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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근, 현대 주거건축의 공간사 시론 - 7
제주 근, 현대 주거건축의 공간사 시론 - 7
  • 미디어제주
  • 승인 2021.07.0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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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1년 6월호] 스페셜 시리즈_근대주거건축의 전개 ③
김석윤(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 제17대 회장/건축사사무소 김건축)

사례6. 탑동로15길 48의 강씨주택

이 집은 1957년에 지어졌다. 주벽은 제주돌로 쌓고 모임형의 목구조 지붕에 시멘트제의 일식 기와를 이었다. 돌쌓기는 일본식 토목공사에 널리 쓰이던 견치쌓기 공법으로 균일한 크기로 채석한 돌을 시멘트 몰탈을 뒷채움하면서 면바르게 쌓는다. 이 공법은 일제시대 군사시설에서 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시멘트벽돌이 보급되기 전까지, 건축재료는 귀하고 인건비가 저렴했던 시절 학교건축 등 공공시설에도 널리 쓰여온 공법이다.

평면형태는 단순한 구형(矩形)에 전면 한 부분이 돌출한 ‘ㄱ’자형인데 이 부분이 응접실이다. 중앙의 대청 전면 전부를 현관으로 탈화 공간으로 쓰이고 여기에서 바로 응접실에 출입한다. 이외의 나머지 부분은 대청의 양편에 방이 있는 일반주거의 평면과 같다.

탑동로15길 48 강씨주택.
탑동로15길 48 강씨주택.

전통에서 벗어나 일본식을 본보기로 해서 지은 집들은 경험이 축적되면서 차차 전래의 생활방식과 신재료 공법에 맞게 수정되며 정착되어 갔다. 이 집에서 주목할 만한 풍토적 수정 현상을 보여주는 부분은 비와 바람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을 위한 처마부분의 상세이겠다. 일식집의 처마는 서까래가 노출되거나 바람막이 널판이 노출되어서 격렬한 비바람에는 취약하고 처마 끝에 설치하는 처마 홈통은 폭우에 넘치기 일쑤이고 강풍에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콘크리트 처마 끝에 지붕벽으로 기와지붕의 마구리 단부를 감싸서 처마의 노출을 막고 격렬한 바람과 빗물처리를 모두 해결하고 있다.

조적구조의 건물은 지붕의 하중을 벽에 안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상부에 철근콘크리트로 테두리 보를 두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 테두리보에 일체된 콘크리트 채양을 내밀고 선단에 벽을 쌓아서 처마 끝의 노출을 막으면서 빗물처리를 위한 넉넉한 유수단면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파라펫이라 불렸던 이 처마끝 상세는 이후 철근콘크리트조 평지붕이 보편화되는 시기까지 목조지붕 주택에 빠르게 보급되어 기후 특색에 알맞은 내풍성 조형요소가 되었다.

더구나 이 지붕벽은 전통 초가지붕이 가진 중량감을 유감할 수 있어 서민들이 쉽게 선호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동양계 건축에서는 모두 지붕의 상징을 존중하는 관념이 있다. 더러는 이 지붕벽면에 미장공들이 문양을 넣어 민화풍으로 장식하는 사례가 있음도 유의미하다. 모임지붕과 지붕벽이 이 시대 제주 풍토건축의 대표적 요소가 될 법하다.

 

사례 7.등록문화재 113호 제주 이승만 별장

이승만 대통령이 미8군사령관과 한미재단이사장 제임스 밴프리트 장군의 지원으로 건설한 구좌읍 송당리의 옛 국립제주목장이 넓이 900만 평에 축사 7동, 창고 1동, 특호관사 1동, 을호관사 3동 시설로 1957년 10월에 1차 시설준공으로 개장했다. 자가 발전과 급수시설을 완비한 현대적 수준의 이 국가목장은 전쟁 직후인 당시 우리나라의 생산력으로 실현해 내기에 쉽지 않은 대사업이었다. 그 내력이 김태일 교수의 책 <제주근대건축산책>에 상세하다. 정권이 바뀌고 민간으로 소유가 바뀌는 과정 속에 남은 1차 준공 때의 특호관사가 국가등록문화재 113호 제주이승만 별장이다.

이 건축은 국가원수 관련 시설로서의 의미 뿐만 아니고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순 서구 입식주거형식과 석조건축의 정형을 최초로 전래했다는 제주 지역문화사적 가치를 지녔다. 제주도에는 건축재료로 쓸만한 돌자원이 많아 예부터 이를 흔하게 활용하여왔지만, 학술적 구분으로 제주도 전통주택은 목구조건축에 속한다. 제주주거의 돌벽은 주구조재가 아니고 풍우와 방화에 대처하기 위한 가림벽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서 이 별장은 제주도 최초의 석구조주택으로의 가치를 강조할 만하다. 육지 대도시들이 조선 후기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서구주택의 경험에 비하여 시기 차이가 많이 난다. 이 집에 쓰인 돌쌓기의 정확한 건축용어는 ‘다듬돌찰쌓기 치장줄눈마감’이다. 찰쌓기는 비교적 균일 크기로 채석한 마름돌을 형틀이나 벽돌벽에 대고 콘크리트를 뒷채움하며 쌓으므로 구조적으로 안정되고 오목줄눈 치장은 돌의 소재미를 드러내기에 유리한 고급공법이다. 제주 현무암이 이 집의 주재이지만 부분적으로 육지돌인 화강암과 편마암이 섞여 있기도 하고 쌓기공법이 출입구측 두 면은 바른층쌓기이고 나머지는 허튼층 쌓기가 반이다. 또 독립된 두 개의 연돌은 깬돌을 생긴 대로 맞춤쌓아서 마치 돌쌓기의 다양한 공법을 견본으로 보여주는 듯 하였다.

