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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성이란 지금을 사는 사람들 요구를 반영하는 것”
“지역성이란 지금을 사는 사람들 요구를 반영하는 것”
  • 김형훈
  • 승인 2021.04.01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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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건축가다] <20> 건축가 정익수

 

기획 나는 제주건축가다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를 만나, 건축에 대한 이야기와 제주라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기획은 모두 3개로 나눠진다. 건축가가 꼽은 땅에 대한 이야기, 건축가와 나누는 대담, 자신을 이끌어 준 건축 관련 책을 담는다. 대담은 문답식으로 싣는다.

이번에 소개할 건축가는 건축사사무소 사이 정익수 대표이다. 그는 잠깐 서울에서 생활한 것 외에는 고향 제주를 지키고 있다. 그는 제주도 땅 가운데 어느 하나를 콕 집지 않았다. 바다가 그의 땅이고, 오름이 그의 땅이다. 철마다 먹거리가 있으면 오가는 그곳이 바로 그가 말하는 땅이다. 그가 소개한 책은 에이리가족과 네임리스건축이 함께 쓴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이다.

 

 

# ‘제주’라는 곳

격자형의 도시개발은 필연적으로 기존마을의 파괴를 불렀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도시개발을 원한 우리였고, ‘삼춘’으로 통하는 마을공동체의 파괴가 뒤따랐다. 한참 돌아보고서야 옛 추억이 어린 공동체가 그리워졌으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을공동체의 근원이던 올레는 개발로 끊어지고 사라지고 난 뒤였다. 현대 도시개발은 아직까지도 공간의 멋이나 운치보다는 효율성을 추구한다. 또한 거기엔 거대함이 뒤따르면서 작고 아름다운 것들의 퇴보를 담보로 하고 있다.  -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중에서

누구나 성공을 바라는 세상이다. 누구나 돈이 많아지길 바라는 세상이다. 돈만 많으면 세상 모든 걸 가진, 그야말로 행복이 찾아오리라 사람들은 믿는다. 그 믿음은 대게, 상상이다. 돈이 곧 행복은 아니기에 그렇다. 돈에 매몰된 우리, 부동산에 눈독을 들이는 우리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 역시 그런 흐름에 동행을 하고 있다.

사람의 삶의 본질은 돈에서 찾을 수 없다.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성장 일변도의 세상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날은 분명 찾아온다.

자연이 지배하는 곳, 제주. 미디어제주
자연이 지배하는 곳, 제주. ⓒ미디어제주

제주도는 자연이 지배하는 땅이다. 차츰 그 지배력을 상실해서 아쉽다. 자연은 점점 패자가 되고 있다. 거꾸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며 승자로 전환되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 최종 승리자가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E.F. 슈마허의 말을 들어볼까.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자본은 훨씬 더 크지만, 우리는 그것을 자본으로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렇게 훨씬 큰 부분이 놀라운 속도로 고갈되고 있는데, 생산 문제가 풀렸다고 믿고 그런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해하는 오류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해주는 자본을 우리는 외면하곤 한다. 자연을 무조건 써야 하는 ‘소비’로 바라봐서 그렇다. 제주도라는 땅. 살아 있는 자연의 표상이다. 그게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 슈마허의 말처럼 제주에 사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된다.

눈을 뜨면 바다를 본다. 제주사람의 일상이다. 글을 쓰는 기자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하루는 너무 짙은 파랑이다. 심연을 알지 못할, 지구 속 무한대로 끌려 들어갈 것 같은 짙은 파랑에 눈을 뺏기곤 한다. 그 파랑은 하늘과 바다를 확실하게 가른다. 가슴이 “확~” 하고 트이는 시점이다. 몸을 돌려 또 다른 방향을 주시하면 거기엔 한라산이 머문다. 손에 닿을 듯 다가오기도, 너무 멀어서 다가가기 힘든 날도 있다. 우리를 돌봐주는 어머니가 거기에 있다.

 

 

[대담] 건축가 정익수를 만나다

 

제주시 출신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주시에서도 중심으로 불리던 성안에 살았다. 성안에서도 탑동 인근에 살던 기억이 또렷하다고 그는 말한다. 서귀포 친구들 사이에서는 시에따이(시에 사는 아이)’로 불렸다. 요즘은 제주 모든 곳이 시() 지역이지만, 예전엔 그런 이름을 얻는 지역은 한정돼 있었다.

