘터’ 3개동이 있다. 무빙쉘터는 시민 1000명이 한꺼번에 그늘에서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공간은 공공의 의미를 잘 살려낼 때 시민들의 기억에 꽂힌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는 미국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자신의 저서 <공간과 장소>에서 이런 말을 했다.

“눈에 잘 띄는 상징물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그것들 덕분에 그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와 충성도가 높아집니다.”

큐브동에 대한 기억은 대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게 된다. 한밭수목원을 거니는 기억도 온전히 보존된다. 예술의전당도 들르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기억도 흔들림은 없다. 특히 개개의 공간에 대한 충성심은 어린 시절에 체득된다.

간혹 기억은 사라진다. 1970년대 대전의 부흥을 전했던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는 원도심 재창조 일환으로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다.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를 다녔던 이들에겐 기억의 소멸이었고, 대신 철거 이후 대전천은 살아났으며 도심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전은 늘 차분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고, 여전히 보여주려 한다. 도시 주변은 큰 재난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전 한촌(寒村)이었을 때도 그랬고, 현대엔 큰 도시로 성장했음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이 도시에 있는 건축물은 안정감을 준다. 튀거나 하지 않는다. 스카이라인도 일률적이다. 높으면 눈에 띄는 곳이 대전이다. 그래서인지 부산을 제외한 비수도권에서 가장 높다는 비주거용 건축물인 ‘대전사이언스콤플렉스’는 단박에 눈에 들어온다. 대전사이언스콤플렉스는 올해 8월에 선을 보였는데 이런 건축물이 계속 들어설지, 아니면 지금처럼 차분한 도시의 풍경을 그대로 가져갈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직도 대전은 조용하다. 우암 송시열이 제자를 가르쳤다는 ‘남간정사’의 정서를 대전은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높은 곳을 덜 바라보고, 그저 소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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