이승만 별장.
이승만 별장.

문화재청의 기록정보에 의하면 평면이 폭 7.2m×길이 21.6m로 1:3의 비교적 세장한 비례를 가진 단순장방형이다. 진입구 포치에서 주동선과 서비스 동선이 나뉘고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영역을 구분하고 거실, 식당 전면에 파고라 시설의 노대를 두었고 주침실에 접해 있는 수세식 화장실에 채광과 환기계획에 중점을 둔 설계와 창호의 개폐방식하고 창살나누기가 두루 새롭다. 10:1 밖에 안되는 뜬 기울기의 목조지붕은 단순 평보를 걸친 원초형 구법이다. 지붕마감은 아스팔트 싱글을 덮고 선단 부분은 동판 후레싱으로 마무리한 것은 강풍다우의 제주 기후 특성을 간과한 선택으로 보인다. 대략 미국식 실용주의 건축 성향이 읽혀지나 쌍희자 장식과 테라스 언저리의 곡두 문양은 장인들의 질박한 심성의 발로인듯하다. 미국에서 생활을 경험했던 우리 국민들은 입식주거에서 신발을 신고 침실까지 드나드는 불결함과 난방설비가 온돌하고 다르게 머리 부분과 상체를 따듯하게 하는 불쾌감을 얘기한다. 문화재청의 원형기록정보시스템에 이 집의 난방설비는 어떠했는지에 관심이 없다.

 

사례 8.삼도2동의 공영주택

1950년대 정부의 공공 주택사업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주택을 복구하기 위하여 대량 건설, 공급이 과제였다면 제주에서는 갑자기 몰려온 피난민들이 주거문제 해결과 4·3 피해 복구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때 정부는 일제시대의 조선주택영단이 주택공급을 위한 기술적 기반조직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이 기관을 대한주택영단으로 명칭만 바꾸어 주택 공급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조선주택영단은 일제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1년에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기관이다. 주택영단 외에도 한국산업은행과 외국원조 기관들이 공공 주택 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국제연합 한국재건단은 5,500호의 주택을 전국 각 도에 건설하였다. 대량 공급을 목표로 하는 공영주택에는 목구조 방식보다는 조적조가 적합하고 지붕에는 간이식 트러스 구조를 새롭게 채용하였다. 미군공병대에서 군막사에 주로 활용하는 콘크리트 블록의 조적식 벽체와 경량트러스는 미송 2˝×4˝, 2˝×6˝ 규격의 목재로 제작이 간편하고 목재와 부속재료가 적게 소요되어 경제성이 높다. 일본집에서 배워서 사용해오던 지금까지 왕대공 트러스나 대들보식 목가구조의 지붕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내부공간에 비해 더 넓은 공간을 쉬운 공법으로 저렴하게 구축해 낼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최초 공영주택사업이 이루어진 것은 1957년에 옛 읍성의 남문 밖 이도1동과 삼도동 지역에 20여동씩 단지형식으로 지어졌다. 주택자금을 20년 장기융자해주고 주재료인 목재와 시멘트는 군수품과 동일한 미국 원조자재가 지원되었다. 지금 삼도동 지역에 그 흔적이 몇 동 남아있는데, 지붕재료가 원래 일식기와에서 강판으로 교체되어 외양이 바뀌어 있지만 간이형 목조트러스를 사용했던 박공지붕의 원형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또 제주시 봉개동을 비롯한 몇 중산간 마을에 4·3복구 주택사업이 시행되었다. 이 복구형 주택은 방, 마루, 부엌 기본 3칸 소규모 평면을 2호 연립으로 설계해서 경제성을 기대하고 있다. 이 주택도 지붕은 2×4 규격의 미송 간이 트러스를 올린 박공형 지붕인데 벽체를 제주돌로 쌓은 재료와 인력을 수혜자가 부담했던 자조형 주택이다. 원조자재인 시멘트가 지원되었으나 양이 충분하지 못해서 사춤이나 줄눈용 몰탈로 활용하는 경제성 위주 시공법이었다. 이런 지역 자재의 활용 단계를 거치고 난 후 시멘트 생산이 국산화되고 나서 비로소 시멘트 벽돌이나 블록의 조적구조가 보편화 되어 갔다. 공영주택들은 구조와 공법에 서구식 조적공법의 보급뿐만 아니고 설계계획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평면을 보면 마루방을 거실로 해서 주택의 생활공간을 합리적으로 활용하려 노력했고, 전면에 침실 3개가 배치되고 후면에는 변소, 욕실, 부엌을 배치하고 있다. 전통 민가와 비교해 보면 전, 후면에 농촌 주택형의 툇마루가 없어지고, 이동은 내부에서 실간의 통행이 이루어지는 등 전통공간 조직의 느슨하고 여유로움을 망실해 버리고 있다.

협소하지만, 별도의 현관을 두고, 변소, 욕실까지 내부에 두었다. 그리고 부엌, 욕실, 변소를 하나의 서비스 영역으로 집중시켜 계획하고 근대주거의 합리적인 요소를 주저없이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간구조가 선택된 이유는 전통적인 의례행위가 이루어지는 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방을 두어 주공간을 형성하고 후면부에는 새로워진 설비요소를 배분하는 방법으로 설비를 집중시키는 근대화된 계획기법을 활용해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제거식화장실의 악취와 청결 유지의 불편은 도시 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도시 형편에 맞지 않았다. 또한 박공지붕은 전통적인 주거관념과는 거리가 있는 경제성 위주의 임시 선택, 즉 값싼 집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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