 

네임리스건축이 설계한 아홉칸집이야기를 담은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현상설계를 함께했던 이로부터 그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책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를 쉽게 풀어냈다. 읽기도 편하다.

 

책을 보면 건축주 부부 중에 남자가 제주 출신이더라. 제주 출신이 있어서 이 책을 추천한 줄 알았다.(책에 등장하는 건축주 이상욱씨가 제주 출신이다.) 제주사람 중에 이런 건축주가 있을까 싶다. ‘아홉칸집은 덜 된 건축인데, 그런 건축물을 원하는 건축주들이 솔직히 많지 않다. 책을 읽어보면 마감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지? 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 분들이 이렇게 했을까.

책에 나오는 건축주가 좀 특이한 면이 없지 않다. 건축주로부터 의뢰가 들어오면 웬만하면 맞추려고 하며, 건축주가 나랑 맞지 않는다면 건축주가 떠나게 돼 있다. 맞으면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건축주가 이것저것 요구한다는 것인가.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한다. 설계도 도중에 바꾸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 ‘아홉칸집을 보면 9칸 가운데 천창을 뒀다. 집은 경기도 광주 산골에 있는데, 겨울철엔 춥다. 따뜻한 곳이면 모르겠는데, 추운 곳이어서 결로 현상이 심할텐데.

이 집을 보면 노출콘크리트이면서도 비싸다. 중단열로 돼 있다. 중단열은 콘크리트와 콘크리트 사이에 단열을 하는 걸 말하는데, 제주에서 그걸 하고 싶어도 공사비가 너무 들어서 못한다. 인건비가 굉장히 많이 든다.

 

책을 보니, 시공도 입찰을 했더라. 그나저나 천창은 100% 물이 떨어질텐데, 만일 건축주가 그걸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건가.

단점에 대한 분명한 이야기를 해준다. 단점을 이야기하고, 하고 싶다면 감수를 하라고 한다. 원하면 해주는 편이다.

만일 내 집이 있다면 천장을 하고 싶긴 하다. 이 집은 평면이 특이하고, 천창이 없으면 안되는 평면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이 너무 어둡게 된다.

 

콘크리트와 콘트리트 사이에 단열을 집어넣는 중단열은 실제로 시공하지 쉽지 않을 것 같다.

맞다. 쉽지 않다. 그걸 원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사비를 꺼내면 다들 안한다고 하더라.

 

노출 콘크리트를 제주에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제주도 중에서도 습도가 높은 지역에 노출 콘크리트를 쓴 곳은 외벽에 이끼가 많이 끼더라.

아홉칸집은 나무가 없는 자리에 있어서 괜찮은데, 나무 가까이 있게 되면 이끼가 끼게 된다.

 

땅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다. 혹시 제주도라는 땅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게 있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공간이 있다면.

땅이라는 건 너무 포괄적이다. 설계를 할 때 우리는 땅을 본다. 시내권이라면 땅의 조건은 주변 건물의 영향을 받게 된다. 땅은 늘 바뀌는 것이다.

어릴 때는 제주시 탑동 근처에서 살았다. ‘탑동에서 보말 까먹는 소리하고 앉아 있다는 말도 있었다. 그때 탑동에서 놀곤 할 때, 부모님 얘기로는 우리가 살던 곳도 매립된 곳이라고 들었다. 매립이 되면서 사라진 풍경도 있다. 탑동은 여름만 되면 놀던 곳이고 수영터였다.

제주도라는 땅을 이야기한다면 콕 집기는 힘들다. 풍경이 좋은 곳을 보고 오름도 둘러본다. 요즘은 오름에 오르면 풍경에 매료된다. 벚꽃이 피면 벚꽃길을 걷고, 초여름이 되면 자리물회를 먹으러 무조건 서귀포로 향한다.

건축가 정익수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바로 지역성이라고 말한다. 미디어제주
건축가 정익수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바로 지역성이라고 말한다. ⓒ미디어제주

낭만파 같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다. 사실 우리 업무 자체가 70%에서 80%는 사무실에서 해야 한다. 답답함도 털어내고, 기분전환을 하러 밖으로 나선다.

 

일상을 벗어던지는?

가끔이다. 요즘은 삼양 바닷길도 걷기에 좋다. 가을은 아무 곳이나 좋다. 언젠가는 물영아리오름을 보고, 목초지에서 한참 앉아 쳐다보기도 했다. 멍 때리는 걸 좋아했다. 요즘은 멍 때릴 시간이 없다.

땅을 보다 보면 어떤 지구인지, 장사가 많이 되는 곳인지, 주변 집의 창은 어떤지, 이런 것만 보다 보니 전반적인 땅을 생각해보지 못하고 지나치곤 한다.

 

건축가 누구에게나 묻는 질문이다. 지역성이란 무엇이라고 보나.

진짜 어려운 질문이다. 어떤 것을 고정시켜, 하나만을 하려는 스타일은 아니다. 제주에서 태어나서 나간 적이 없다. 서울에서 잠깐 살기는 했으나 너무 빡빡하더라. 천천히 움직이며 살다가 지하철을 타려고 뛰어다니는 나를 봤다. 천천히 가도 되는데.

제주도에서 만나는 건축주도 대부분 제주도 사람들이다. 그분들이 요구하는 것은 제주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 그들이 많이 본 집을 요구한다. 지금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반영하는 게 지역성이 아닐까. 굳이 내가 앞서서 이건 이거다고 강요하는 건 그렇다.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

그렇다. 시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 주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 아파트 평면이 유행하는데, 그 시대 평면이라는 인식이 쌓이면 그게 유행이 된다. 이게 곧 시대 건축이라고 정의를 내린다고 본다.

 

단독주택을 많이 해봤는가.

대부분은 근린생활시설에 다가구가 섞인 건축물이다. 임대형이나 장사형 건축물이다. 설계는 많이 했는데 단독주택은 몇 개 되질 않더라. 단독을 하더라도 평면은 다들 아파트의 평면을 원한다.

 

왜 이 시대 사람들은 아파트 평면을 요구할까.

아파트에 살아보면 편리하다. 편리를 원해서이다.

 

편리라는 게 청소의 편리일까, 아니면 공간의 효율성일까.

다 맞다. 그런 평면은 공간이 넓어진다. 쓸데없는 빈 공간이 많이 나오지 않고, 대부분은 안방과 애들 방 사이에 있는 공용공간을 중심으로 나뉜다.

 

텔레비전을 보면 부동산 소개, 건축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꽤 된다. 방송사마다 느낌은 조금씩 다른데, 건축물과 건축주 관계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상업적 용도로 소개되는 곳도 있다.

다른 건축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진 않는다. 인상 깊게 본 게 있다면 땅에 묻힌 집이었다. 벙커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놀라웠다. 건축주가 누구인가에 따라 건축이 달라지는 경우이다.

 

-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를 읽다 보면 공사를 할수록 단가가 높아졌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집을 짓다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비용이 늘곤 한다. 건축주와 갈등도 생기곤 할텐데.

그런 경우는 드물다. 재료는 뭘로 쓸지, 돈은 있는지 물어본다. 비싸면 비싸다고 말한다.

 

대화를 하면서 안되면 안된다?

되는 건 된다고 한다. 원하는 걸 하라고.

 

제주도가 어떤 가치를 지닌 곳이라고 보면 될까.

있으면 편한 곳이다. 제주도가 좋다.

 

끌리는 건축가는 누구였나.

학생 때 루이스 칸이랑 헤르만 헤르츠버거에 끌렸다. 루이스 칸의 <침묵과 빛>. 제목이 멋졌고, 눈에 확 끌리게 한다. 단어도 끌리게 만들고 건축물도 그렇다. 헤르츠버거를 보면서 이렇게 복잡하게 집을 짓는구나 생각했다. (헤르츠버거의 <건축수업>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요즘 건축을 보면 제주 건축과 육지 건축의 차이점이 있나.

육지에서 봤을 때 제주건축을 괜찮다고 한다더라.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려준다. 수준이 높다고 한다.

 

제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건축가끼리도 얼굴을 자주 보는 것 같다.

제주도내 주변 건축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떻게 해보라는 주문도 많다. 가만히 있어도 정보가 오간다. 복을 받은 셈이다.

 

- (이야기를 나누다가 건축 외의 일도 해봤다고 했다. 그래픽 업체에서, 인테리어 회사에서도 일을 했다. 그러다 야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일반적으로 건축 시스템은 야근을 권한다고 해야 할까. 학부 때도 그렇고. 이런 야근 시스템에 대한 느낌이라면.

복지가 잘 됐다는 북유럽 국가들도 건축 설계는 야근을 한다. 그걸 알고 놀랐다. 대신에 야근을 한 시간만큼 휴가를 준다. 보상 휴가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야근은 똑같지만.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좋겠다.

우리 업무는 사람이라는 자본이 엄청 들어간다. 집을 한번 짓는 데는 시간이 돈이다. 빨리 설계를 해야 돈이 절약된다. 북유럽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빨리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북유럽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휴가를 주는가 보다.

 

건축주를 위해서라도 빨리 진행을 한다는 의미인가.

건축주가 없다면 우리는 놀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건축주가 있어야 일이 있고, 그에 따른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건축에 발을 들여놓았나.

부모님이 건축 쪽, 하청 일을 했다. 부모님은 자신처럼 힘든 걸 하지 말라고 하더라. 중학교 때 설계라는 게 보여서 관심을 가졌고, 전문직이라는 게 끌렸다.

 

사무소 이름이 사이이다. 어떤 느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건축주가 없으면 일이 없어진다. 건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을 하는 것이다. ‘사이라는 단어에서 공간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텐데, 그런 의미도 있다.

학창시절 때 번호가 늘 42번과 44번 사이였다. 그 숫자가 좋았다. ·고교시절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정하는데 정씨여서 늘 42번부터 44번 사이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숫자 ‘4’를 기피했지만 4를 사랑하자고 마음먹었다.

 

건축가들의 역할은 아주 많다. 건축가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할까.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할 단계가 아니다. 그 위치까지 올라가려면 아직은 부족하다. 나중의 일이라고 본다.

 

상대하기 어려운 건축주라면 어떤 부류일까.

계약을 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을 내달라는 분이 있었다. 되지도 않는 걸 만들어달라는 사람이 있다. 억지를 부려서 해달라는 분들, 법으로 되지 않는데 요구를 하는 분들이 있다. 안된다고 설명을 해도 그런 분이 있다.

 

편한 건축주는 있나?

편한 건축주는 절대로 없다. 쉽지 않다. 행정 업무도 많아졌고, 법도 복잡해졌고, 민원도 많다. 민원은 공사 때문에 시끄럽다는 민원이다. 말은 안하지만 돈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계속 민원만 거는 이들도 있다.

 

도심 외곽과 도심지는 다른데, 어떤 차이를 두나.

조건이 다르기에 다르게 나온다. 건폐율도 차이가 난다. 외곽지는 풍광이 다르다. 오름이 있다면 오름을 먼저 봐야 한다.

 

<코르뷔지에 너 오늘도 행복하니>, 에이리가족과 네임리스건축이 씀

 

코르뷔지에. 상상하는 그 이름, 바로 근대건축을 말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이름이다. 그런데 책에 등장하는 코르뷔지에는 사람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아홉칸집’ 건축주가 데리고 있는 개 이름이다.

건축주 부부는 일본에 살 때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났다. 책을 통해 코르뷔지에를 봤고, 코르뷔지에가 스위스 레만에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작은집’에 매료됐다. 건축주 부부는 언젠가는 그런 집에서 사리라는 꿈을 꾸면서. 나중에 아홉칸집 주인이 되는 부부. 이들 가운데 화가로 활동하는 부인 고경애씨는 코르뷔지에만 생각하면 행복했던가 보다. 데리고 있는 불도그에게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지어줬을 정도이니.

네임리스건축은 잘 나가는 젊은 건축가 부부의 사무실 이름이다. 에이리가족은 부부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다. 책은 건축가의 일방적인 글도 아니며, 집에 기거하는 건축주의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다. 소통의 이야기다. 집을 짓고 1년간 에이리가족과 네임리스건축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축주가 집을 알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 건축가의 상상과 조언이 덧붙는다. 건축주와 건축가가 대화를 하는 모습이 잘 담겼다.

집은 독특하다. 가로·세로가 똑같은 정사각형의 노출 콘크리트 주택이다. 거기에 구획을 두니, 아홉칸이 생겼다. 칸은 으레 사방이 막혀 있으나, 아홉칸집은 칸과 칸이 열렸다. 열린 칸이어서 집안 내부 곳곳의 움직임을 앉아서도 감지하게 된다.

특히 아홉칸은 ‘덜 된 건축’을 표방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건축은 ‘깨끗한 결과물’을 원한다. 벽도 깨끗해야 하고, 바닥이나 천장도 깨끗하면 더 좋다. 아홉칸집은 그걸 거부한다. 거친 면을 살리고, 크고 작은 홈과 깨진 모서리도 그냥 놔두었다. 천장에 얼룩진 자국도 그대로 수용했다. 건축주는 “동굴 같아서 더 좋다”고 했다. 네임리스건축도 건축주 의견을 받아서 정교하게 다듬지 않았다고 한다. 그 느낌을 네임리스건축은 책에서 다음처럼 표현했다.

“현장의 우연성으로 채워진, 의도한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모든 과정이 이 집의 콘크리트 표면에 자연스러운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결국 조금 덜 만들어짐은 섬세하지 않고 투박하며 때로는 오류로 비춰질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여지를 남긴다.”

건축가로서 네임리스건축은 잘 정제된 노출 콘크리트라가 아니라,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다. 그렇다고 ‘덜 만들어짐’은 건축주만의 생각만으로, 건축가의 이상만으로 해결되진 않는다. 두 주체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덜 만들어짐’은 수용되기 어렵다. 건축주인 에이리가족은 ‘덜 된’ 노출 콘크리트를 바라보며 순수함에 이끌렸다고 한다. 거기에 ‘불완전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남겨두기로 했다.

집은 소유욕의 화신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을 원한다. 아파트도 있겠지만, 집을 원하는 모든 이의 로망은 ‘개인주택’이다. 문제는 돈이다. 경제적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원하는 집을 갖는 건 언감생심이다. 아홉칸집도 돈 문제를 마주해야 했다. 돈이 넉넉했다면 투박한 노출 콘크리트가 아닌, 아주 잘 정제되고 말끔한 연예인급의 집이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속상해 하지 말자. 돈이 많다고 늘 좋은 집만 된다는 보장도 없다. 대규모 자본을 들여서 건축물을 세우는 일보다는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만들지가 더 중요하다.

건축가는 건축물에 자신의 혼을 담는다. 때문에 자신이 설계한 집에 그들의 영혼이 담기길 원한다. 건축물은 건축주의 집이며, 당연히 건축주의 혼이 담겨야겠지만 과도한 욕심을 지닌 건축가들이 많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달라진다. 처음엔 건축가의 혼이 담겼을지 모르지만, 집이 건축주와 살다 보면 건축주를 닮는다. 건축가를 닮는다면 그건 건축가의 집이지, 건축주의 집일 수 없다. 네임리스건축이 이에 대해 한마디를 했다.

“끈질기게 생각하고 대화하고 예측하고 조율하고 만들어낸 흔적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곳곳에 건축가의 기운을 남긴다. 그리고 그 깊이가 깊고 넓을수록 새겨지는 흔적은 강한 여운을 만든다. 여운이 있는 건축은 세상과 격리되어 독립된 고귀한 작품이 되기보다는 사용자에 의해 공간의 쓰임을 다하고 그 가치가 공유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아홉칸집을 기자가 아닌, 일상생활을 하는 시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특하게 보인다. 그 독특함이란 기존 가치관의 이탈을 말한다. 어딜 가나 다를 게 없는 아파트. 우린 그걸 원하지만 에이리가족은 거부한다. 지역의 역사가 다르고, 땅이 다른데 왜 눈에 보이는 아파트는 어디나 다 똑같느냐면서. 맞는 말이다. 우린 언제쯤이면 획일화가 아닌, 자신의 꿈을 그대로 담은 집을 짓는 시대에 살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정작 아홉칸집과 같은 공간이 주어진다면 거기에서 평생을 살 수 있을까? 답을 내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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